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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 - 2016년 카네기 메달 수상작
사라 크로산 지음, 정현선 옮김 / 북폴리오 / 2017년 11월
평점 :
절판
여기, 지금껏 보지 못한 새로운 소설이 하나 있다.
사라크로산의 소설원은 작은 크기의 책자부터 행과 연이 재미나게 구분된 글의 형태까지 자유시형태를 띄고 있다.
내가 여지컷 자유시형태의 소설을 못 봐서 그런지 몰라도 감동소설 원은 신기하고 새롭다.
소설인데 시같다.
까만 글자들을 하나의 뭉텅이이자 그림으로 본다면 그저 시를 보고 있는 듯하다.
한글로 번역된 내용과 단어들마저도 단순해서 원서로 읽어도 충분히 이해될 거라고 생각한다.
기록 형식이자 일기를 보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게 하는 연말연시 최고의 책선물 소설원은
그래서 그런지 '프린세스 다이어리'(멕 케봇 저)를 떠올리게 한다.
배우 앤 해서웨이 주연의 영화 '프린세스 다이어리' 가 넘나 맘에 들어서 그 길로 당장 시리즈 원서 몽땅과
앤 해서웨이의 음성이 담긴 책 녹음 CD까지 구매하였다.
사춘기를 겪고 있는 소녀 미아의 마음과 그녀의 일상, 그리고 어조가 나를 사로잡았다.
그런 점에서 북폴리오의 소설원도 같은 맥락에서 볼 수 있겠다.
자유시형태이지만 어쩐지 소녀의 일기같아서 이해가 쏙쏙 되고 독서 진행률이 빨라져서 1시간 30분만에 독파하였다.
Here
We Are.
And we are living.
Isn’t that amazing?
How we manage
to be
at all.
소설이 시작되는 첫 부분을 보면 굳이 한글 번역을 보지 않아도 얼마나 심플한 어조를 구사하는지 알 수 있다.
한글 번역본 보고 원서를 구매하고픈 마음이 들기는 정말이지 오랜만이다.
결합쌍둥이인 그레이스와 티피는 쌍둥이라기 보다는 자매에 가까울 만큼 극단적인 성격 차이를 보인다.
활발하고 자기 주장이 뚜렷한 티피와는 달리 소설원에서 나레이터 역할을 하는 주인공 그레이스는 생각을 주로 하는 편이다.
행동보다는 그 전에 생각을, 그리고 고민하는, 그런 성격이다.
나는
아무런 표정도 짓지 않았다.
그저 듣고
고개를 끄덕이고
셔츠 위로 비어져나온 실밥을
단추가 떨어질 정도로
잡아당겼을 뿐이다.
하지만 티피는 참지 못했다.
말 그대로 폭발해버렸다.
"지금 나 놀려요?
정신이 어떻게 된 거 아니에요?"
그렇게 소리를 지르며 한참을 엄마 아빠와 다투었다.
p. 8-9
참으로 이기적인 생각을 하게 하는 북폴리오의 신작이다.
샴쌍둥이 중 한 명인 그레이스의 시점에서 바라본 세상을 그린 결합쌍둥이 소설원.
장애인으로 사는 게 얼마나 힘든지 읽어나가면서 내가 가진 삶에 감사하게 되는 그런 이기적임이다.
가게에 도착하자 우리 둘 다
너무 숨이 차서
우유를 집까지 들고 갈 생각이 조금도 들지 않았다.
p. 20
고작 집 앞 슈퍼 가는 행위도 숨이 차서 힘들어하고, 때때로 지독한 감기에 걸리기도 하며, 기절하기도 한다.
사람들의 시선, 동정심, 경멸, 두려워하는 태도나 학교 생활의 불편, 가족의 경제적 어려움 등
결합쌍둥이로 살아가는 것의 여러가지 어려움 중에서도 가장 큰 어려움은 단연 건강일 것이다.
