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빌 백작의 범죄
아멜리 노통브 지음, 이상해 옮김 / 열린책들 / 201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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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멜리 노통브의 소설 [느빌 백작의 범죄] 는 표지부터 윌리엄 셰익스피어 시대의 희극을 떠올린다.
[한여름 밤의 꿈], [말괄량이 길들이기], [뜻대로 하세요], [십이야] 속 한 장면일 듯한 두 남녀가 총을 갖고 겨루는 그림.
사실 그 남자는 아버지이고, 그 여자는 그의 딸이며, 이 둘은 각기 죽이지 않으려고 그리고 죽여달라고 애쓰는 중이다.
몰락한 귀족 가문과 그들이 가지고 있는 마지막 보루인 성, 이러한 배경을 생각하다보면 16~17세기를 떠올리기 쉽지만
놀랍게도 이야기가 펼쳐지는 시대는 바로 지금, 정확히 말하면 몇 년 전인 2014년, 즉 21세기이다.
백작, 영지, 귀족들의 파티, 점쟁이와 오레스트, 엘렉트르 라는 이름들까지 어느 하나 현대적인 점이 전혀 없는 책이지만
작가는 현대에서 일어난 일이라고 주장하기에 그런가 보다라고 생각하게 된다.
크기도 작고 분량도 작은 프랑스 소설 [느빌 백작의 범죄] 는
읽을 때 희극이나 어른을 위한 동화, 아니면 블랙 유머를 보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들게 한다.
저자인 아멜리 노통브가 샤를 페로의 잔혹 동화를 다시 써보는 도전을 해 왔듯이 그런 시각으로 본다면 이해가 더 쉬울 것이다.
매우 잘 만들어진 한 편의 소설 같지도 않고 해피 엔딩도 새드 엔딩도 아니고 오히려 이솝 우화에 가까울 수도 있는 이 책은
그렇기에 묘한 매력을 지니고 있다.
우리가 흔히 로맨스, 로맨틱 코미디, 판타지, 공상과학, 스릴러, 추리 등으로 소설의 장르를 나누지만,
이 책은 그렇게 나누기가 여간 어렵지 않다.
마지막 책장을 덮은 후 내가 느낀 건 '중세 희극의 패러디물 같다.' 라는 것이다.
음악으로 치면 리메이크곡을 듣는 기분이다.
따라서 책을 읽기 전 미리 전하는 바이다.
머릿 속을 비우고 아무 생각없이 읽는다면 1시간 안에 빠르게 읽을 수 있을 것이다.
비평하려 하지 말고, 비판하려고도 하지 말고, 해석하려 하지 말고, 교훈을 얻으려 하지 말고, 그냥 읽자.
괴물 같다고 해서 반드시 가치가 없는 것은 아니다.




큰 틀은 중세 희극의 형태를 띄고 있지만,
그 속을 들여다보면 어느 시대 어느 세대나 겪었을 세대 차이와 부모 자식간의 갈등을 보여주고 있다.
아내를 매우 사랑하지만 대외 활동에만 신경쓰고 자식들과는 친하지 않은 아버지,
그런 아버지에게 절망감을 느끼며 극심한 외로움과 내면의 소용돌이와 싸우는 사춘기 딸이라는 소재만 보자면
이 소설은 매우 현대적이라고 말 할 수 있다.

차를 타고 성(城)을 향해 가는 동안, 느빌은 가출한 딸을 되찾은 아빠처럼 행동하려고 애썼다.
"나한테 무슨 할 말 있니, 얘야?"
"딱히 없어요, 아빠."

p. 13


자신의 딸이 한밤중에 숲 속에서 점쟁이에게 발견되었다는 사실에 여느 아버지처럼 놀라긴 하지만 금새 진정된다.
사춘기 자녀를 둔 아버지라면 어떻게 해야 한다고 적어 놓은 글을 책에서 읽은 듯
그는 의식적으로 행동하고 말하며 그런 스스로에 대해 자랑스러워한다.

