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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스터 하이든
사샤 아랑고 지음, 김진아 옮김 / 북폴리오 / 2016년 6월
평점 :
평범한 삶을 원하는(?) 사이코
주인공 헨리는 사이코패스이다. 그가 가장 잘 하는 일은 다른 누군가로부터 칭찬과 평판을 빼앗아가는 것이다.
그는 내연녀와 생긴 아기를 동시에 죽일 계획을 세우고, 실제로 장인을 우연히 죽인 다음에도 전혀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는다.
헨리는 전혀 알지도 못하고 의도하지도 않은 상태에서 고도의 전문적 방법으로 완벽하게 폭군 살해에 성공한 셈이었다. 그래서 그는 양심의 가책도 느끼지 않았다.
즉, 헨리의 말은 모두 거짓이었다. 큰 사고가 나서 배가 뒤집혔다는 것도, 아버지가 대단한 야생동물 사냥꾼이었다는 것도, 얼음 같은 북해에서 모두 빠져 죽고 헨리 혼자 유일하게 구조됐다는 것도 모두 지어낸 말이었다. 사실 헨리의 아버지는 개 주인들에게 세금을 걷는 말단공무원이었고 헨리는 오줌싸개에 거짓말쟁이일 뿐 아니라 수틀리면 무슨 짓을 저지를지 모르는 사이코패스였다.
흔히들 사이코패스는 어떤 비극적 사건을 계기로 생긴다고하나 그에게 있어서 그 사건이란 '출생' 자체였고, 그는 타고난 사이코패스였다. 어릴 적 보육원에서 또래들에게는 공포의 대상이었고, 특히 파쉬를 괴롭혔다. 그는 마치 영화 '아이덴티티' 의 주인공 절름발이 남성이나 '양들의 침묵' 의 한니발을 떠올리게 한다.
내가 범죄학 전문 박사가 아니기에 사이코패스가 어떠어떠한 유형으로 나뉘어져 있으면 또한 그들이 어떤 성향을 가지고 있는지는 모른다. 헨리로부터 받는 인상은 그저 그가 '평범한 - 아이러니한 표현이긴 하지만 - 사이코패스' 는 아니라는 점이다. 이러한 모습은 '작가' 로서의 그의 면모에서 잘 드러난다.
원칙적으로 서평을 읽지 않는 마르타와 달리 헨리는 모든 평을 한 자 한 자 다 읽었다. 특히 마음에 드는 칭찬에는 자를 대고 줄을 그었고 기사를 오려서 스크랩북도 만들었다.
헨리는 이 순간을 사랑했다. 좋은 일을 하고 뿌듯한 기분에 젖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기분 좋으면서도 보람 있는 일이 또 어디 있겠는가. 그들은 그를 만나려고 먼 길을 왔을 것이다. 지구를 반 바퀴 돌아왔는지도 모를 일이다. 잠시 얼굴 한 번 보려고 말이다.
그러나 위의 두 예는 평범한 시민이 되길 원하는 모습이라기보다는 오히려 권력과 성취욕에서 나타난 자아상이라고 할 수도 있겠다. 아무리 하는 행동이 非사이코패스적이라 할 지라도, 그 의도가 다분히 사이코패스적이라면 그는 결국 평범한 인간이 아닌 셈이다.
여가시간에는 취미로 아마존에 서평을 올렸다. 혹시 오해할까봐 말해두자면 좋은 말만 썼다. 부정적 평가란 발가락의 때만큼이나 비생산적이라는 게 그의 생각이었다. 그래도 만약 나쁜 평을 올리게 되면 트라비스 포르스터의 이름을 사용했다. 이왕 만든 필명이니 쓸 데가 있어야 할 것 아닌가. 물론 마음이 편하지는 않았다.
그런데 과연 위의 상황에서도 그가 어떤 나쁜 의도를 가지고 서평을 한다고 볼 수 있을까? 물론 자기 만족으로 '작가' 로서의 역할을 다 하고자 평을 올릴 수도 있지만, 나쁜 평을 올릴 때 마음이 편치 않는다는 건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헨리도 가끔은 그렇게 평범한 삶을 살고 싶었다. 그래서 퇴근시간이 얼마나 달콤한지도 느끼고 깨끗한 양심으로 살아보고 싶었다.
헨리에게도 어느 정도 '인간적인' 구석이 남아있음을 확인하고 놀랐던 구절이다. '깨끗한 양심' 이라는 표현으로 그동안의 양심은 '깨끗하지 않았다' 는 걸 암시할 뿐더러, 자신의 삶이 정상인의 범주에서 벗어나 있다는 걸 안다는 표시일 지도 모르겠다.
