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북이는 언제나 거기에 있어
존 그린 지음, 노진선 옮김 / 북폴리오 / 2018년 6월
평점 :
절판


가끔씩 왜 데이지가 날 좋아하는지, 적어도 왜 날 참아 주는지 의아했다. 데이지 말고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다. 나조차도 내가 짜증 나기 때문이다.

p. 15



"넌 네 머릿속에만 갇혀 있다고. 오로지 자기 자신만 생각하지."

p. 155



너는 어릴 때부터 많은 걸 누려 왔지만, 네가 얼마나 편하게 사는지조차 몰라. 왜냐하면 다른 사람의 삶은 안중에도 없으니까."

p. 237




이 소설은 주인공인 - 그러나 정작 자신은 인생의 주인공이 아니라 캔버스이자 조연이고 누군가의 무엇이라고 생각한다. - 에이자는 불안증이라는 정신질환을 가진 고등학생이다.
그녀는 정기적으로 의사와 상담을 나눠야하고 약을 복용해야하며 수시로 갖가지 생각에 '사로잡혀'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

에이자는 고등학생 때 잠시 친하게 지냈던 나의 친구를 떠올리게 한다.
겉으로 보기엔 아무 문제 없어 보였는데, 주5일제를 시행하기 전 어느 토요일 방과 후 함께 그 애가 다니는 병원에 따라갔는데,
'정신과 의원' 이라고 적혀있던 글씨에 충격을 받았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당시는 정신과를 다닌다는 것 자체가 커다란 흠이 되어 쉬쉬하던 상황이었기에 내게 조용히 알려주는 친구가 대단하다고 느껴졌다.
물론 그 이후에도 우리의 우정은 학년이 끝나기 전까지 변함없이 유지되었다.
시간은 흘러 대학생이 되고 나서 친하게 지내던 다른 학과 친구가 있다.
매우 친해서 공강 시간이면 언제나 만나 문과대학 뒤편에 있는 나무 아래 벤치에 누워 하늘을 바라보며 시간을 때우곤 했다.
절친이었던 그 아이는 4학년이 되고 연락이 뜸해지기 시작했다.
가끔 카톡을 하다가 답이 없어서 나 역시도 연락을 끊게 되었다.
6개월이 지난 후 다시 연락한 친구는 자기가 정신에 문제가 있어서 병원을 다니고 있다며 이야기를 했다.
그래서 사람들 많은데는 가기 힘들고, 예전처럼 일주일에 서너번씩 같이 만나 놀 수도 없다고 했다.
(지금 생각해보건데, 공황 증세 비스무리한 게 아니었을까?)
가끔씩 만나 이야기하는 걸로 충분하다며.
나는 친구의 상황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그 애가 편한 대로 했다.
친구가 먼저 연락해서야 만났고, 행여나 부담을 줄까봐 먼저 약속을 잡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 친구는 어느 날 아무 일도 없고 화낼 일도 없는 상태에서 내게 극심한 히스테리를 부렸고,
나는 더 이상 견딜 수 없어서 그 이후 지금까지 헤어진 상태이다.

에이자의 정신 상태를 받아주고 감당하려 애쓰는 건 그녀의 어머니와 친구인 마이클, 그리고 데이지 뿐이다.
데이지는 데이비스의 아버지이자 현상수배가 걸린 범죄자를 찾겠다며 신상을 숨긴 채 기자에게서 정보를 캐내고,
직접 데이비스의 집에 가서 CCTV 자료들을 폰으로 받는 걸 주도하는 대담한 아이이다.
아마도 이런 '후리한'(?) 성격이 에이자의 까탈스러움을 견뎌낼 수 있었던 비결일 수 있다.
그러나 누구에게나 한계는 있다.
아무리 정신이 아픈 친구라고는 해도, 매번 힘들게 하는 사람을 친구로 두기란 결코 쉽지 않다.
그래서 데이지가 참다못해 에이자에게 쌓인 울분을 분출하는 장면이 두어번 나오는데, 독자인 나로서는 격하게 공감하는 바이다.
사랑과 우정으로 받아주고 참기에는 너무한 친구가 있다.





"내가 너한테 잘 보이려고 노력하는 게 빤히 보이겠다."

p. 114



"너무 좋아서 꿈만 같다는 생각."

"뭐가 너무 좋다는 거야?"

"너."

p. 121



나 - 그럼 뭐에 관심 있는데?

데이비스 - 너.

p. 179




이렇게 직진하는 연애 타입의 남자아이가 너무나 좋다.
얼마 전 후배가 내게 계산하면서 다가오는 찌질한 남자에 대해 상담을 구한 적이 있다.
으으...
남자고 여자고 부끄러움이 많은 성격은 어쩔 수 없다치지만,
모든 상황을 조금씩 계산해서 카톡은 이틀에 한 번하고,
직접 고백은 하지 않으나 같은 동아리 아이들이 알게 해서 저절로 퍼뜨리고 하는 이런 식의 행동은 용납할 수가 없다.
사랑을 하라고 했지 누가 수학 계산을 하라고 했나.

