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랜도 - 기획 29주년 기념 특별 한정판 버지니아 울프 전집 3
버지니아 울프 지음, 박희진 옮김 / 솔출판사 / 201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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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인공 올랜도는 16세기 엘리자베스 여왕시대 영국에 사는 16세 남자 귀족이다. 유서깊은 귀족가문이었으며 여왕의 총애를 받아 경제적으로 매우 부유했다. 1603년 엘리자베스 여왕 서거 후 제임스 왕이 등극한 이후 1608 영국에 대한파가 찾아온다. (올랜도의 시대적 배경은 역사적 사실을 토대로한다. 실제로 소설의 배경이 된 성에 엘리자베스 여왕이 방문했음) 제임스 왕은 꽁꽁 언 강물 위를 장식해 사교의 중심지로 만들고 올랜도는 여기서 러시아 공주 사샤를 만나 사랑에 빠진다. 이미 약혼한 몸이었던 올랜도는 사랑의 도피를 계획하지만 사샤의 배신으로 상심한 나머지 깊은 잠에 빠진다. 만 칠일 동안 깊은 잠에 빠졌다가 깨어난다. 이후에도 반복 되는 이 깊은 잠은 올랜도의 내적 변화 또는 성장을 상징한다. 잠에서 깨어난 이후 올랜도는 해리엇 대공의(올랜도에 반해 여자로 꾸며 올랜도를 찾아옴) 집착을 피해 터키의 콘스탄티노플에 대사로 간다. 대사의 업무를 훌륭히 수행한 올랜도가 공작 작위를 수여받는 날 밤에 콘스탄티노플에 소요가 일어난다. 하필 이날 올랜도는 또다시 깊은 잠에 빠져들지만 다행히 무사하다. 그런데 목격자에 의하면 이날 올랜도가 발코니에서 한 여자(올랜도와 결혼서약서를 작성한 페피타)를 밧줄로 끌어올렸다고 한다. 아무튼 다시 깊은 잠에 빠져든 올랜도는 칠일 째 되는 날 여자가 되어 깨어난다. 너무도 자연스럽게 여자인 자신을 받아들인 올랜도는 대사직을 버리고 집시 무리에 합류하여 자연의 아름다움을 만끽한다. 하지만 집시에 완전히 동화되지 못한 올랜도는 집으로 돌아올 결심을 한다. 집으로 돌아오는 항해 중에 올랜도는 아름다운 여성이기에 누릴 수 있던 호의를 누린다. 집에 돌아오자 기르던 동물들은 그를 온전히 받아들인다. 그의 정체성은 변함 없다는 뜻이다. 하지만 외부적인 환경은 여성인 올랜도를 억압한다. 몸을 조이는 의상, 여자이기에 재산을 소유할 수 없다는 법 등 올랜도는 어딘가에 귀속되어야할 존재가 된다. 올랜도가 여성이 되자 해리엇 대공은 자신의 정체를 밝히고 끊임없이 구애를 펼친다. 해리엇 대공의 구애를 거절한 올랜도는 다시 잠이 들어 열흘만에 깨어나는데, 이때 운명의 상대 쉘을 만나 결혼한다. 쉘은 모험가로서 항해에 유리한 바람이 불자 다시 항해를 떠나고, 올랜도는 글을 쓴다. 1928년 올랜도는 아들을 출산하고 자신의 시 '참나무'를 출간한다.

  양치식물이 무성한 길은 여러 차례 구불거리면서 점점 더 높이 올라가, 정상에 있는 참나무에 이르렀다. 참나무는 올랜도가 1588년경에 본 이래로 더 커지고, 큰튼해지고, 더 매듭이 많아졌으나 아직도 전성기였다. 가지에는 아직도 날카롭게 주름진 작은 잎들이 나뭇가지에 총총하게 매달려 흔들리고 있었다. 올랜도는 땅바닥에 몸을 던지고 누워, 나무뿌리들이 이리저리 갈비뼈처럼 뻗어 있는 것을 등 뒤에서 느꼈다. 그녀는 자기가 세상의 등을 타고 있다고 생각하과 싶었다. 그녀는 자신을 무언가 단단한 것에 붙들어 매고 싶었다. 그녀가 땅 위에 벌렁 누웠을 때, 가죽 재킷의 가슴팍 부분에서 빨간 천으로 장정한 작은 네모난 책 한권이 떨어졌다. - 그녀의 시 <참나무>였다. 285쪽

