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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시마의 도쿄 ㅣ 도시 산책 시리즈
양선형 글, 민병훈 사진 / 소전서가 / 2025년 8월
평점 :
얼마 전까지 미시마 유키오에 깊이 빠져 있었다. 전후 일본을 다룬 책들을 읽다 보면 그의 이름이 자주 등장하는데, 늘 정치적 맥락 속에 놓여 있다는 사실이 흥미로웠다. 실제로 그는 우익 인사로 알려져 있으며, 자신의 사상을 작품 속에 투영하는 데 그치지 않고 ‘다테노카이’를 결성해 집단적 행동으로까지 옮겨갔다. 그러나 무엇보다 충격적인 것은 역시 ‘미시마 사건’이라 불리는 그의 할복일 것이다.
정치적 행보와 별개로, 미시마의 이름은 언제나 예술을 위한 예술의 극점에 자리한 듯하다. 그의 심미주의는 부정보다 찬미의 대상으로 더 자주 호출되며, 그의 문장을 읽다 보면 그 미학적 세계에 빠져들게 된다. 하지만 미시마 유키오라는 이름은 한국에서 결코 편안하지 않다. 제국주의와 천황제라는 전통적 가치관을 끊임없이 옹호했던 그의 태도는, 식민지 경험을 지닌 한국인에게 불편함과 불쾌함을 동시에 불러일으키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문학성은 때때로 정치적 성향을 넘어서는 힘을 보여주는 것도 사실이다.
최근 소전서가에서 출간된 양선형의 『미시마의 도쿄』는, 내가 미시마를 읽으며 떠올렸던 수많은 생각과 감정들을 다시금 불러냈다. 저자 또한 미시마에 대한 엇갈린 평가들을 의식한다. 양선형은 그의 소설과 에세이를 따라가며 미시마의 사유를 좇고, 그가 걸었던 도쿄의 공간들을 직접 찾아가 마치 대화를 나누듯 글을 풀어낸다.
미술사를 연구하는 나로서는 미시마 유키오와 직접적인 접점이 거의 없다. 그렇기에 그의 삶과 소설을 읽으며 떠올랐던 무수한 생각들을 굳이 정리할 필요도 없었다. 그러나 『미시마의 도쿄』를 읽고 나니, 뒤엉켜 있던 사유의 조각들이 한 자리에 놓이며 비로소 정리되는 듯한 감각을 얻었다. 역사적, 정치적 잣대로만 본다면 ‘극우’ 미시마의 얼굴이 먼저 떠오른다. 그러나 예술의 관점에서 바라본다면, 문학을 통해 그가 표출하려 했던 정치성, 전후 일본이라는 시대에 대한 그의 사유, 그것을 초월한 예술이란 무엇인가를 좀 더 입체적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1969년 미시마와 도쿄대 전공투의 대담에서 나온 한 대목, 미시마에게 천황은 결국 작품에 불과하다는 말이 잘 알려져 있다. 인간임을 선언한 천황을 다시 신격화하는 행위가 그에게는 무엇을 의미했을까? 양선형은 미시마를 두고 “원고지 위에서 은밀한 반동분자로서 ‘자신만의 싸움’을 이어갔다”고 표현한다. 또한 그는 미시마의 내면을 “죽음과 비극에 대한 에로스, 찬란한 일본의 전통미와 퇴폐적 공상, 그러나 그것 모두 자신에게는 불가능하다는 소외 의식 속에서 내면의 어둠을 탐조등으로 비추었다”(90쪽)고 묘사한다. 실로 적확한 진단처럼 느껴졌다. 또 다른 대목에서 미시마의 소설은 “의식과 무의식의 대결, 형식주의와 낭만주의의 위험한 매혹, 그리고 재판관의 냉혹한 윤리 사이 어딘가”(98쪽)에 위치한다고도 말한다. 그렇다면 그는 단순히 죽음을 갈망한 광적인 극우 소설가였을까, 아니면 천황제를 통해 자신의 심미주의를 작동시키려 했던, 모순적이면서도 일관된 예술가였을까.
전통으로의 회귀를 외쳤다기에는 그의 삶은 모순적이다. 겉으로는 일본주의를 부르짖는 듯 보였으나, 실상은 서구적 외형을 탐닉했다. 그러면서도 전통적인 무사도를 사랑했다. 『풍요의 바다』 제2권 『달리는 말』 속, 신풍련에 심취한 이사오의 할복 장면은 그의 할복을 낭만적으로 정당화하는 것일까 싶을 정도다. 미시마가 묘사한 이사오의 죽음은 어딘가 ‘낭만적’으로 빛나기 때문이다. 양선형은 “우리는 ‘미시마 사건’을 읽는 것이 아니라 ‘풍요의 바다’를 읽는다”(300쪽)고 적었다. 결국 자위대 청사에서의 최후의 행위 또한, 『풍요의 바다』라는 문학적 장편 속에서 읽어내야 했다.
소전서가는 내가 아는 한 가장 책을 사랑하는 공간이다. 그곳에는 책을 자본으로만 보지 않는 진심이 배어 있다. 그리고 양선형의 글은 그 진심과 닮아 있었다. 그의 독서와 사유, 그리고 도쿄를 거니는 발걸음이 『미시마의 도쿄』 속에서 온전히 살아 숨쉰다. 이 책은 미시마를 둘러싼 그의 생각을 담은 에세이이자, 소설가가 쓴 하나의 작품처럼 읽혔다. 그의 글 사이사이에 실린, 같이 동행한 민병훈의 사진은 도쿄의 공기가 그립게 만들어주었다. 그렇다면 미시마를 읽은 뒤, 양선형이라는 작가 자신에게는 어떤 변화가 찾아왔을까? 그의 소설에 어떤 흔적이 스며들었을까? 문득, 그 이후의 이야기가 궁금해졌다. 이후 그의 작품을 기대하고, 또한 응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