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발턴은 말할 수 있는가? - 서발턴 개념의 역사에 관한 성찰들 프리즘 총서 11
로절린드 C. 모리스 엮음, 태혜숙 옮김 / 그린비 / 201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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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체주의적인 글쓰기는 일단 직관적 이해가 어렵다. 적어도 과문한 내가 이해한 바에 따르면, 하나의 제스처로서-확답은 하지 않으며- 응답을 요청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변적이거나 아카데믹하게 느껴질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정체성 정치라는 전 지구적 자매애 같은 것에 동의한다는 것은 아니다. 그런 본질주의를 반대한다고 해도, 해체주의적인 스피박의 이야기는 오롯히 납득이 가능한 것은 아닌 것 같다.


 그럼에도 여전히 재현은 현재적이고 문제적인 이슈다. 누군가를 위해 말하는 것, 누군가를 묘사하는 것 모두 재현에 담긴 뜻이다. <서발턴은 말할 수 있는가?>는 이 재현의 불가능성을 이야기하며 다소 단정적으로 서발턴은 말할 수 없다고 이야기한다. 물론 당연하게도 이런 단정은 수사일 뿐 스피박의 진의는 아닌듯하다. '서발턴'은 어떤 방식으로든 말을 하고 있지만 듣는 이들의 가청범위가 낮은 탓이다. "유효한 제도적 배경"이 없이 말하는 '서발턴'의 말(문맥에서는 '저항')은 들릴 수 없다고 스피박은 말한다.


 여기서 (여성)서발턴은 여러 겹의 억압을 받은 여성, 애도되지 않은 여성, 여전히 통계상 암수로 남은 일종의 '수동적인' 여성만을 뜻하진 않는다. 어떤 방식으로든 저항하고 목소리를 내고, 시도를 했지만 그것이 저항이나 목소리로 인식되지 않고 죽은 이들도 서발턴의 한 사례이다. 스피박이 제시한 부바네스와리 바두리는 하층 계급 여성이 아니다. 다시 말해, 중간 계급의 민족주의 투사 여성도 어떠한 조건 하에서는 서발턴으로 해석된다는 점이다. 


 제국주의, 가부장적 민족주의 간의 대립 모델의 사이에서. 혹은, 제국주의적 코드화로 토착민들을 코드화하는 전략과 이에 대한 다른 해석의 사례로 제시할 수 있는, 사티(과부 화살)를 칭송하는 민족주의적이면서 가부장적 해석들(영국의 식민권력은 사티를 법으로 금지했다). 조금 더 세부적으로 맥락에선, 제1세계 제국주의와 이를 암묵적으로 승인하는 지식인 '주체'들, 제3세계에서 이에 호응하는 토착민 지식인(스피박의 표현을 빌리면 '토착 정보원'), 사티(과부 화살)를 "여성들이 죽고 싶어 했다"라며 순전한 선택으로 치부하며 칭송하는 뻔뻔한 토착주의적 진술들 사이에서. 돌이킬 수 없이 이질적인 여성 서발턴들의 어떤 저항들은 저항들로 기록되지도 인식되지도 않는다는 것이 스피박의 문제 인식으로 보인다. 그러면서도, 서발턴을 감별하려는 시도보다는, 서발턴을 형성하는 그 조건을 어떤 방식으로 이해하고 접근할 수 있는지 자신의 위치(메트로폴리탄의 시민이면서 제3세계 출신이며 엘리트이며 교수인 여성)에서 할 수 있는 응답 능력 혹은 다가가는 제스처를 이야기한다. 이 책은 지식인의 윤리적인 방어이기도 하지만, '서발턴'에 응답하거나 다가가길 요청하는 글로 읽혔다. 예상 독자는 '서발턴' 보다는 이에 응할 수 있는 사람들이라는 것. 서발턴이 말할 수 있는지 없는지 논하는 사람들은 '서발턴' 자신들은 아닐 것이라는 점도 의미심장하게 느껴졌다. (스피박은 푸코와 들뢰즈의 대담에서 서구 지식인 '주체'라는 자신의 입지를 무시하는 분석을 비판하는데, 스피박도 같은 일을 한다는 것은 아니다. 물론 지식인-서발턴을 단순하게 나눌 수 있다고 말하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지식장에서 벌어지는 담론에 대한 비판들이 액티비스트적 글쓰기를 포함하고 의미가 있지만, 그 안에 한계나 결여는 없을까? 서발턴에 대해 쓰는 '지식인' 스피박의 욕망은 무엇일까?)


 지구적 환경 위기, 제1세계(미국)의 빅테크 기업들의 독과점 등 달라진 자본주의의 상황 안에서, 이제는 소비주의가 더욱 자연적인 경향으로 여겨지고, 변모하는 국제 노동 분업으로 제1세계 안에서도 이질성이 만연한 상황에서, 충분히 많은 사람을 담긴 어렵지만 그럼에도 쓰이는 '퀴어'라는 용어와 에이블리즘과 (인)종 차별주의에 대한 반대 등 다양한 의제들과 관점이 제기되는 상황에서, <서발턴>을 어떻게 다시 읽을 수 있을까? 누군가를 서발턴이라고 부르거나 재현하는 것에 부담감을 느끼며, 서발턴이 누구인지 보다는 서발터니티를 곱씹으며 어떤 정치적이고 윤리적인 행동을 할 수 있고 해야 하는지, 이런 글을 읽으며 곱씹는 지식인 혹은 식자층들의 한계는 어떤 점인지 생각하게 하는 텍스트로 이 책이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다. 


 다른 저자들의 조금은 다른 관점과 맥락을 담은 이야기들도 다양한 고민거리를 제공한다. 젠더화나 서발터니티. 서발터니티와 죽음의 드러냄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라에스와리 순데르 라잔(3부 <죽음과 서발턴>이나 푸코적인 생명정치라는 관점으로 서발턴을 이야기하는 펭 치아(4부 <생명권력과 새로운 국제 재생산 노동 분업>). 가정의 재생산 업종에서의 국제적인 하청과 이들과 관련 있는 생명정치는 한국의 결혼 입국과 체류 자격 연장에 대한 이야기가 떠오른다. 여성에게도 아내가 필요하다는 미러링에 가까운 말속에 어떤 인식론적 폭력이 담길 수 있는지도 생각해 보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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