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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 온 더 트레인
폴라 호킨스 지음, 이영아 옮김 / 북폴리오 / 2015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우리나라에서 3월 9일 개봉할 굉장히 두근두근하게 하는 스릴러 영화가 있다. 연기는 기본으로 잘 하고 완전 예쁜 에밀리 블런트 주연의 영화 걸 온 더 트레인. 사실 이 영화는 동명의 원작소설이 있고, 소설은 전세계적으로 대히트를 쳤다. 그리고 나는 이제서야 읽는다.
레이첼 - 알코올 중독, 톰과 이혼했으나 술만 취하면 자신도 모르게 연락, 알코올성 단기 기억 상실증 보유, 실직 상태
이 소설은 레이첼을 위주로 흘러간다. 그녀가 본 사실, 거기에 그녀가 보탠 상상력, 그리고 알코올로 인해 자꾸만 어긋나는 장면들. 이 모든 사건의 원인이 그녀일 수도 있고, 한 편 해결 역시 그녀가 한 것 일 수도 있다.
전 남편 톰과의 결혼생활에서 아기를 갖고 싶었으나 뜻대로 되지 않아 시작된 알코올 중독. 이제는 그녀의 전반을 지배하여 남편도, 직장도 그녀를 떠나게 만들어버렸다. 그녀에게 남은 유일한 소일거리는 매일 직장을 가는 척 타는 기차에서 보는 제이슨과 제스 - 그녀가 부여한 가상의 이름 - 커플의 결혼생활을 상상하는 것이다. 누군가 보면 '망상' 이라고 여길 만한 상상을 하면서 대리만족을 하는 레이첼. 그녀는 동정심이 생기는 대상이기도 하나 너무나 자신을 놔 버렸기에 오히려 비호감으로 전락하기 쉬운 캐릭터이기도 하다.
만약 나의 친구가 술에 취해 여기저기 다니다 전 남편에게 전화나 하고, 어디서 구르고 다친 상처를 갖고 온다면 좋아할까? 처음 몇 번은 위로해주고, 이유를 물어보고, 함께 이겨내려 노력하겠지만, 정작 친구 본인이 노력할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면? AA (알코올 중독자 모임) 에도 나가지 않는 친구를 나는 포기하고 말 것이다. 바로 그런 친구가 레이첼이고, 그래서 그녀가 목격한 장면과 경찰에서의 진술은 신빙성을 얻기 힘들다.
레이첼은 자신이 제스라고 상상했던 메건의 실종사건을 접하고 흡사 여자 탐정이라도 되는 양 메모까지 해가며 추리에 열을 올린다. 직접 제이슨, 아니 스콧의 집에 찾아가기도 하며 심지어 그와 하룻밤을 보내기까지 한다.
소설을 읽으며 답답해서 레이첼에게 "이제 제발 그만해!" 라고 소리치고 싶은 순간이 여러 차례 있었다. 그 중 하나가 아직도 전 남편 톰에게 헤어나오지 못하고 빠져 있는 그녀의 모습을 볼 때이다.
"약속할게." 진심이다. 기뻐서 정신을 차릴 수가 없다. 그가 날 걱정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질투까지 하고 있다는 걸 깨달았으니까. p. 320
결국 그녀가 정신을 차리고 사건도 해결되는 건 알코올의 의존에서 어느 정도 벗어난 후 서서히 예전의 왜곡된 기억이 올바르게 자리잡기 시작할 때이다. 그녀는 이토록 술에 의해 자신의 인생을 송두리째 좌지우지 당하는 인물이다.
메건 - 예전 남자와의 아이를 실수로 죽인 경험, 실직 상태, 결혼 생활의 공허함을 불륜으로 해결 중
레이첼, 메건, 애나, 이렇게 세 명의 인물들 중 가장 복잡하고 고민거리가 많아 보이는 여성이 바로 메건이다. 레이첼의 환상 속에서 제이슨과 행복한 결혼 생활을 하고 있던 여성인 제스말이다.
메건에게는 영원히 갈 상처로 남은 트라우마가 몇 가지 있다. 그 중 하나는 오빠의 죽음이고, 또 하나는 철 없던 시절 만난 남자와의 아기, 그리고 마약으로 인해 그 아기를 잃게 된 기억이다. 최근에는 화랑 일까지 그만두게되어 건너편 톰과 애나의 아기를 돌보는 보모로 일하다 그마저도 시큰둥해져서 그만두었다.