"나도 네 나이 때 너처럼 숲에서 밤을 지새워 본 적이 있다는 거 아니?"
" 아, 그래요?"
"너만 괜찮다면 엄마한테는 얘기하지 말기로 하자꾸나. 걱정할 테니까."
"알았어요."
느빌이 딸과 대화다운 대화를 나눈 걸 뿌듯해하며 긴장을 푸는데 문득 점쟁이가 한 예언이 떠올랐다.

p. 14

그에게 있어서 딸이 짧은 '가출 비슷한 걸' 했다는 건 그리 중요한 게 아니다.
지금 가장 신경 쓰이는 건 자신이 그토록 자랑스러워하는 가든파티에서 손님들 중 한 명을 죽이고 말게 될 거라는 점쟁이의 예언이다.
여기서 우리가 사는 이 세계에서는 이해하지 못할 모순적인 느빌 백작의 태도를 발견하게 된다.
물론 딸 세리외즈가 열두살 이후로 명랑하던 분위기가 급격하게 변하더니 말수가 없는 아이가 되어버렸고,
이런 짧은 가출을 그녀가 다시 살아나고 있다는 증거로 받아들이는 느빌 백작이 아주 이상하기만 한 건 아니다.
그렇다 할 지언정, 21세기에 사는 그 누구가 '사기꾼일지도 모를', '사기꾼이 아닐 지라도 어차피 증거없이 말하는'
점쟁이의 말을 신뢰하고 딸이 한밤중 숲에서 발견되었다는 사실을 간과할까?
평소 미신을 잘 믿고 점과 운세에 지나치게 의지하는 사람이 아니라면, 누구라도 느빌 백작을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이는 소설 전반에 깔려 있는 의도적 왜곡, 비틀림, 모순들 중 하나일 뿐이다.





실소를 자아내게 할 정도의 풍자는 느빌 백작이 아주 잘 보여주고있다.
점쟁이의 말 한 마디에 가든파티에서 누굴 죽여야 할 지, 어떻게 죽이고, 또 어찌 해야 가든파티의 명성에 누가 되지 않는지까지도
제법 철저히 조사하고 계획하는 모습을 보인다.
누군가는 이렇게 말할 수 있다.
그냥 파티를 취소하면 되는 간단한 문제 아니냐고.
하지만 느빌 백작에게 있어서 가든파티란 자신의 정체성을 확인하고 모두에게 인정받고 모두를 즐겁게 하는 유일한 방법이고,
게다가 마지막 가든파티이기까지 하다.

"한 가지 더 물어볼 게 있네. 자네가 말한 살인사건 중에 범죄를 계획한 경우도 있었는가?"
"물론 없었네."
"왜 <물론> 인가?"
"계획된 범죄였다면, 사교계가 그걸 받아들일 수 없는 것으로 여겼을 테니까. 순간적으로 발끈해 손님을 죽이는 것에서는 품격이 느껴져. 멋이 있지. 손님을 살해하려고 계획을 꾸미는 건 천박하기 그지없는 일로서, 그자가 접대의 예술을 모른다는 것을 증명하네."

p. 67


느빌 백작과 에브라르 슈베링겐의 통화 내용 전체가 코미디 그 자체이다.
사교계 파티 중 주인이 일으킨 우발적 살인은 멋있는 행위이고, 계획된 살인은 품위가 없는 일인가?
물론 전자의 경우는 정상 참작이 될 수 있겠지만, 어차피 둘 다 범죄이고 법적으로 처벌받는 걸 모른단 말인가?
이는 그 옛날 귀족사회에 대한 조소일 수도 있겠지만, 좀 더 보편적으로 보자면
허레허식에 갇혀 남들이 보는 나의 겉모습, 이미지, 명성이나 명예만 신경 쓰는 인간에 대한 공격일 수도 있다.
아무 것도 모른채 살해당하는 손님의 입장에 대해서는 단 한 번도 생각하지 않는 느빌 백작.
모든 상황을 오로지 자신의 관점에서만 보는 이런 이기적인 모습은 지금 내 주변에서도 찾기 어렵지 않다.
겉으로는 멀쩡해보이는 느빌 백작은 타인의 입장을 고려하는 역지사지를 모르는 공감능력 결여의 소시오패스일지도 모른다.




신간소설 [느빌 백작의 범죄] 의 결말은 그야말로 반전이라서 화가 날 정도이다.
어찌 보면 해피엔딩이라고 할 수 있을까?
마치 셰익스피어의 희극과 비극을 구분하기가 애매하다고 말하는 것처럼, 해피엔딩이라고 말해야 할 지 가늠할 수가 없다.
만약 이 소설이 영화라 만들어진다면 마지막 장면을 본 관객들이 욕을 하며 극장 문을 나설지도 모르겠다.
마음의 준비를 단단히 하고 첫 장을 펼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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