그에게 있어서 소중한 건 돈, 권력, 여자, 그리고 진실한 한 명의 친구인 듯 하다. 자신의 모든 것 - 물론 헨리의 경우엔 아주 모든 것이 아니지만 - 을 내보이고 편안해지게 만드는 그런 친구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헨리는 벨트를 풀어 오브라딘의 몸통에 묶고는 배 밖으로 끌어내기 시작했다. 아마도 사람이 어쩌다 선해지는 그런 순간이었으리라. 헨리 자신의 생각도 그랬다. 잠시 선해졌을 뿐 그는 여전히 악인이었고 결국 죗값을 치르게 돼 있었다.
생선가게를 하는 친구 오브라딘을 위해 금전적으로 도움을 주고 싶지만 그가 마음 상해할 까봐 그의 아내를 통해 몰래 조금씩 도와주는 배려심까지 갖고 있는게 바로 헨리다. 사이코패스치고는 참으로 모순되는 모습이 아닐 수 없다.
아내를 신처럼 숭배하는 헨리
사이코패스 헨리에게 있어서 아내 마르타는 신과 같다.
그에게 경제적으로 모든 것을 해 주는 신일 뿐만 아니라, 일어나는 모든 일을 알면서도 감싸주는 그런 신 말이다.
사실 헨리의 마음 속에서 '사랑' 이란 감정이 싹 튼 것도 마르타의 글 때문이었다.
그는 원고 한 장 한 장을 소중히 챙겨두었다. 그녀는 원고가 어디로 갔는지 묻는 법이 없었다. 그렇게 그들 사이에는 조용히 그리고 자연스럽게 사랑이 싹텄다. 두 사람은 함께여서 좋았고 그런 삶은 그들 모두에게 도움이 됐다. 헨리는 이보다 더 만족스러울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마르타는 성녀와 같은 모습을 한 여성이다. 말이 많지 않으며, 가만히 있어도 주위에 돌아가는 상황을 꿰뚫고 있으며, 특히 헨리에 대해서는 귀신처럼 알고 있다. 그가 누군가를 죽이는 걸 꺼리지 않는 사이코패스라는 걸 알면서도 함께 살며 평화를 유지하길 원한다.
마르타는 그에게 입을 맞추었다.
"여자 문제면 그냥 얘기 하지마. 어서 가서 담비나 좀 잡아줘."
(중략)
그녀는 이미 모든 걸 알고 있었고 화난 것 같지도 않았다. 헨리는 그녀가 자신의 약점을 감싸줄 때면 특별히 더 위대해 보였다. 그래서 다른 여자에게 갈 때면 배려하는 마음을 갖고 조신하게 행동했다. 그는 자신의 행동이 부끄러웠고 변해야겠다는 다짐을 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가 바람을 피우고 돌아올 때면 마르타는 으레 그의 죄의식을 투영하는 색깔을 알아채곤 했다.
선천적 공감각의 소유자인 마르타는 모든 사물과 생물에게서 색깔을 볼 수 있다. 이런 그녀의 능력이 헨리로 하여금 그녀를 존경하게 만든 것일지도 모른다. 그녀의 글쓰기 능력, 그 글을 남편의 이름으로 그가 모든 걸 누리도록 허하는 관대함, 그의 바깥생활에 대해 관여하지 않는 자유로움, 하지만 모든 것의 본질을 알고 있는 면. 헨리에게는 자신보다 위의 존재라고 느끼게 할 만한 모든 것을 갖춘 여자이다.
"헨리, 꼭 새로 시작해야 할까? 지금처럼 사는 게 좋지 않아?"
베스트셀러 작가라는 타이틀로 할 수 있는 방탕한 생활은 모두 하는 헨리와의 결혼 생활을 그녀는 싫어하는 거 같지 않다. 오히려 이런 면이 헨리로 하여금 '변해야겠다.' 고 다짐하도록 만든 계기가 되었을 지도 모른다.
"헨리, 사랑하는 내 남편, 이로써 당신과 당신의 소설을 구합니다. 당신을 빈손으로 돌아서게 하는 일은 예전에도 할 수 없었고 지금도 할 수 없기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오늘 무슨 일이 일어날지 나는 모릅니다. 하지만 당신을 처음 만났을 때 당신에게서 뿜어져 나오던 밝은 빛은 검디검었습니다. 당신이 걱정됩니다."
여기서 우리는 잠시 멈출 필요가 있다. 헨리가 우느라 아내의 쪽지를 계속 읽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자신을 희생해서까지 남편 헨리를 구한 아내. 헨리는 이 시점에서 처음으로 진심을 다한 눈물을 흘렸을 수도 있다. 엄마를 찾는 아이처럼 엉엉 울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가 아내의 죽음을 사고사로 위장하기위해 천연덕스럽게 모든 시나리오를 꾸민 걸 보면, 울음은 단지 상실감의 다른 표현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이제 더 이상 작가로서의 영위로운 삶을 누릴 수 없다는 상실감. 자신의 모든 걸 알면서도 다 받아 준 크나큰 존재를 잃은 상실감.
여성을 향한 본능만이 살아 있는...
