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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
조세희 지음 / 이성과힘 / 200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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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 15년 만에 읽었던 책을 다시 샀다. 100쇄를 넘긴 책답게 출판사도 바뀌고 디자인도 바뀌었다. 예전에 읽었던 것은 문학과 지성사 판이었다. 그 책 옆 표지가 흰 색에 빨간 띠가 둘러진 그 디자인. '난쏘공' 옆에는 김원일의 '마당 깊은 집', 양귀자의 '원미동 사람들'이 함께 꽂혀 있던 기억이 난다. 모두 같은 디자인이었다. 내용도 크게 다르지는 않았던 걸로 기억한다. '마당 깊은 집'은 전쟁통의 사람들, '원미동 사람들'은 80년대 초중반 소시민들의 삶을 다뤘던 소설이다. 난쏘공은 그 중간쯤인 70년대 빈민들의 삶을 다룬 책이었다.


난쏘공을 사면서 몇 권의 요즘 소설을 샀다. 백가흠의 '조대리의 트렁크', 김연수의 '네가 누구든 얼마나 외롭든'. 내가 그닥 좋아하는 문체나 내용은 아니었다. 그러나 '난쏘공'의 투박한 문체, 빈틈있는 구성과 비하자면 참 세련된 소설이었다. 조세희의 후배들, 난쏘공의 아이들보다도 어린 세대일 그 소설가들은 이제 한국문학의 기대주가 될 만큼 많은 시간이 흘렀다. 그렇다고 흐뭇할 일인가. 난장이는 여전하다. 마당깊은 집에서 난쏘공에서 원미동 사람들로 넘어오는데 여전히 삶의 문제는 전혀 나아지지 않았다.


지금은 그때와 다르다.
그때처럼 연근수당이 반토막이 되거나, 노동자 대표가 사용자 측에 권리를 요구하다가 쫓겨나거나, 연근 때문에 조는 노동자를 작업반장이 옷핀으로 쿡쿡 찔러대거나, 단지 '난장이'라는 이유로 두들겨 맞는다거나 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그때와 같다.
부당한 처우에 항의를 하려해도 해고 처분을 받을까봐 두려워 입을 닫아야 하고 사용자는 지금은 파이를 키워야 할 때라고 말하고 생활비로서가 아니라 생존비 명목의 임금을 손에 쥐는 사람들이 여전하고 집을 철거하고 새집을 올리는데 턱없이 부족한 보상금으로 보금자리를 옮겨야 한다.

무려, 30년이 흘렀다. 그럼에도 그렇다.
노동운동의 역사는 '시간'을 둘러싼 투쟁의 역사라고 하는데 무려 30년이 흘렀는데 여전히 노동의 강도는 낮아지지 않았다. 은폐된 강요에 의한 자발적 노동강도는 더욱 세졌다. 더욱 무서운 것은, 이것이 무려 30년 전의 이야기란 것이다.


그러나 무엇보다 나에게 커다랗게, 새삼스럽게 이 책이 다가온 이유는 따로 있다.

난쏘공을 읽고 원미동을 읽고 나이에 걸맞지 않았는지도 모르는 사회과학 책을 기웃거리던 시절이 있었다. 그걸 읽던 나, 우리 가족의 계급, 계층을 굳이 다른 사람들이 하는 말로 일컫자면, 도시빈민, 저소득층, 영세상인, 무주택자....이런 말이 될 테다.

그러다 대학생이 됐다. 뭔가 학생으로서 할 수 있는 일이 있다고 생각했고 주위 친구들은 농활, 빈활, 공활 등 여러 '활동'을 했다. 대학을 졸업하고도 나는 적어도 그들의 문제에 관심을 잃지 않으리라 다짐을 하고 살았다.

그리고 올해는 87년 민주화 항쟁 이후 20년을 맞아 다양한 평가와 반성과 전망이 넘쳐났다. 그 가운데 하나는 황지우가 쓴 "젊음이여 오래 거기 남아있거라"의 한 대목이었다. "민중을 대상으로 보지 말고 (for the people) 민중과 함께 사는 (with the people) 자세야말로 참된 지식인의 길이라고 선배들은 힘주어 강조했다. 그런데 나의 작은 아버지, 고모는 '민중'이라는 단어를 몰랐다. '우리처럼 돈 없고 빽 없는 것들'이라고 스스로 칭했다. 민중이라는 용어를 구사하는 모든 지식인은 처음부터 민중을 대상화한 것이었다."

