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니가 돌아왔다
C. J. 튜더 지음, 이은선 옮김 / 다산책방 / 201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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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의 시신 위쪽 벽에 대문자로 휘갈겨 썼다. '내 아들이 아니야.'

p. 15


동생은 돌아왔다. 애비-아이스를 으스러져라 끌어안고 엄청 큰 담요를 두르고 다리를 흔들며 경찰서에 앉아 있었다. 그리고 나를 보며 미소를 지었다. 그때 나는 알았다. 그때 나는 뭐가 이상한지 알았다. 뭐가 끔찍하고 무시무시하게 이상한지. 

p. 341


어린아이들의 숨통을 조르고. 갈기갈기 찢겨서 썩게 하라. 또다시 시작되고 있다. 문자를 보낸 사람이 이메일을 보낸 사람일 것이다.

p. 189


이 소설은 공포소설이다.

물론, 텍스트로 접할 때는 영상으로 접할 때와는 달리 무섭지 않을 수도 있다.

내가 그랬다.

보통 몰입이 잘 되고 소설 속 분위기를 온 몸으로 느끼는 편인데, 지하철에서 2시간만에 다 읽어서 그런지 - 그만큼 잘 읽힌다. - 

주위에 사람들이 많아서 그런지, 소설을 읽는 내내 전혀 무서운 건 없더라.

아마도 영화화된다면 이야기가 달라지겠지.

공포소설이자 스릴러소설이다.

소설의 시작은 경찰들이 아들을 살해하고 자신의 목숨을 끊은 어머니의 시신이 있는 비극적인 집 안이다.

그리고 우리가 기대했듯이 붉은색으로 적힌 메세지가 남겨져 있다.

현재의 으스스한 사건은 과거의 사건과 데자뷰되어 같은 선상에 있다는 걸 알게 된다.

다름아닌 주인공의 여동생인 애니의 실종 및 되돌아온 사건이다.

분명히 죽은 줄 알았던 애니는 자신이 아끼는 인형을 꼭 안고 멀쩡하게(?) 돌아왔다.

여기서부터 우리는 흔한 추정을 할 수 있다.

'뭔가가 씌었구나.'

주인공은 의문의 이메일과 문자를 받고 협박도 받고 물리적인 폭력도 당하며 주변인들로부터 당장 그의 고향에서 떠나라는 이야기를 듣는다.

하지만 그는 뭔가가 다시 일어나고 있다는 확신 하에 과거의 일을 정리하고 현재의 일을 파헤치고자 돌아왔다.

여기서부터 이 소설은 추리라는 장르로 넘어간다.

그래서 그리 무섭지 않았나보다.

주인공과 그를 둘러싼 안힐의 마을사람들.

늘 그를 보고 미소짓고 말을 걸어주는 동료 교사, 정상적인 사회생활이 힘들어보이는 바텐더, 의문사한 학생과 그의 어머니, 옛날이고 지금이고 여전히 그를 괴롭히는 지역의원까지.

여러 인물들은 각자 무언가를 숨기는 듯 하고, 뻔뻔한 태도로 아무렇지 않은 듯 거짓말 하면서 태연하게 나아가는 주인공은 이들의 비밀을 파헤친다.

그래서 무섭지 않다.

오히려 과연 어떻게 된 일일까 궁금하고 흥미롭기까지하다.

애니가 돌아왔다기 보다는, 주인공이 모든 일을 바로잡기위해 돌아왔다고 하는 게 더 맞을 것이다.


다시 한 번 강조하지만 살다 보면 선택의 여지가 없을 때도 있다.

p. 17


나를 잽싸게 평가하는 시선이 느껴진다. (중  략) 사람들은 나더러 인상이 정직해 보인다고 한다. 그걸 보면 사람들이 모르는 게 얼마나 많은지 알 수 있다.

p. 24


나는 귀신을 믿지 않는다. 우리 할머니는 입버릇처럼 얘기했다. '네가 무서워해야 하는 쪽은 죽은 사람들이 아니야. 살아 있는 사람들이지.'

p. 33


사람들이 말하길 시간은 치유의 힘이 엄청나다고 한다. 이 말은 틀렸다. 시간은 지우는 힘이 엄청날 따름이다.

p. 68


중간 중간 아무렇지 않은 듯 주인공이 하는 생각은 의외로 삶의 진리인 경우가 많다.

사람들이 말하길~ 이라는 말을 싫어하는 나와 생각이 통하는 때가 있다.

그 중 나의 외모만을 보고 엄청 착하고 순할 거라고 여기는 사람들.

아아.

아닌데.

ㅎ.ㅎ

ㅋ.ㅋ

그래서 더욱 강해지고 세지려고(?) 노력했을까.

나를 너무 만만하게 보는 사람들이 많아서, 당하면서 살기 싫어서, 웃지 않는 쪽을 택했다.

무뚝뚝하고 기분 나쁜 표정을 짓고 다니게 되었다.

그런데도 길거리 여러 사람들 중에서 굳이 내게 와서 길을 물어보고, 내게 지하철 노선을 물어보고, 내게 도를 믿으라고 하는 걸 보면 

아직 내공이 부족한가 보다.


공포소설을 읽거나 공포 영화를 보고 악몽을 꾼 적은 단 한 번도 없다.

설사 그것들이 실화를 바탕으로 했더라도 말이다.

실화이든 허구이든 어쨌든 감독이나 작가가 만들어서 쓰고 제작한 작품일 뿐이라고 생각한다.

이렇게 나름 논리적으로 생각하다보면 무서울 게 없다.

오히려 나에게 금전적으로나 물리적으로 직접적인 위해를 가할 수 있는 인간이 훨씬 무섭다.

Time heals all wounds.

이 말은 상처의 경중과 깊이에 달려있다고 본다.

100일 정도 사귀던 연인과 헤어졌다고 치자.

당장은 이별 노래를 들으며 눈물 뚝뚝 흘리는 밤으로 지새우겠지만, 1년이 지난 후의 나는 그/그녀를 완전히 잊고 쌩쌩하게 지내고 있다.

하지만 아주 가까운 이를 잃는 경험이라면?

아직 그런 적이 없어서 잘 모르겠지만, 그렇게 쉽게 잊혀질 것 같지 않다.

가슴으로 묻고 힘들게 살아갈 지언정, 상처가 모두 지워질 것 같진 않다.



희생양으로 태어나는 아이들이 있다면 그 나머지는 깡패로 태어나는 걸까? (중   략) 그들은 그냥 다르게 설계되어 있다. 유전자가 그렇다. 

p. 114

이 소설의 주인공은 교사이다.

따라서 여러 부류의 아이들이 지내는 학교가 배경으로 보여진다.

늘 당하는 아이가 있는가하면 그런 아이들을 괴롭히는 걸 낙으로 삼는 불량배들이 있다.

방관하는 아이도 있고, 인기있는 아이도 있는데 이는 어른들의 사회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주인공은 나약했던 어린 시절을 떠나보내고 지금은 어떤 상황에서도 아무런 말을 하여 모면할 수 있는 재주를 지니고 산다.

그의 주변에는 밝게 말을 걸어오는 교사가 있는가 하면, 어떻게든 상대방의 약점을 알아내어 자신의 승진 기회로 삼고자 하는 교사도 있다.

인생은 그런 것이다.

후천적인 영향도 있겠지만, 그 부모의 그 자식이란 말이 있듯이 유전자는 언제나 너무나도 큰 힘을 발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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