  올랜도는 1586년부터 1928년까지 글을 쓴다. 참나무라는 제목의 시집 초판은 닉 그린에 의해 철저히 농락당했다. 올랜도는 거의 제목만 남겨두고 다 지워낸 시집을 늘 가슴에 품고 다닌다. 이 시는 처음엔 아주 보잘것 없는 시였지만 올랜도가 성숙 또는 성장하는 동안을 함께한다. 올랜도가 한 인간으로서 통찰을 얻고 참나무를 출간하는 것과 여성으로서의 완숙을 의미하는 출산은 그 맥이 닿아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 소설을 이해할 때 중점을 두어야 할 것이 두가지 있다. 첫째는, 주인공인 올랜도가 16세기부터 20세기까지 300년이 넘는 시간을 산다는 것이다. 상식적으로 납득이 되지 않는 설정을 그대로 받아들이기는 쉽지 않다. 그렇다면 300년이 넘는 시간은 그 시대를 산 모든 여성의 삶의 모습을 상징적으로 나타낸 것일까?

  시간을 초월한다는 점 말고도 얼음이 투명해 밑에 같이 얼어버린 사람이 그대로 비치고, 사람이 얼어서 가루가 되어 흩어졌다거나 홍수가 나서 20인분의 음식이 차려져있는 식탁이 떠내려온다든가 하는 말도 안되는 표현이 등장한다. 이런 묘사는 소설의 판타지적인 분위기를 조성하는데 일조한다. 허나 가장 중요한 것은 시간이다. 올랜도를 시대를 초월하여 사는 사람으로 만들면서 울프가 이야기하고 싶었던 진실은 무엇일까?

마지막에 비전을 획득한 올랜도를 보여주며 소설은 끝났지만, 여성들의 삶은 이제부터가 시작이다라는 희망의 말을 전하고 싶었던게 아닐까? 단지 여자라는 이유로 남자형제들과 같이 대학에 진학하지 못했던 버지니아 울프이기에 여자들이 가진 한계를 뼛속 깊이 자각했을 것이다. 자신을 포함한 다수가 인식의 지평을 넓혀 여성에게 새로운 길이 열리길 희망했던것이 아닌가 조심스레 추측해본다.

  둘째는 성전환이다. 남성이던 올랜도가 여성이된다. 그 사실을 너무도 자연스럽게 받아들인다. 본인은 올랜도 그 자신이었기 때문이다. 독자로서 황당하기는 했지만, 울프는 여성이 당면한 여러 문제에 대한 고민을 입체적으로 풀어내기 위해 이렇게 설정한 것 같다. 남자로 살아 본 인물이 여자로 바뀌어 서술하면, 부당함이 몸에 배어 부당한지조차 모르는 여자들이 표현하는 것 보다 더 낯설게 더 객관적으로 볼 수 있다.

  울프는 여성이 부당한 대우를 받고 있다는 사실을 피력하지만, 여성이 열등하다거나 나약하다고 생각지 않는다. 올랜도가 총애를 받고 훈장을 받은 대상은 공교롭게도 극빈국이었던 잉글랜드를 45년간의 통치기간 동안 유럽최강국으로만든 엘리자베스 1세다. 신과 같이 강력한 권력이었다. 그런 여왕이 올랜드를 총애하며 영원히 늙지도 변하지도 말라고 명령하고, 그 명령은 주술처럼 올랜도를 20세기까지 살게 한다.

  여성으로 변하여 돌아와 재산을 몰수당할 처지에 있던 올랜도가 셀과 연을 맺은 다음 날 두 명의 경관이 찾아와 법률 서류를 전한다.

