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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에 눈을 뜨면 바람이 부는 대로
사노 요코 지음, 권남희 옮김 / 북폴리오 / 2016년 10월
평점 :
품절
독일과 일본
이 에세이는 작가 사노 요코의 젊었을 적을 담고 있다. 그렇기에 어린이였던 나날들의 내용도 있고, 성인이 된 후의 날들도 그려져 있다.
그러나 대부분의 내용들은 그녀가 독일 베를린에서 유학하던 시절의 이야기로 이루어져 있다.
찢어지게 가난하던 시절 그녀에게 독일은 삶의 터전이었다.
가난과 그를 이겨내려는 억척스러운 생활 방식, 진짜 부모가 아닐 거라고 의심할 정도로 그녀에게 소리치고 일 시키고 때리던 부모,
이 모든 것이 하나가 되어 일본인치고는 상당히 활달하고 거침없는 표현을 만들어냈다.
'독일에서 오랬동안 생활하다보니 일본이 그리워.' 와 같은 말보다는
'독일에서는 이러이러한 점이 인상깊어. 난 이렇게 살았어. 그런데 어느 순간 일본에서의 어린 시절이 떠오르기도 해.'
와 같은 말이 훨씬 잘 어울릴 것이다.
독일과 일본을 이어주는 매개체는 주로 어떤 대상이었다. 그것은 사물일 수도 있으며 자연일 수도 있었다.
긴 여행에 지친 나는 공항에서 택시를 타고 가는 동안, 눈을 뜨지 못했다. 눈이 내리는 크리스마스이브였다. 거의 눈을 뜨지 못했으면서도 처음 보는 외국에서 맞은 눈 내리는 크리스마스이브를 한 장의 그림 같은 정경으로 기억하고 있다.
눈 덮인 길 양쪽으로 정원이 있는 집들이 나란히 자리하고, 집들 뒤에는 거뭇거뭇한 숲이 이어졌다. 어느 집 정원에나 눈이 소복하게 쌓인 전나무에 무수한 알전구가 반짝거렸다. 그 아름다운 그림 속을 달리는 택시 앞으로 커다랗고 하얀 여우가 몸만큼이나 훌륭한 꼬리를 끌며 순식간에 지나갔다.
한동안 살게 될지도 모를 도시의 아름다운 광경은 나를 몹시 불안하게 했다. 내가 보아온 일본의 풍경은 아름다워도, 초라해도, 내 속에 내렸다가 녹아버리는데, 처음 본 눈 내리는 크리스마스이브의 전경은 언제까지나 한 장의 그림으로 남았다.
p. 25-26
아름답고 화려하지만 동시에 낯설고 내 것이 아닌 겨울날의 풍경은 어릴 적 굶주린 어느날로 옮겨진다.
나는 눈 산에 엎드려 눈을 입에 넣었다. 눈은 먼지 냄새가 나고 차갑고 썼다.
그래도 눈 산이 설탕 산이 아니라는 사실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p. 34
지독하게 대비되는 눈 오는 날의 풍경을 저자는 아무렇지 않게 묘사하고 있다.
당시 상황이야 어쨌든지간에, 글로 전해지는 모습은 담담하고 전혀 아프지 않다.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나는 돌아가려고 멈춰 섰다. 그러다 잡목이 질서 정연하게 일직선으로 서 있는 것을 발견했다. 조금 걷다가 또 멈춰 서서 보니, 역시 일직선으로 나란히 서 있었다. 걷고 또 걸어도 나무는 병정처럼 같은 간격으로 있었다. 됐어, 그만 됐다고, 알겠어, 하고 소리를 지르고 싶을 정도였다.
p. 28
무엇 하나 흐트러지지 않고 완벽하게 서 있는 나무들을 보며 저자는 답답함을 느낀다.
이 부분에서 특히 이해되지 않았던 게, 일본도 독일 못지않게 질서가 잘 잡혀있는 나라이기 때문이다.
나는 이제껏 겨우 3번의 일본여행 - 도쿄, 오사카, 오키나와 - 을 가 보았지만, 단 한 번도 산만한 주변환경을 대한 적이 없다.
