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서진 대지] 3부작의 첫번째 [다섯 번째 계절] 은 이미 서평을 쓴 바 있고, 후속작 [오벨리스크의 문] 이 나와서 읽게 되었다.
매년 최우수 과학 소설과 환상 소설에 수여된다는 휴고상 중 3년 연속 최우수 장편상을 수상한 시리즈 소설이다.
나에겐 SF소설이라기보다는 판타지소설이라고 느껴지는데,
그렇다고 하기엔 마법보다는 암울한 이야기가 많이 나와서 디스토피아 미래 소설이라고 하는 게 더 맞을 지도 모르겠다.
전편이 오로진인 주인공 여성 에쑨을 중심으로 흘러갔다면,
후속작인 이번 소설은 에쑨의 딸이자 그녀가 그토록 찾으려고 하는 나쑨을 중심으로 흘러간다고 볼 수 있다.
물론 중간 중간 다른 인물들의 이야기가 계속하여 나오긴 하지만, 그렇다하더라도 독자인 나의 관심이 나쑨에게 쏠리는 건 어쩔 수가 없다.
아마도 작가가 의도한 바가 아니겠는가 하는 생각이 든다.
나쑨 역시 어머니인 에쑨과 마찬가지로 오로진이다.
오로진 자신조차 제어할 수 없을 정도로 거대한 힘을 지녀서 주변인들이 무서워하거나 경멸하거나 처단하려고 하는 존재.
이미 아버지는 아들을 죽였다.
그에 반해, 나쑨은 운이 좋은 건지 나쁜 건지 여전히 살아 있고, 아버지와 함께 - 혹은 납치당하여 - 길을 떠난다.
그리고 만나게 된 수호자.
수호자는 오로진을 보호하는 운명을 타고 났다.
그 때문에 몸이 아프기도 하고 괴롭기도 하지만 운명을 거역할 수는 없다.
수호자는 오로진을 보호하기도 하지만, 오로진이 힘을 제. 대. 로. 사용할 수 있도록 돕기도 한다.
오로진으로 인하여 세상이 파괴되지 않도록.
소설에서 드러나는 오로진과 수호자의 관계는 묘하다.
부모와 자식같기도 하고 마스터와 제자 같기도 하다.
오로진이 수호자를 죽이기도 하고, 어쩌면 그 반대이기도 하다.
엄마는 가끔 나쑨에게 사랑한다고 말했지만 나쑨은 한 번도 그 증거를 본 적이 없다.
(중 략)
아빠는 하루 일과가 끝난 뒤에도 나쑨과 놀아 주는 걸 귀찮아 한 적이 한 번도 없다.
이런 소설에서도 부모와 자식과의 관계는 나타나기 마련인가보다.
자신과 같은 오로진인 딸을 아버지를 포함한 주변 사람들로부터 보호하기위해 어릴 적부터 혹독하게 훈련시켜 온 에쑨.
그런 어머니를 나쑨이 달가워 할 리 만무하다.
나쑨의 힘이 조금이라도 발휘되려고 할 때마다 억제시키고 아버지에게 거짓말을 시켰던 엄마 아닌가.
반면 나쑨의 아버지는 누가 봐도 딸에게 사랑을 듬뿍 주는 좋은 부모의 표상이다.
나쑨과 놀아주고 심지어 딸이 잘못된 행동을 하거나 거짓말을 해도 혼내지 않고 안타까워하며 타이른다.
그랬던 아버지가 달라졌다.
나쑨이 오로진이라는 걸 안 순간부터.
어쩌면 죽이려고 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딸에 대한 크나큰 사랑은 딸을 죽이기보다는 교정시키려는 결정으로 바뀌었다.
오로진이 아닌 비오로진으로 거듭 태어나게 만드는 일.
아들도 죽고 아내도 떠난 상황에서 아버지에겐 그것만이 유일하게 남은 희망이다.
"아니면 1만 년, 2만 년은 어떨까? 자기 이름도 제대로 기억하지 못하게 된다고 상상해 봐. 그래서 우리가 아무리 스톤이터들에게 정체가 뭐냐고 물어도 대답을 못 하는 거다."
[걸리버여행기] 의 영원히 죽지 않는 인간 스트랄드브라그가 생각나는 대목이다.
스톤이터는 단순히 몸이 돌이라서 이질감이 느껴지는 게 아니다.
그들은 한 때 평범한 인간이었다.
그러나 주변인들이 모두 죽고 나서도, 또 세월이 흐르고 환경이 변하고 다섯번째 계절이 와도 여전히 살아있는 존재가 되었다.
그렇게 죽지 못하고 계속 사는 건 과연 어떤 기분일까?
나는 진시황제의 불로장생의 약을 먹고 싶지 않고, 영원의 샘도 찾고 싶지 않으며, 스톤이터가 되고 싶지도 않다.
아무리 강력한 힘을 지닌들 나 홀로 살아남는 건 그다지 재미있지도, 의미있지도 않다.
그 때가 되면 내가 어떤 존재일지 모르게 될 것이다.
소설에서 사용된 어휘 중 생소한 것들이 많다.
분명 전편에서도 나온 어휘들인데 여전히 어색하다.
판타지 문학의 세계는 어렵다.
번역가는 쉬운 직업이 아니라는 생각도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