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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먼 인 캐빈 10
루스 웨어 지음, 유혜인 옮김 / 예담 / 2017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표지에서 말하고자 하는 바
영화의 줄거리를 파악하려면 포스터를 보면 된다는 말이 있듯이, 도서의 표지는 책에서 매우 중요한 부분이자 첫인상을 차지한다.
소설을 다 읽은 시점에서 말하자면, [우먼 인 캐빈 10] 의 한국어판 표지는 매우 아쉽다고 할 수 있다.
영화 포스터로 치자면 "사실 얘가 범인이야!" 라고 말 한 격이라고나 할까?
아니, 그만큼은 아닐 수 있겠지만, 원서와 비교해봤을 땐 그 차이를 알 수 있다.
원서에서 보면 우선 한국어판과 달리 겁에 질린 듯 클로즈업된 여자의 얼굴도 흐르는 피도 없다.
오직 둥근 창과 비 내리는 바다, 그 위에 넘실대는 파도가 보일 뿐이다.
원서에서는 이 이야기의 배경이 배, 혹은 크루즈이며 비 오는 날 바다와 관련된 어떤 일이 생겼다는 걸 암시한다.
그러나 한국어판에는 여자가 갇혀 있다는 인상을 주기에 충분하고,
심지어 맨 위에 적힌 "여기서 나가야 한다. 이건 절대 내 상상이 아니다." 는
배 10호실의 여성, 혹은 주인공 여성 등 등장인물 중 누군가가 갇혀 있다는 걸 알림과 동시에
그 주체는 현실과 상상 속에서 오락가락 하고 있다는 걸 가르쳐주는 셈이다.
왜 이렇게 친절하게 설명해주어야 하는가.
이론서도 아니고, 자기계발서도 아니고, 하다못해 전기문도 아닌 반전의 매력이 있는 장르소설인데 말이다.
나는 평소 원서보다 더 나은 번역서의 표지 일러스트레이션을 봐 왔고, 우리나라 독자층만을 겨냥한 독특한 표지를 지지해왔기에
이번 루스 웨어의 소설 [우먼 인 캐빈 10]의 표지에 대한 실망이 크다.
작가 본인이 만족해 한 표지인지 아닌지는 알 수 없지만,
어쨌든 장르소설을 좋아하는 독자 입장에서는 불만족스럽다고 말 할 수 있다.
우리, 조금 더 암시의 미학을 살려보자.
크루즈라는 공간
'각계 인사들이 모인 초호화 유람선, 모든 것이 완벽하게 흘러가던 그 때 갑자기 일어난 사건.'
이라는 주제는 현실에서도 픽션에서도 흥미를 불러일으키기 마련이다.
예컨대, 타이타닉의 침몰 사건이 그러했고, 요즘 유행하는 방탈출카페 중에는 '웨딩크루즈 살인사건' 이라는 테마도 있다.
그렇다면 이토록 크루즈와 사건, 그 중에서도 살인사건을 결합시키기 좋은 이유는 무엇일까?
우선 육지가 아닌 공해상에서 일어난 사건이라면 사법 관할권 문제로 수사가 어려울 수 있고,
드넓은 바다 속에 빠져 버린 시체 자체를 찾지 못 할 가능성도 많다는 것이다.
사건이 영국 해상이나 공해상에서 벌어졌다면 노르웨이 경찰은 움직이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수사 의지보다는 사법 관할권 문제거든요. 장소에 따라 모든 것이 달라집니다.
p. 240
광활한 바다에 비해 한정되고 밀폐된 공간인 크루즈라는 공간 역시 살인이 일어나기 딱 좋은 조건이다.
원래의 인원에서 단 한 명이라도 없어지면 티가 확 나는 가운데, 모두를 의심할 수 있지만 누가 범인인지는 확신할 수 없다.
이런 '밀폐된 공간' 이라는 설정은 비단 크루즈뿐만 아니라 다른 교통수단인 열차에서도 찾을 수 있는데,
가장 대중적인 예로는 아가사 크리스티의 소설 [오리엔트 특급 살인사건] 을 들 수 있다.
[오리엔트 특급 살인사건] 에서는 밀폐된 공간에서 살인이 일어났다는 사실 이외에도,
개성있는 다양한 등장인물들에 대한 소개가 호기심을 느끼게 하면서
독자로 하여금 '범인이 아닐까...' 하는 의심을 하게끔 한다는 점에서 이 소설과 비슷하다.
