Bodies That Matter : On the Discursive Limits of Sex (Paperback) Routledge Classics 24
Butler, Judith / Routledge / 201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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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제목부터 이해가 어렵다. Bodies that matter. 

초 직역하면 물질인 몸들 정도겠다.

(matter가 문제라는 뜻도 있으니 이중적인 의미기도 할 것 같다.)

물론 책의 내용을 생각하면 하고 싶은 말은 '몸은 물질이다'가 아니라 

'몸은 물질화된다(materialized)'에 가깝기 때문에

의역하면 《물질화된 몸들:섹스의 담론적 한계》로 정리할 수 있을 것 같다.


이 책은 버틀러의 지적 여정에서 초반부에 쓴 책이고

《젠더 트러블》(1990) 이후에 쓴 책으로(이 책은 1993년에 씀) 젠더 트러블에서 제기한

수행성에 대해 더 이야기한다. 


이 외에도 정신분석적으로 성차, 섹슈얼리티에 대해 논하는 부분이 많은데

이리가레이, 지젝, 플라톤, 크레스테바, 라클라우, 무페, 라캉의 논의가 주 레퍼런스다. 


이 책의 주장이라고 이해한 바를 간단하게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1) 젠더 '수행성'은 의지주의적인 주체의 선택이 아니라, 역사적으로 쌓여왔던 규범들과 연결된 행위들의 인용과 반복이다.


2) 남성, 여성과 같은 섹스는 미리 주어진 것이 아니다. 만들어진 것이다. 그러므로 남성과 여성이라는 물질성은 이미 주어진 물질이 아니라, 물질화된 것이다. 


3) 하나의 정체성은 언제나 구성적 외부를 가진다. 즉, 동일화하여 정체성을 갖는 것은 그렇지 못한 것의 배제, 정신분석학적으로는 폐제된(foreclosed) 존재들이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범주를 넓히는 것 자체가 해답이 아니고, 인식 불가능한, 비체화된 것들을 고려해야 한다.




첫 번째 주장, 즉 reiteration과 citation을 통한 수행성은 이미 젠더 트러블에서 논했다. 하지만 문제는 '수행성'을 주체의 단독 행동, 혹은 역사성과는 무관한 의지주의적 행동들로 이해하는 것이었고, 이 책에서는 이런 가능한 오독에 보충적인 의견을 제시한다.


일단, 헤게모니라고 할 수 있는 섹스들. 즉, (시스젠더) 여성과 남성이 순전히 안정적인 범주가 아니라, 반복하여 수행하며 유지되는 범주라고 버틀러는 주장한다. 매 순간 '여성'은 여성의 행동을 하는 것이다. 이것은 그간 '여성적'이라고 생각했던 것들을 수도 없이 반복하는 것이다. 이런 역사성 안에서 '수행성'의 재의미화를 통해 (시스) 이성애적인 매트릭스를 벗어나려 노력할 수 있다는 것이다. 물론, 순수한 노력과 불순한 매트릭스를 주장하는 것은 아니며, 이것은 언젠가 끝나는 문제가 아닌 말 그대로 계속하는 여정이다.


그렇다면, 기존의 역사성과 규범을 인용하고 반복하는 수행성이 어떻게 전복적일 수 있을까? 그것은 행위들이 언제나 성공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버틀러는 주장한다. 이런 실패의 순간은 있고, 오어법적인 언어 사용(이성애 매트릭스에 맞지 않는 방식으로 언어를 사용하는 것, 이성애 매트릭스 입장에선 틀린 것이기에 오어법이라고 불리는 듯 하다)이나 수행성의 재반복과 재인용을 통해 이성애 매트릭스의 인식 불가능성을 폭로하는 작업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이 책 다음에 쓴 《Excitable Speech》(1997)-한국어판 번역판은 《혐오 발언》(2016)-에서 이 책에 이어서 언어의 수행성과 오어법적이라고 할 수 있는 언어 사용과 재전유(Queer라는 어휘 같이)의 전략들을 세밀하게 논평한다.




두 번째 주장은 푸코를 통할 수밖에 없다. 젠더 트러블에서도 논한 내용이지만, 담론 이전의 담론이란 없다고 버틀러는 푸코식으로 말한다. 다시 말해서, 섹스와 젠더가 따로 있는 게 아니라, 섹스 자체가 안정된 미리 주어진 담론이 아니고, 섹스 자체도 이미 자연화된 담론이라는 것이다.


남근이 있으면 남자라는 누군가에게는 자명해 보이는 이야기는, '남성'-'페니스(남성기)'라는 기호들의 우연적인 결합이라는 관점에서는 자명하지 않다. 여기서 우연적이라는 말은 random하다는 말이 아니라, 꼭 그럴 이유가 있는 것은 아니라는 의미이다. 이 우연적인 결합이 자명한 물질로 물질화되어 있는 것이 버틀러의 문제 인식이다. (다시 말해 섹스란 물질의 상태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말하는 것이 당연한 것으로 주입하는 방식으로 자연화한 것이고, 물질화한 것이라는 점. 그러니까 사실은 남성기라고 부르는 생식기관이 아니라 그 어떤 기관으로 대체하여 자연화했다면 그것이 남성의 판단 기준이 되었을 수도 있다는 말이다. 페니스에서 그 상징적 의미를 덜어내어 페니스는 많은 신체 기관 중 단지 하나의 기관일 뿐이라는 이야기도 가능하지 싶다.)