하지만 그저 제3자일뿐인 나는 발견하지 못한 그 속의 차이를 그녀는 뼈저리게 느끼고 멈추고 싶었던가.
그림
그녀는 동화책 작가이다.
자의든 타의든 그림 실력으로 칭찬받던 오빠의 죽음 이후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그림을 위해 떠난 유학길에서 만난 모든 풍경은 그녀에게 그림처럼 보인다.
실제로 '그림같았다.' 라고 서술하기도 하고, 그림처럼 묘사하기도 한다.
홍역으로 입원했을 때, 나는 갓 돌이 지났을 때여서 이 기억은 허위일지도 모른다. 나는 불이 켜진 병실에서 하얀 페인트를 칠한 창틀이 있는 창문 안쪽에 있었다. 창밖으로 병원 안뜰이 보이고, 안뜰은 납작한 돌바닥이 卍자 모양으로 이어졌다. 기모노를 입은 엄마와 교복을 입은 오빠가 손을 잡고 그 길을 오며 멀리서부터 내게 손을 흔들었다. 병원 안뜰은 어두운데 내게는 엄마의 기모노 색도 오빠의 회색 교복도 잘 보였다.
p. 53
1살밖에 안 된 시절의 기억이라는 건, 정말로 기억일까, 아니면 기억이 빚어낸 장난일뿐일까.
무엇이든간에 어머니와 오빠가 입은 옷하며 그들이 하는 행동까지 자세히도 그려내고 있다.
이따금 하숙집 할머리를 떠올린다. 내게 보이는 것은 붉은빛의 네모난 창이다. 그 네모난 창 안에 카바레 무희의 속옷 같은 플로어 스탠드의 붉은빛에 물든 채 혼자 점을 보는 할머니가 보인다.
그것도 한 장의 그림처럼 움직이지 않는다.
*
미스터 리는 고급스러운 프록코트를 입고 실크 스카프를 매고 모자를 썼다.
p. 134
그녀에게는 인물을 기억해낼 때 그들의 의복이나 신체적 특성을 하나의 정지된 장면으로 만드는 능력이 있다.
이는 마치 모든 장면이 멈췄을 때 한 폭의 그림이 되도록 만들었다는 영화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 를 보는 듯하다.
그저 손녀와 사이가 좋지 않은 하숙집 할머니, 허세스러운 한국인이 우리에게 어떤 '정서' 를 일으키는 존재가 되었다.
새하얀 와이셔츠 소매 사이로 금색 털이 삐져나온 성공한 젊은 사장은 내 얼굴을 보며 상냥하게, "당신의 아름다운 눈처럼 귀여운 그림을 그리고 싶어요"라고 했다. 나는 진땀을 빼며 촌스럽게 웃었다.
p. 37
금색 털, 새하얀 와이셔츠 각각의 심상들이 모여 '성공한 젊은 사장' 을 이룬다.
그는 말끔하게 차려 입었으며 자신의 신체에 자신감 넘치는 남자로서 이성에게 당당하게 말을 걸 줄 안다.
어린 시절
사노 요코의 어린 시절은 가난, 양부모같은 친부모와 못생긴 외모로 압축될 수 있다.
자신이 남과 얼마나 다른지에 대해 제대로 인지하지 못하고 했던 말이나 행동들이 남들에게 비웃음을 산 후
그녀는 '눈치' 라는 걸 배우게 된다.
어째서 다들 그렇게 웃었을까.
백설 공주는 눈처럼 하얀 피부에 장미처럼 빨간 입술이었다고 쓰여 있지 않은가. 아무리 내가 숯덩이 같은 피부에 아름다움과 거리가 멀어도 그렇지. 입술 정도 백설 공주 흉내 내는 게 그리 우스웠나.
시간이 한참 흐른 뒤, 또 한 번 새빨간 꽃잎을 입술에 붙이고 거울을 보았을 때, 그때 다들 왜 그렇게 웃었는지 깨닫고, 나도 웃었다.