심신이 미약한 주인공 여성
소설책추천하는 [우먼 인 캐빈 10]의 주인공 로라 블랙록은
같은 장르소설인 [걸 온 더 트레인] 의 주인공 레이첼을 너무나 생각나게 한다.
로라와 레이첼은 처음부터 끝까지 공통점이 많다.
둘은 어떤 연유로 늘 불안해하며 불면증에 시달리고 있어서 이를 약물과 술로 해결하려 한다.
알코올 중독 수준이라서 맨 정신으로 있으려고 해도 잘 되지 않는다.
잠은 손만 뻗으면 닿을 거리에 있다. 자야 한다. 그래야 한다. 지금 자지 않으면 미쳐버리고 말 것이다.
p. 35
내 잔에는 샤블리가 한 방울도 남아 있지 않았다. 어떻게 된 거지? 마신 기억도 없는데......
p. 98
두 여성 모두 자신들의 불안 증세로 인해 사랑하는 남자를 떠나 보낸 적 있고,
그 사실은 그녀들에게 또 한 번의 충격을 가져다주었다.
그렇지만 내게는 약을 먹는 것이 화장하는 것과 비슷했다. 변장이 아니라 내 원초적인 모습을 감추고 나를 더 나답게 만들었다. 나를 최고의 모습으로 만들어주었다.
벤은 그런 화장을 하지 않은 나를 본 적이 있다. 그 후 나를 떠났다.
p. 181
제 3자의 눈으로 보기엔 '문제있는' 여성이 사건을 목격한, 아니 목격했다고 여겨지는 당사자가 된 게 문제의 핵심이다.
그리고 이게 바로 소설을 더욱 긴장감있게 이끌어나가는 원동력이 된다.
하필 약과 술을 떼어놓고는 살 수 없는 여성이 목격자가 되어 증언을 하고 수사를 요청하니 누구도 믿지 않으려 한다.
점점 그녀조차도 자신이 실제를 본 건지 아니면 그저 상상한 건지 확신할 수가 없다.
그래요, 잠을 못 잤어요. 그래요, 술도 마셨어요. 그래요, 집에 강도가 들어온 적도 있어요. 하지만 내가 본 일과는 아무 상관이 없어요."
p. 178
매일 운동으로 자신을 단련하고 술이나 담배 따위에는 손도 데지 않는 건장한 청년이 목격자였다면 이야기는 어떻게 흘러갔을까?
아마도 이렇게 '짜증나는', 하지만 그래서 재미있는 장르소설이 될 수 없었을 것이다.
이메일 + 페이스북 댓글 + 온라인 커뮤니티 + 인터넷 기사
이미 수년 전부터 e-book이 종이책을 대신할 거라 했지만, 아직은 때가 아닌 듯하다.
작가 루스 웨어는 여전히 책을 쓰고 인기를 얻고 있으며, 나는 그 책을 손에 쥔 채 읽고 있지 않은가.
크레마 사운드를 터치하는 느낌을 종이를 넘기는 즐거움에 비할 수는 없다.
그러나 변화하는 사회를 종이책 안에 고스란히 담을 수는 있고, 이 소설 속에서도 그러하다.
주인공의 남자친구인 주다 루이스로부터의 이메일, 그의 헌신적인 페이스북 댓글, 댓글로 싸우는 인터넷 토론 채팅방, 웹 기사 등
다양한 온라인 기반 텍스트가 독자로 하여금 글을 읽지만 왠지 휴대전화나 컴퓨터를 보고 있다는 기분이 들게 한다.
주다루이스 : 아무도 없어요? 파멜라 크루 제니퍼 웨스트 칼 폭스 엠마 스탠튼 함부로 태그를 걸어서 죄송해요. 하지만 로답지 않은 일이라서요.
좋아요 댓글 9월24일 오전 10시 44분
p. 116
9월28일 월요일 오전 10시 3분
나는 셜록이다 : 실종된 영국인 로나 블랙록 사건 지켜보고 있는 사람? 시체를 찾았나 봐.
p. 270
이러저러한 소견에도 불구하고 소설은 꽤나 흥미진진해서 책장을 편 지 3시간여만에 다 읽어버렸다.
갑자기 더워진 날씨에 청량음료처럼 시원하게 해 준 소설이며, 여름에 읽을 소설책추천하는 작품이기도 하다.
그러니 만약 당신이 장르소설 팬이라든가, 저자 루스 웨어의 팬이라든가,
그것도 아니면 그저 머리 식힐 만한 소설을 찾고 있다면 이 책을 추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