그러므로 시스젠더 남성과 여성을 바탕에 두고 팔루스니 남근 선망이니 거세 불안이니 하는 것은 어쩌면 전제의 오류일 수 있다. 이 이분적이면서 시스젠더적인 이해 자체가 이미 구성된 것이라면, 라캉이나 지젝과 같은 정신분석학의 주장은 상당히 설득력이 떨어질 것이다. 버틀러가 제시하는 레즈비언 팔루스는 흥미로운 일종의 철학적 유희(?)로도 볼 수 있다. 부치 스타일 레즈비언과 팔루스의 관계는? 이들은 거세 불안을 겪을 것인가? 아니면 라캉적으로 '여성적인' 이미 거세된 존재인가? 팔루스 갖기와 팔루스 되기의 뒤섞음을 통해 라캉적 상징계에 균열을 내는 글쓰기를 시도한다.




세 번째 이야기는, 버틀러 고유의 주장은 아니지만, 여러 방식으로 계속 서술하는 내용이다. 이른바 정체성 정치에 대한(그 의미나 현실적 의의는 존중한다는 단서는 당연히 단다) 이야기 일 수 있다. 남성과 여성으로 인식되는 사람과 아닌 사람을 생각해 보자. 트랜스젠더 혹은 퀴어들은 인식불가능한 사람들로 간주되기도 한다. Undoing Gender(한국어본 : 《젠더 허물기)에서는 확정적인 젠더 범주를 설정하지 않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성애 남성은 남성을 사랑 대상으로 삼는 것을 폐제했기 때문에, 이 폐제된 사랑 대상은 애도되지도 않았기 때문에 가장 진실한 게이 남성의 우울증(프로이트적 의미에서 우울증 즉, 멜랑꼴리)은 이성애 남성의 우울증(멜랑꼴리)이라고 버틀러는 비틀어서 이야기한다. 이런 의미에서 이성애 남성의 강력한 게이 혐오는 정신분석적으로 아니면 간단하게 말해 콤플렉스나 상실과 애도라는 키워드로 이야기할 수 있는 테마인 것 같다. 


이성애적 욕망과 동성애적 욕망의 은근한 연속성을 정신분석적으로 이야기한 부분은 흥미로웠고, 넬라 라슨의 《패싱》이나 윌라 캐더의 소설들을 이브 세지윅적인 독해로 이성애 욕망과 동성애 욕망을 분석한 부분은 '여성 서사'란 무엇인지 생각해 보게 하는 독해로 읽혔다.


나는 이 책에서 오어법적인 언어의 수행 부분에 여러 아이디어를 얻었고 지극히 동시대적인 전략일 수 있다는 생각도 했다(언어적인 것이 단순히 수사적인 것이라기보다는 라캉적인 의미에서). 물론 《혐오 발언》을 읽으면서도 비슷한 생각을 했지만, 언어란 당연하게도 편파적이며, 언어라는 기호는(문자나 말도 하나의 기호) 물질화되어 있고, 특히, 시스젠더 이성애 매트릭스로 코드화되어 있기 때문에 이를 폭로하고 이에 비껴나와, 자연적인 언어가 아니라는 것을 드러내는, 때로는 유머러스한 전략들이 현재에 유의미하다고 생각했다.


언제나 그렇듯 이런 이분은 잠정적이고 임시적인 것임을 고려하고 양해를 바라며 이야기해 보자면, 무성애/유성애, 트랜스젠더/비트랜스젠더, 섹슈얼/로맨틱, 팬, 데미, 바이 섹슈얼 로맨틱 등 여러 관점에서 이 책을 읽는다면(물론 이런 범주와 용어들은 미국의 상황적 지식임을 감안해야 한다) 정신분석학적인 틀이 단순히 '여성적'인 것과 '남성적'인 것의 얽힘만의 문제는 아닐 수 있다. 물론 이 책이 쓰인 시대와 상황은 인지해야 하겠지만, 드랙을 패러디를 패러디하는 혹은 인지하진 못하지만 이미 과장스러운(hyperbolic) 시스젠더-이성애자의 행위들을 인식할 수 있게 한다는 주장 역시도 다소 드랙을 도구화한다는 비판을 피하긴 어려워 보이기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트랜스젠더를 배제하는 페미니즘(말 자체가 어폐이긴 하지만)이나 설거지론 같은 해괴한 상상계에 의지하는 진정성의 근원은 어쩌면 여성과 남성의 물질화된 조건을 너무나도 당연하게 물질로 받아들였기 때문이 아닐까? 전자는 진짜 여성에 대한 강박적인 집착이 후자는 가부장 남성성의 거세불안으로도 보인다. 물론 몸은 물질이다. 그런데 어떻게 물질이 되었는지 따져보는 것이 급진적으로 민주적인 사회를 만들자는 버틀러의 핵심적인 주장이고, 많이 동의할 수밖에 없는 이야기라고 생각했다. (이 책에서 장애 범주를 다루지 않아 아쉽지만, 인종 범주는 다룹니다. 당연히 섹스 범주와 인종 범주가 따로 있다고 주장하지도 않습니다만, 쓰다 보니 섹스나 젠더에 대한 글만 써서 오해할 수 있어서 첨언합니다. 영화 《파리 이즈 버닝》이나 넬라 라슨의 《패싱》도 소재이므로 인종 이야기는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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