 "소송은 종결되었음"이라고 읽어나갔다. "어떤 것은 나한테 유리해요. 예를 들어 ……다른 것은 그렇지 못하고요. 터키에서의 결혼은 무효임(저는 콘스탄티노플에서 대사였어요, 쉘"이라고 그녀는 설명했다.) "자녀들은 사생아로 인정함(들리는 말에는 나와 스페인 무희 페피타 사이에 아들이 셋 있었다고 해요). 그래서 그들은 상속을 못 받는대, 이건 잘된 일이지요. … 성이요? 아! 성은 어떻게 되었지? 내 성은?" 그녀는 약간 엄숙하게 읽어나갔다. "이론의 여지없이, 그리고 추호의 의심의 여지도 없이(방금 제가 말했지요, 쉘?)여성이다. 영구히 가압류에서 풀려난 재산은 나의 직계 남자 상속인이 자자손손 상속받게 되며, 결혼하지 않을 시에는" -그러나 여기서 그녀는 장황한 법률용어에 짜증이 나서, "결혼 안 하는 일도 없을 것이고, 상속인이 없는 일도 없을 것이니, 나머지는 읽은 것으로 치지요"라고 말했다. 223쪽 224쪽

  올랜도는 본인의 말대로 결혼도 하고 상속인을 낳아 삶을 완성해 나간다. 올랜도와 쉘머딘의 결합과 아들의 출산을단순히 사랑의 완성과 그 결실이라고 볼 수는 없을 것 같다.

 "오! 쉘, 나를 두고 떠나지 말아요!" 그녀는 외쳤다. "나는 당신을 열렬하게 사랑하고 있어요"라고 그녀가 말했다. 그녀가 이 말을 하자마자 두 사람의 마음에 동시에 무서운 의구심이 몰려왔다.

"쉘, 당신은 여자예요!" 그녀가 외쳤다.

"당신은 남자예요, 올랜도!" 그가 외쳤다.

세상이 시작된 이래 그때와 같은 항의와 입증의 장면은 결코 없었다. 221쪽

 "나는 여자야"라고 그녀는 생각했다. "마침내 진짜 여자가 되었어."그녀는 자신에게 이같이 드문 뜻밖의 즐거움을 준 본스롭에게 진심으로 고마워했다. 222쪽

  올랜도는 쉘머딘으로 인해 진정한 여자가 됨을 깨닫고 기쁨을 느낀다. 울프는 올랜도를 통해 남자로서의 삶과 여자로서의 삶을 모두 보여준다. 남자도 여자도 모두 완벽무결한 존재가 아니라고 얘기한다.

 말이 덮치듯 그녀 가까이에 왔다. 그녀는 벌떡 일어나 앉았다. 노 란 줄무늬가 비치는 이른 새벽의 하늘을 등지고, 물떼새들이 이리저리 나는 가운데, 말 위에 한 남자가 검은 그림자처럼 우뚝 앉아있는 것을 보았다. 그는 깜짝 놀랐다. 말이 멈춰 섰다.

"부인"하고 그 사내는 말에서 뛰어내리면서 소리쳤다. "다치셨어요!"

"선생님, 전 죽었어요!"라고 그녀가 대답했다. 219쪽 220쪽

 쉘머딘을 만나 처음 내뱉은 말이 "전 죽었어요!"였다. 오랜 세월을 거쳐 행복을, 명성을 찾아다녔지만 발견하지도 얻지도 못했던 올랜도는 진정한 사랑을 발견한 순간, 과거의 자신은 죽었다고 말한다. 울프는 노력하고 좇아도 이룰 수 없는 현실의 영예나 행복보다 사랑을 추구하는 것이 더 가치있다고 말하고 싶은 걸까?

  이 소설이 버지니아 울프가 블룸즈버리 그룹을 함께 한 동성 애인, V. 색빌웨스트에거 헌정하는 소설이라는 점이 의미심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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