그렇다면 헨리의 여러가지 모습들 중에서 가장 '일반 남자다운' 모습은 뭐라고 말 할 수 있을까?
나는 콕 찝어서 '여성을 향한 본능' 이라고 말하고 싶다.
그에게는 경외심마저 불러일으키는 아내 마르타가 있다. 동시에 내연녀 베티가 있는데, 그는 베티를 사랑하지는 않고 그저 그녀의 몸을 탐할 뿐이다. 그녀와 자신 사이에 생긴 아기와 어떻게 살까 하는 생각을 하다가도 이내 없애버리려고 마음 먹는다. 또한 출판사장인 모리아니가 베티를 좋아하는 걸 알게 된 후로는, 그 둘을 적극 이어주려 한다.
베티는 이마로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쓸어 넘겼다. 화가 나고 절망한 모습의 그녀는 무척 매력적이었다. 헨리는 '난 왜 베티가 가려고 할 때만 그녀를 갖고 싶은 걸까?'라고 생각했다.
결국 베티는 자신의 욕망을 채우려는 대상일 뿐이고, 그 대상은 작가로서의 지위와 돈을 이용한 불특정 여성들에게까지 이어진다. 그는 세계 여러나라를 여행하고 곳곳에서 만난 여성들과 즐기곤 한다.
아내를 잃은 슬픔과 부재감에 울다가도 눈 앞에 나타난 아름다운 여성에게 금방 혹하고마는 그를 정말 '가장 동물적이며 본능적인 남성'으로 칭할 수 있겠다. 심지어 아내 잃은 헨리를 위로하기 위해 온 소냐를 보고도 반하여 그녀와 관계를 맺게 된다.
그런 그에게도 무조건적인 사랑을 나눌 만한 대상이 있긴 한 걸까? 사람이라면 "아니다" 라고 대답하겠지만 동물을 포함한 생물의 범주에서라면 "그렇다" 라고 답 할 수도 있다.
헨리가 대문 안으로 들어서자 검정색 호바바르트 한 마리가 공중으로 뛰어오르며 반가워 어쩔 줄 몰라 했다. 때 묻지 않은 순수함으로 주인을 반기는 폰초의 모습에 헨리는 매번 감동을 받았다.
그에게 있어서 무조건적인 사랑을 나눌 수 있는 존재는 그가 어떤 모습을 하고 나타나도 환영할 수 있는 개 폰초뿐인 듯 하다. 아이러니한 건 호바바르트 종이 강도를 추격하는 데 특화되어있다는 것인데, 동시에 성격이 일관되어서 한 주인을 따른다는 것이다.
아침 드라마에서 살인 스릴러물로
이 소설의 첫 장면은 절벽에서 시작한다.
내연남녀의 대화와 그 속에서 느껴지는 갈등.
아기가 생겼는데도 별로 달가워하지 않는 듯한 유부남 헨리와 그의 반응에 신경쓰는 베티.
이런 상황은 쉽게 상상되고 아침드라마의 지겨운 불륜 스토리를 생각하게 된다.
하지만 장인을 죽이고도 아무렇지 않아하는 주인공을 보면서 서서히 스릴이 느껴지기 시작한다.
그가 아내의 원고를 도용해 자신의 것으로 만드는 건 그렇다 치더라도 그의 어린 시절부터 나타난 행동 양상을 보면 소름이 끼친다.
그 이후로 기스베르트는 적을 경계하는 차원에서 헨리와 마주치는 일이 없도록 조심했다. 대신 헨리의 과거를 찾아내 조각조각 맞춰나가기 시작했다. 그것으로 그는 인생의 과제를 얻은 셈이었고 그의 삶은 충만해졌다. 담배도 끊었고, 까짓 거 전혀 어렵지 않았다, 불면증도 없어졌다. 살찌는 부작용이 있던 우울증 약도 끊었다. 심지어 원형탈모도 나아졌다. 인생의 적을 만난 사람에게는 의사가 필요 없는 법이라고 하지 않던가.
헨리에게 보육원에서 심한 괴롭힘을 당했던 기스베르트는 어느 날 그 악마가 불의의 사고로 아내가 사망한 유명 베스트셀러 작가라는 걸 알고 천천히, 그리고 아주 꼼꼼히 그에 대해 조사하게 된다. 그가 헨리와 추격전을 벌이는 장면을 스크린에서 본다면 제대로 긴장감이 느껴질 것이다. 자동차 사고 직후 헨리가 그를 구하는 장면과 병원에서의 재회까지 더해진다면 기가 막힌 플롯이 하나 생긴다.
미스터 하이든은 어쩌면 읽기 껄끄러울 수도 있는 블랙 코미디이다.
그저 살인마일 뿐인 한 남자의 복잡한 성격을 들여다봐야 하는 고통을 감수해야하기도 한다.
그러나 한 가지 확실히 말 할 수 있는 건, 요즘처럼 더운 여름 열대야를 이겨낼 방법이기도 하다는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