정기적으로 건강 검진을 받고 병원에 가서 상담 받아도 샴쌍둥이가 그렇지 않은 사람들처럼 수명을 다 채우기란 극히 힘드니 말이다.
어쩌면 소설 속 그레이스와 티피가 살고 있는 청소년기는 그들에게는 얼마 남지 않은 생의 순간일 수도 있다.
어른이 되지 못한 채 생을 마감할 수도 있다.
카네기메달을 수상한 청소년 문학이자 성장소설이니만큼 학교와 교우관계, 사랑에 대해서도 빼놓을 수 없겠다.
홈스쿨링만 하다가 처음으로 가게 된 사립학교에는
에이즈에 걸려 아웃사이더로 생활 중인 야스민과 엄마 없이 새아버지와 살고 있는 존이 있다.
그리고 이 둘은 그레이스와 티피에게 친구이자 그 이상의 존재가 된다.
미술 수업 시간에 처음 만났을 때 존은
티피와 내게
차례로 손을 내밀며
인사를 건넸다.
우리가 정말 두 사람인 것처럼.
p. 64
한 몸, 아니, 정확하게 말 하면 하나의 하체와 두개의 상체를 지닌 결합쌍둥이인 그레이스와 티피 중
그레이스는 존에게 첫눈에 반한다.
존도 그런 그녀의 마음을 알아차리고 둘은 미래가 보이지 않는 서로에 대한 이끌림을 부정할 수가 없다.
한순간
티피의 존재를
잊고 있었다.
p. 237
존은 그야말로 멋진 남자애이다.
존이라는 캐릭터를 보면서 '프린세스 다이어리' 의 마이클이 떠올랐고, '잘못은 우리 별에 있어' 의 어거스터스가 떠오르기도 했다.
셋의 공통점은 잘 생기고 주변의 눈을 의식하지 않고 거적대기를 입혀도 잘 어울리는 뛰어난 신체 비율을 지녔다는 점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선입견을 가지지 않는 맑고 착한 인성을 지니고 있다.
그래서 만약 사라크로산의 소설원이 영화화된다면 가장 기대되는 등장인물이 바로 존이다.
존의 목소리는 차분했고
눈빛은
냉정하고 도전적이었다.
"나는 너희가 아름답다는 말을
하고 싶었을 뿐이야.
그뿐이라고."
p. 156
이런 말을 듣고 두근두근하지 않으면 그야말로 바보다.
새벽에 술 마시다가 여자 생각이 나서 전 여친에게 문자나 하는 그런 멍청이 성인 남성 말고,
순수하고 착한 심성을 지닌 남자아이가 있다.
그레이스와 티피의 모습은 실화가 아니지만 실화의 그것과 참으로 닮아있다.
결합쌍둥이가 일상에서 경험하는 차별과 불편함은 소설 속에서 10대 소녀의 관점으로 담겨져있고,
그들이 겪는 고통에 비하면 내가 매일 느끼는 스트레스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걸 알 수 있다.
삶이 순조롭게 흘러갈 때
사람들이 걱정하는 모습이
얼마나 우스꽝스러운지.
p. 352
한 때 "짜증나." 를 입에 달고 산 적이 있다.
버스를 놓쳐서 짜증나고, 아침에 학교 갈 때 할머니께 꾸중 들어서 짜증나고, 해 온 숙제를 검사하지 않아서 짜증난다.
요즘엔 지하철에서 노인분들에게 밀려서 짜증나고, 기껏 찾아간 맛집이 문을 닫아서 짜증난다.
그런데 이런 일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거지.
누군가 말하듯 '머리 두 개 달린 괴물' 로 산다는 게 얼마나 힘든지 알 수만 있다면 말이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난 정말 이기적이게도 그레이스를 통해 위안을 받고, 티피를 통해 감사를 한다.
장애인이 아님에 대해서.
연말연시 책선물을 원하는 감수성 풍부한 소녀에게, 작아서 지하철에 들고 다니기 좋은 감동소설 찾는 누군가에게,
사라 크로산의 소설원을 추천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