아름다운 것은 아름다운 사람에게만 어울린다.
p. 14-15
무덤덤하고 모든 일에 초연할 것만 같은 그녀의 성격은 사실 그렇지 않다.
모든 것을 안으로 삭이는 지극히도 '일본인다운' 성격이 내재되어 있기에 겉으로 아무렇지 않아 보일 뿐이다.
남들과 똑같이 느끼고 아파할 수 있지만 한 번 더 생각해서 참는 그런 타입이다.
때려도 울지 않는 여자아이, 때리면 어때, 하고 그들은 생각했을 것이다. 울지 않으니 불쌍하지 않다. 약한 사람 괴롭힌 게 아니지 않은가.
지금도 나는 내가 불쌍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집단 괴롭힘을 당했다고도 생각하지 않는다.
p. 98
그녀는 주변에서 보기엔 '아침에 눈을 뜨면 바람이 부는 대로' 사는 아이였을지도 모른다.
실제로는 그보다 훨씬 멀리 있는 별을 보고 우주가 아름답다고 느끼며 사는 아이였음에도 불구하고.
사랑
자신을 낳아준 부모님에게 무시받을 정도의 외모를 지녔음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이성에 대한 호기심은 여느 청소년못지 않았다.
'사귄다' 에 대한 개념이 없었던 아주 어릴 적부터, 서서히 호르몬 분비가 왕성해지는 사춘기,
그리고 그 이후까지 우리가 겪는 사랑의 성장통을 똑같이 겪는다.
"나하고 교제해 줄래?"
나는 듣자마자 소리쳤다.
"으악, 싫어, 싫어!"
기요시가 놀라서 멍하니 있는 사이 버스를 타버렸다. 수습이 되지 않는 혼란 속에 자기혐오만이 나를 짓눌렀다.
나는 '교제'라는 말에 거부 반응을 일으켰다. '교제' 라는 단어는 내게는 불결하고 징그럽고 용서가 되지 않았다.
p. 49
나도 그녀와 비슷했던 것 같다.
남학생과 여학생이 사귄다는 생각 자체가 우습고 애들 장난처럼 여겨졌다.
그 생각은 대학생때까지 지속되었고, 어느 순간 내 사고의 유리가 깨지고 난 대학원생이 되어서야 누군가를 진정으로 사귀기 시작했다.
중학교 3학년이 되었을 때, 나는 그 창백하고 철봉도 못하는 문학 소년에게 열을 올렸다.
열을 올린다고 해봐야 혼자 일방적인 것이었지만, 어쩌다 교실 입구에서 마주치는 정도가 가슴 터질 것 같은 대사건이었다.
도서관 책을 하나하나 뒤져서 창백하고 촉 처진 눈의 남자아이 이름이 쓰인 대출 카드를 찾았다. 그리고 그 책을 빌리는 것이 나의 소중한 비밀이었다.
p. 101
나는 스치야와는 물론 찹쌀떡과도 얘기 한번 해보지 못하고 졸업했다.
p. 102
중학교 시절의 짝사랑, 첫사랑, 풋사랑은 누구나 경험하는 것일 거다.
그녀도 마찬가지였고, 때로는 하나의 이미지같은 사랑을 한 적도 있다.
아버지 친구의 아들인 미쓰노부는 피부가 하얗고 잘 생겼으며, 옷이 더러워질까봐 병정놀이를 하지 않았다.
그는 베를린 하숙집에서 알게 된 룸메의 옛 남자친구였으며, 몇 년 뒤 신문에서 나온 극단인들 중 한 명이었다.
사실상 어릴 적 이후로 한 번도 본 적 없는 남자가 그녀의 마음 속 한가운데 자리잡아 계속 떠다니고 있다.
그녀의 에세이는 앞이 없고 끝이 없다.
주제별로 목차가 정해져 있으며 시간과 공간이 자유자재로 움직인다.
물론 그동안 살아온 인생에 대한 토로로 짧은 끝맺음을 했지만, 나 역시 그녀처럼 어디서 끝내야 할 지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