난쏘공을 읽으며, 지난 기억을 더듬으며 이 황광우의 말도 틀렸음을 깨달았다.
'민중을 위해'든 '민중과 함께'든 적어도 그는, 나는 스스로 민중이라는 (of the people) 생각은 하지 않았던 것은 아닐까. '난장이'는 여전한데 책 디자인이 바뀌고 최근의 가장 첨예한 문제를 다뤘던 소설이 한국 문학의 고전이라는 이름을 달아가는 것처럼 박제화되어 가고 있는 것은 아닐까.

'정의는 강자를 위한 이익이다'라는 저 옛날 그리스의 명제에 대해서 우리는 정의가 우리 모두를 위한 이익이라고 바꾸려하기보단 내가 강자가 되기 위한 길을 택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것이 설령 타인에게 그림자를 더 지우는 일이라 해도 말이다.



그것이 15년 만에 읽은 난쏘공이 그 어는 사회과학 서적보다 더 힘들게, 더 아프게, 더 무섭게 다가온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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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절한 복희씨
박완서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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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김지미를 싫어한다. 몇 년 전 어느 영화제에 시상하러 나와선 “제목이 좀...흠...그러네요. ‘개 같은 날의 오후’...”를 부끄럽게 외치던 그녀가 싫다. 그러면서 나이가 마치 억겁인 듯 몇 겹으로 덮은 그녀의 화장도 미웠다. 아침마당에 등장하는 엄앵란처럼 나이에 맞게 늙어가는 이들이 좋았다. 그래서 당대의 이효리나 전지현도 종래에는 전원주나 선우용녀처럼 되길 바랐다. 그러나 나이가 들어도 글루코사민과 오메가 쓰리와 함께 로션과 이것저것을 빼놓지 않는 어머니를 보면서 내 바람이 얼마나 부질없는지를 뒤늦게 깨달았다. 엄마이기 전에, 노인이기 전에, 아내, 며느리, 그 어느 것 이전에 여성이고 인간인 것을. 그것이 허위와 가식과 위선이라 해도, 아니 허위와 가식과 위선 그 자체가 사람들이 누려야 할 것임을 뒤늦게 깨달았다.

인생의 ‘결정적 순간’을 포착하는 박완서의 시선을 온전히 이해했다고 말하는 것만큼 시건방떠는 일도 없을 것이다. 그것은 아마도 이 글을 읽는 우리 부모님 세대에게나 어울리는 말일 테다. 다만 지하철에서 빈 자리만 보면 그 rpm을 급속하게 올리는, 그러나 다른 일에는 시동조차 잘 걸리지 않는 낡은 포니 같은 그네들을 바라보는 우리들의 시선이 ‘상대적으로 젊은’ 나에게 던져진 몫일 테다.

이 이야기들이 노친네들이 빛바랜 흑백사진을 바라보는 듯한 과거의 회상, 혹은 회귀로 읽히지 않았으면 좋겠다. 남루하고 질척거리든 어쩌든 그런 시간을 인고하고 살아온 ‘지금, 여기’ 있는 노인들의 문제다. ‘가난하다고 해서 사랑을 모르겠는가’하는 신경림의 시처럼 늙었다고 해서 성욕과 물욕과 시기와 위선이 없겠는가.

물론 박완서 선생이 힘주어 두 번이나 말했듯,

“알아듣는 것보다 더 어려운 것은 받아들이는 일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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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민식 Choi Min Shik 열화당 사진문고 19
최민식 지음 / 열화당 / 200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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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사진이야기 하나를 하자.

내 고향은 강원도 태백 철암이다. 대한민국에서 가장 큰 저탄장이 있는 탄광촌이다. 나는 그곳을 떠나온 돌 이후로 한 번도 가보지 못하다 올해 처음 찾았다. 가기 전에 네이버에서 이미지 검색을 했다. 검은 빛 스러져가는 과거의 이미지로 가득찼다.

나도 카메라를 가져갔으나 단 한 장도 누르지 못했다. 그들의 사진은 왜곡돼 있었다. 그곳에도 '사람이 살고 있었네'. 그들에게 함부로 카메라를 들이댈 수 없었다. 타자로서 철암을 바라본 이들의 블로그 사진은 거의 폭력이었다.

