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틸다의 비밀 편지
스텐 나돌니 지음, 이지윤 옮김 / 북폴리오 / 2018년 10월
평점 :
절판



내가 바서부르크 상공을 날고 있을 때는 이미 어두워진 뒤였어. 사실 발아래 펼쳐진 것은 도시가 아니라 달빛에 일렁이는 강물이었단다.
다른 도시들과 마찬가지로 공습의 위협을 피해 등화관제 중이었기 때문에 깜깜해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어.
p. 202
 

스텐나돌니의 이 소설을 해리포터와 같은 판타지 장르로 예상한다면 큰 일이다.
갖가지 마술과 마법으로 매우 흥미진진한 소설이 아니라,
할아버지가 손녀 마틸다에게 마법과 더불어 삶의 지혜를 전달하는 잔잔한 편지이다.

이 편지 소설 안에는 마법사 파흐로크의 유년시절부터 병원에 누운 바로 오늘까지 삶의 일대기가 담겨 있다.
읽다 보면 느끼게 되는 건, 자서전을 편지글 형식만 빌려 썼다는 것이다.
누구도 읽지 않는 자서전은 자기 만족일 뿐이라, 대신 마법사 파흐로크는 마틸다에게 전하는 편지를 쓴다.
그래서 양식은 편지이지만 내용은 자서전 그 자체이다.

어릴 적 마법에 대한 재능을 발견한 이야기, 학창 시절 선생님과의 추억, 결혼 후 가족과의 생활,
그리고 전반적인 배경에 독일의 시대적 상황이 깔려있다.
아!
저자 스텐 나돌니가 독일 출신이라는 걸 잊고 있었다.
학부 시절 배운 독일문학은 언제나 나를 시험에 들게 했다.
괴테, 귄터 그라스, 토마스 만의 소설을 읽다보면 도통 갈피를 잡지 못해서 다시 앞 장을 들여다봐야했다.
특히 세계대전을 겪은 독일 작가의 문학은 배로 어려웠다.
전범국가의 국민이라는 죄의식이 깊게 밴 독일 소설은 읽은 재미를 준다기보다는 철학적 사유를 요하는 무언가였다.

스텐나돌니는 그 정도까진 아니지만 여전히 독일의 전쟁 중, 그리고 전후 상황을 소설 속에서 묘사한다.
전쟁터에서 사용하는 마법은 단순히 능력을 과시한다거나 연습을 하기 위함이 아니라 생존을 위한 마법이었다.
어느새 파흐로크에게 마법은 살기위한 불가피한 수단이 되어 있었다.

 

 

사람들은 젊을수록 아름답다고 말하지. 하지만 그것도 청춘의 얼굴에 암담한 그늘이 드리우기 전의 얘기란다.
고집, 분노, 오만, 집착 혹은 여타 정신질환이 시작되면 얼굴이 망가지는데도 우리는 그런 것을 보지 못하고 쉽게 단정해 버리지.
반대로 젊은 시절 크게 눈에 띄지 않던 얼굴이 나이가 들면서 아름답게 빛나는 경우도 있단다. 거기에는 다른 힘이 작용하지.
그것은 진실한 마음과 유머, 그리고 좋은 심성의 힘이야.
p. 44
 

팔 늘이기, 돈 만들기, 벽 통과하기와 같은 마법은 해리포터에서 볼 법한 판타지이다.
하지만 파흐로크가 말하고자하는 건 그저 기술적 의미의 마술이 아니다.
그는 마법을 전달하는 척 하면서 사실은 100년이 넘는 세월동안 경험하고 깨닫게 된 삶의 지혜를 말하고자 한다.
그런 점에서 [마틸다의 비밀 편지] 는 소설이라기보다는 에세이나 자기 계발서에 가깝다.
마틸다에게 "이러이러하게 해라~" 라는 충고나 조언의 어조가 계속하여 등장하기때문에
읽다보면 소설을 가장한 인문학을 접하는 기분이 든다.

가령 필요에 따라 순식간에 몸무게를 줄인다거나 아예 완벽한 외모의 다른 사람으로 변신할 수 있다.
이를 '아름답게 그리고 다르게 보이기' 마법이라 부른다.
그러나 파흐로크는 마치 요리 레시피처럼 중간 중간 아름답게 보일 수 있는 마법 실행에 관한 간략한 설명을 적어놓다가도
실제로 하고 싶었던 말을 쏟아낸다.
마술보다 더 중요한 건 그 사람의 마음가짐이라는 거다.
 어쩌면 그는 마틸다에게 보이는 위대한 마법사의 기질에 감탄하면서도,
 동시에 그녀가 지혜로운 인간이 되길 바라는 것일지도 모른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판타지 소설을 기대했다면 크게 실망할 수 있다.
사실상 마술을 펼치지 못하는 한낱 인간으로서 어떻게 사는 게 좋을지 부드럽게 조언해주는 자기계발서와 같다.

 

 

우리는 일주일에 서너 번 극장에 갔단다. 우리는 말하지 않아도 상대가 극장에 가고 싶어 하는지, 혹은 어떤 영화를 보고 싶어 하는지
정확하게 알았지.
p. 102-103
 

물론 사랑 이야기도 빠지지 않는다.
파흐로크를 첫 눈에 반하게 한 귀족 출신의 여성인 엠마는 알고 보니 그와 같은 마법사였다.
둘은 모든 것을 함께하며 급기야 결혼을 하기에 이른다.
파흐로크가 감옥에 갇히게 된 나날 동안에는 엠마 혼자 고분분투하며 가계를 이어나간다.

드라이한 어투의 편지 소설을 읽다가 엠마와 함께 하는 두근두근한 데이트 장면에서는 눈이 커졌다.
한 번이라도 사랑을 해보고 연인을 가져본 적이 있는 사람이라면 공감할 만한 내용들이기 때문이다.
특히 둘이 영화를 보는 장면이 그렇다.
파흐로크와 엠마처럼 나 역시 일주일에 한두번은 최신 영화 개봉일에 맞춰 영화관에 간다.
서로의 영화 취향을 정확히 알고 있어서 어떤 영화를 골라야 할 지 굳이 고민할 필요도 없다.

영화라는 소재는 [마틸다의 비밀 편지] 여기저기서 등장한다.
저자 스텐 나돌니는 이 소설이 영화화되기를 원했을까?
소설의 첫 장에서부터 이 편지가 영화화되길 원한다는 말을 하고,
화자인 파흐로크는 영화 세트장에서 소품 담당 등의 직업을 가진 바 있다.
만약 작가가 살아있는 동안 [마틸다의 비밀 편지]가 영화화된다면 그가 소설 속에 직접적으로 제시한 소원이 이루어지는 거겠지?

 


소설은 할아버지가 손녀를 바라보는 것으로 시작하고, 마지막 장면은 이 둘의 현재 대화이다.
저자는 자신을 할아버지로 독자를 손녀 마틸다로 상정한 채, 책을 읽는 이들에게 자상한 충고를 하고 있다.
이 책을 다 읽은 내가 작가가 원한 것 만큼 그의 뜻을 받아들였는지 아닌지는 앞으로 나의 삶을 어떤 태도로 사느냐에 달려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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