그녀에게 남편 스콧은 있으면 안심이 되는 존재이지만, 자신을 답답하고 공허하게 만드는 원인이기도 하다. 남편이 자신의 이메일을 검사한다는 걸 알면서도 딱히 기분 나빠하지 않는 그녀의 모습은 남편이 그녀의 인생에서 그렇게 중요한 존재가 아니라는 느낌을 주기에 충분하다. 아니면 그녀 자신의 프라이버시가 그렇게 중요하지 않다는 것, 더 나아가 그녀 자신의 존재 자체가 별로 중요하지 않다는 것. 가족을 잃음과 동시에 그녀는 영혼없이 육신만 살아남은 인간이 되어버린 것이다. 때로는 스콧이 빨리 집에 와서 자신을 안아주었으면 하고, 상담사에게 하는 얘기가 스콧에 대한 배신이 될까봐 주저하기도 하지만, 결국 스콧 역시도 그녀의 삶에 있어서 무의미한 존재일 뿐이다.
가끔은 그에게 소리를 지르고 싶어진다. "나 좀 놔 줘. 놔달라고. 숨을 못 쉬겠어." 이러니 잠을 잘 수가 없고, 화가 난다. 이미 그와 다투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지만, 물론 내 상상 속에서만 벌어지고 있는 일이다.
내 머릿속에서는 생각들이 계속 빙빙 돌고 있다.
질식할 것 같다.
p. 234-235
메건은 보모 일을 하면서 알게 된 톰과 만나 아무 생각없이 즐기기도 하고, 상담사 카말과 관계를 가지기도 한다. 그녀에게 없는 무언가를 채워 줄 대상을 끊임없이 찾고 있지만 채워지지 않고 있는 듯하다. 여러 남자들과의 불륜은 자신을 억압하는 스콧에게서 벗어나 누군가를 휘두르고 있다는 기분을 만끽하기 위해서이기도하다. 이렇게 메간이 갖고 사는 아픔과 고통은 레이첼의 그것보다는 훨씬 더 현실적으로 다가온다.
애나 - 불륜으로 만난 톰과 아이와 함께 나름 행복한 결혼 중이라고 생각, 그러나 레이첼이 자꾸 거슬림
셋 중에서 가장 뻔뻔한 인물이자 고통을 받아도 할 말 없는 여성이 다름아닌 애나이다.
그녀는 레이첼과 톰의 결혼 생활을 깨뜨린 - 뭐, 톰이야 어차피 이혼을 할 인물이지만서도. - 장본인이자, 그 후에 뻔뻔하게도 그들의 집에 들어가 살면서 이제는 톰의 부인으로서, 떳떳한 한 아이의 엄마인 듯이 살아가려한다.
그녀에게 위해요소는 단 하나. 자신의 행복한 결혼 생활과 아기에게 다가오는 레이첼의 그림자이다.
허나 그녀가 간과하고 있는 사실이 하나 있으니, 자신과 톰과의 결혼은 이미 누군가의 결혼을 파국으로 만든 결과물로서, 이러한 일이 다시 생길 가능성이 농후하다는 거고, 특히 톰은 바람기와 거짓말을 타고 났다는 것이다. 그녀가 걱정해야 할 건 레이첼이 아닌 남편, 톰이었다. 거짓말쟁이에 바람둥이, 거기에 폭력까지 휘두르는 삼 박자를 골고루 갖춘 최악의 남편.
애나는 자신이 어떤 상황에 처해 있는지 정확히 깨닫고 결국 레이첼을 도와 톰의 단죄를 돕는다. 남편의 전처와 협력한다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으나, 살인자와 함께 살 수는 없을 노릇일테니. 현실에서도 불륜녀의 최후가 이렇게 끝난다면 얼마나 좋을까...
소설은 끝나고 적어도 사건은 해결되어 홀가분한 마음으로 책장을 덮는다.
중독성이 대단해서 한 번 읽으면 결코 멈출 수가 없으니, 시간 많은 날에 읽으면 좋은 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