이 책에 담긴, 수많은 블로그와 인터넷 웹페이지에서 유명해진 최민식의 사진도 별반 다르지는 않다. 그러나 누구도 최민식을 그렇게 '타자화된 시선'으로 보지는 않을 것이다. 바로 그가 그들 가운데 하나이며 일생을 두고 그들을 필름에 담고 사람들에게 반향을 일으켰기 때문일 것이다.

사진을 잘 몰라 구도와 대비 이런 것은 잘 모르겠다.

그러나 어떻게 찍는가보다 왜 찍는가가 더 중요하지 않을까.

그 작은 떨림...그것이 최민식이 간첩으로 매양 신고당하면서도 '그들 사이에' 있었던 이유 아닐까.

그러나 걱정이 든다.

이런 이미지가 혹여나 과거의 빈궁을 통해 현재의 영화를 결론지을까 해서다.

아닐 것이다.

현재진행형일 것이다. 그 작은 떨림을 '지금, 여기'의 문제로 받아들이는 큰 울림.

그것이 내가 이 책에서 얻게 된 감흥이다.

양극화, 비정규직, 88만원 세대 같은 현재적 문제가 머릿속을 맴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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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
조세희 지음 / 이성과힘 / 200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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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세대가 흘렀다. 글을 발표한 때가 내가 태어나던 즈음이었다.

지금은 그때와 다르다.

그때처럼 연근수당이 반토막이 되거나, 노동자 대표가 사용자 측에 권리를 요구하다가 쫓겨나거나, 연근 때문에 조는 노동자를 작업반장이 옷핀으로 쿡쿡 찔러대거나, 단지 '난장이'라는 이유로 두들겨 맞는다거나 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그때와 같다.

부당한 처우에 항의를 하려해도 해고 처분을 받을까봐 두려워 입을 닫아야 하고 사용자는 지금은 파이를 키워야 할 때라고 말하고 생활비로서가 아니라 생존비 명목의 임금을 손에 쥐는 사람들이 여전하고 집을 철거하고 새집을 올리는데 턱없이 부족한 보상금으로 보금자리를 옮겨야 한다.

무려, 30년이 흘렀다. 그럼에도 그렇다. 노동운동의 역사는 '시간'을 둘러싼 투쟁의 역사라고 하는데 무려 30년이 흘렀는데 여전히 노동의 강도는 낮아지지 않았다. 은폐된 강요에 의한 자발적 노동강도는 더욱 세졌다.

더욱 무서운 것은, 이것이 무려 30년 전의 이야기란 것이다.

1977년 노동현실의 부조리, 빈민의 고단한 삶을 이렇게 적나라하게 써내릴 수 있었을까 하는 의문이고 그것은 정치현실에 대한 갈등과 저항이 오히려 사용자로 대변되는, 당시에는 상대적 약자였을 자본가에게 전가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 때문에 무섭다.

게다가 또 더욱 무서운 것은 30년이 흐른 지금을 돌아보면서다.

명왕성이 태양계에서 퇴출된 것 마저도 노무현 탓이라는 우스개처럼, 이제 모든 것은 정권, 대통령의 책임이다. 그러면서 더 은밀하고 일상화된 모순은 철저하게 가려진다. 이제 정치권력은 자본권력 앞에 무력화되었다고 하니 그도 그럴 만하다.

무엇보다 무서운 것은,

더 많이 말할 수 있고 더 크게 말할 수 있는 지금 시대에, 이 소설집과 같이 우리의 눈으로 보고 우리의 입으로 우리의 삶을 말하는 작가는 어디에 있는가 하는 점이다.

정의란 강자를 위한 이익이다...라는 말을 들으면서 이제 모두들 정의를 우리 모두의 이익으로 만들려는 시도보다는 내가 강자가 되어야 한다는 시대에, 이런 곳에 눈을 돌리려는 시도는 어디에 있을까.

소설로서, 덜 다듬어진 듯도 하고, 문학적 서사보다 르포를 보는 듯한 느낌도 드는 이 책을 읽기가 힘들었다. 그러나 무엇보다 힘든 것은 이런 생각들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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