그런 점에서 데이비스는 나의 이상형이다.
마음에 드는 여자아이에게 자신의 마음을 숨기지 않고 직접적으로 드러내는 사람은 적어도 간사해 보이지 않는다.
그의 행동과 말에 나도 솔직하게 반응할 수 있다.
지금까지의 나의 연애를 반추해보건데, 사귀었던 남자들 중에서 이런 직진 노선은 세 명 정도 였던 것 같다.
달랑 세 명이라니.. 헛 산 건가...
한 번 사는 인생, 밀당은 접어두고 자신의 마음을 숨김없이 표현했으면 좋겠다.
누구든.







데이비스와 나는 별로 많은 대화를 나누지 않았고, 심지어 서로를 바라보지도 않았지만 상관없었다고, 왜냐하면 함께 같은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고, 그건 서로 마주보는 것보다 더 친밀한 행위이기 때문이라고 말했을 것이다.

p. 17




이 부분을 읽는 순간 [어린왕자] 의 작가 생텍쥐베리가 [바람과 모래와 별들] 에서 한 명글귀가 떠올랐다.
'서로 마주보고 있을 때가 아니라 함께 같은 곳을 바라보고 있을 때 사랑은 더욱 깊어진다는 것을 뒤늦게 깨닫는다.'
이 명언을 중학생 때 처음 접했을 때의 내 반응은
1단계 - 이해가 잘 안 간다. 2단계 - 곰곰히 생각 3단계 - 아하! 뒤통수를 얻어맞는 듯한 충격이었다.
좋아하는 사람, 사랑하는 사람의 얼굴만 봐도 행복한 게 자연스러운 반응이다.
그런데 어찌 그 사람을 보지 않고 둘이 먼 곳을 바라보고 있는 게 더 행복하단 말인가.
그건 어쩌면 굳이 서로를 보고 있지 않아도 마음을 느낄 수 있고, 같은 생각으로 같은 곳을 향해 가기 때문이 아닐까.

데이비스와 에이자는 케미가 잘 맞는 한쌍이다.
자기 아버지를 찾아 현상금을 받겠다는 '불순한' 의도로 왔을지도 모를 어릴 적 친구를 거리낌없이 받아주고는
자신의 생각을 과감없이 털어놓는다.
에이자가 키스할 때 느끼는 숨막히는 증상이나 여러가지 불안 증세를 말했을 때도
데이비스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에이자의 몸과 그녀 자체를 좋아한다고 말한다.
자꾸만 뒤로 한 걸음 물러서려고 했던 에이자도 데이비스의 진심을 알고 그의 마음을 받아들인다.





난 데이비스 피킷과 페이스북 친구가 되었다.
(중 략)
인스타그램에도 같은 아이디로 만든 계정이 있었다.
(중 략)
그 애의 인스타그램 프로필은 트위터와 연동되어 있었고, 트위터에서는 nkogneato라는 아이디를 아직 팔로잉하고 있기에 클릭해 보니 데이비스의 트위터였다.
(중 략)
nkogneato 아이디로 검색해 보니 유튜브 프로필이 나왔는데
(중 략)
마침내 검색 결과를 한참 넘긴 끝에 블로그가 나왔다.

p. 67-69




이 소설은 한 소녀의 성장기이고 로맨스 소설이며, 동시에 소년 탐정물이기도 하다.
물론 그 중에서 소녀의 성장이 60%, 사랑이 30%를 차지하고 있어서 추리 부분은 겨우 10%에 불과하다.
정작 러셀 피킷을 찾는 장면이 많이 보이지 않아 실망스러울 수도 있겠으나,
내겐 의외로 데이비스를 추적하는 에이자의 모습이 재미있고 깊은 공감이 갔다.
소위 '싸이월드' 시절엔 좋아하는 아이의 싸이를 몰래 찾아보기위해 친구 아이디로 접속해보기도 했고,
로그아웃한 상태로 페이스북 이름을 검색하기도 했다.
에이자는 데이비스와 페이스북 친구를 한 후, 그의 인스타그램, 트위터, 유튜브에 블로그까지 알아버린다.
중간에 데이비스의 전 여자친구에 대한 정보도 알게 되고, 그가 써놓은 포스팅들을 통해 성향을 파악하게 된다.
정확히 말하면 추리, 탐정이라고 하기엔 우스운 장면이라 할 수 있고, 그 보다는 썸 타는 여학생이 흔히 하는 행동이라 할 수 있겠다.
어쩐지 예전의 나를 보는 거 같아서 재미있다.





[렛 잇 스노우] 와 [잘못은 우리 별에 있어] 를 통해 본 작가 존 그린은 너무 극한 상황이나 결말을 좋아하지 않는다.
나 역시도 그렇다.
이 소설 [거북이는 언제나 거기에 있어] 역시 그렇다.
아쉽지만 잔잔하고 여운이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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