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레이크 다운
B. A. 패리스 지음, 이수영 옮김 / arte(아르테) / 2018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어쩔 수 없이 나는 다시 차를 멈춘다. 여자를 그냥 놔두고 가서는 안 될 것 같으니까. 그렇다고 위험하게 차 밖으로 나가고 싶지는 않다. 생각해보니 내가 옆을 지나쳐 갈 때 여자는 그냥 나를 보기만 했던 것 같다. 다급하게 손을 흔들지도 않았고 도움이 필요한 표시도 전혀 보이지 않았다.

p. 15




무더운 여름날 짜증나는 더위를 식히기 위하여, 아니면 장마철 추적추적 내리는 비를 온 몸으로 느끼기 위하여
읽기 좋은 스릴러소설이 여기에 있다.
B.A. 패리스의 소설 [브레이크 다운]이 그것으로,
제목인 Break Down은 '(차의) 고장' 과 주인공 여성인 캐시의 '신경쇠약', 이렇게 두가지 뜻을 지닌 중의적 타이틀이다.

남편 매튜가 그렇게 가지 말라고 말렸는데도 폭우 중 숲 속 지름길로 운전해가던 캐시는 멈춰선 차를 발견하고,
그 안의 여성과 눈이 마주친다.
차가 고장난 것 같으니 도와줘야할까, 아니면 그냥 지나칠까,
오만가지 생각이 머리를 스치는 가운데 캐시의 선택은 가던 길을 계속 가는 것이다.
다음날 차 안의 여성이 잔혹하게 살해된 채 발견되고, 이는 캐시를 자책감과 신경쇠약으로 이끈다.

과연 캐시가 끊임없이 하는 후회처럼 내려서 어떤 상황인지 모를 여성을 도와줘야했을까?
전혀 아니라고 생각한다.
캐시가 차 안에서 내리지 않은 이유에 적극 동의하는 바이다.
혹시나 여자 뒤에서 누군가 숨어있다가 오히려 자신의 차를 빼앗거나 생명에 위협을 가한다면?
어차피 차 안의 여성도 딱히 도움의 손길을 구하는 제스쳐를 취하지 않지 않았는가?
설령 그랬다 할 지 언정, 캐시가 그녀를 꼭 도와줘야하는 의무도 법도 없다.
착한 사마리아인의 법은 없다.
현대 사회는 서로가 매우 각박해져서 도와준 사람이 되려 원망을 사기도 하고,
기껏 도와줬더니 왜 진작 안 와서 죽게 했냐며 유가족에게 질타를 받기도 한다.
때론 선의로 도운 사람이 법적으로 처벌받기도 한다.
게다가 캐시는 여성이고 혼자다.
캐시를 도울 수 있는 사람은 그녀 자신밖에 없다.
내 코가 석자인 상황에서 누구를 도울 수 있겠는가.

 




나에게도 엄마와 같은 일이 시작되었다고 생각하게 만들고 싶지 않다. 가장 나쁜 건, 여행가방을 사자고 했던 기억은 물론이고 160파운드를 어디에 두었는지도 모르겠다는 것이다.

p. 35




도와줄 수도 있었던 여성을 그대로 지나쳤다는 죄책감으로 괴로운 나날을 보내던 중,
캐시를 더욱 괴롭히는 건 어머니가 생전에 가졌던 치매 증상이 자신에게도 나타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자신이 제안했다는 친구의 생일 선물이며 친구들에게 받은 돈이, 이웃집 커플을 초대한 사실이, 친구 레이철과 만나기로 한 날이,
남편이 출장가기로 한 날짜가, 심지어 가전제품의 작동법이 도통 기억나지 않는다.
이런 증상이 억수같이 비가 오던 그 날 밤 전부터 나타났는지 아니면 후부터 심해졌는지 정확히 알 순 없지만
확실한 건 상태가 악화되어가고 있다는 것이다.
자신에게 걸려오는 말없는 익명의 전화는 캐시의 상태를 부채질하여 이제 약 없이는 하루도 살 수 없는 처지가 되었다.
아직 30대 밖에 되지 않았지만 그녀 앞에 펼쳐진 현실은 암울할 따름이다.
만약 내게도 이런 일이 생긴다면... 상상하기조차 싫다.
하루 빨리 대형 병원에 가서 갖가지 검사를 받고 정확한 진단을 받은 다음 의사의 처방에 따를 것이다.
캐시처럼 자신의 상황을 부인하고 남편에게 민낯을 보이기 싫어하면서 거부 반응을 보이지 않을 것이다.
피할 수 없이 닥친 상황이라면 어떻게든 최선의 방법으로 타개해 나가는 게 가장 좋은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아무도 보이지 않았지만 우체통에 편지를 넣을 때 누가 지켜보는 느낌이 든다. 지난번 공중전화로 경찰에 신고할 때와 마찬가지 기분이다. 뒷목에 소름이 돋아서 몸을 휙 돌려 돌아본다. 하지만 아무도 없다.

p. 126




실체가 확실하지 않은 누군가, 혹은 무언가로부터 보이지 않는 위협을 받으며 살아간다는 건 어떤 기분일까.
매일 남편이 회사 간 시간만 골라서 걸려오는 말없는 전화, 집 주변을 서성이는 미지의 남성,
이 모든 상황은 한 사람을 미치도록 만들기에 충분하다.
최초의 원인이 폭우가 오던 날 밤인지, 단순 신경쇠약인지, 치매 때문인지, 아니면 약 때문인지 모호하다.
과연 주인공 캐시는 구체적인 누군가에 대항하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그녀가 만들어낸 환상 속에서 힘들어하는 건지 알 수 없다.
책장을 넘길 수록 증세가 심각해져만가는 그녀를 보면서 어디까지가 진실이고 어디서부터 상상으로 만들어낸 건지 곱씹게 된다.
점점 캐시가 지각한 세상과 그녀의 머릿 속 세상 사이의 경계가 무너지고 독자는 혼란에 빠지고 만다.

 




어떤 결말을 예상하든 후반부에 가면 뒤통수를 한 대 얻어맞은 듯한 기분이 들 것이다.
내가 그랬다.
사건의 실체를 파헤치려고 고민 해가면서 읽지 않는다면 더욱 시원한 한 방을 기대할 수 있다.
올 여름 스릴러소설은 [브레이크 다운] 을 강추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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