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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게 무해한 사람 (리커버)
최은영 지음 / 문학동네 / 2019년 6월
평점 :
품절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최은영 작가님의 ‘내게 무해한 사람’은 그 여름, 지나가는 밤, 모래로 지은 집 등 총 일곱편의 단편소설로 구성되어 있다. ‘내가 지나온 미성년의 시간이 스며 있다’는 작가의 말처럼 이 작품을 구성하는 일곱편의 소설은 모두 지나간 과거를 회상하며 그 속에서의 만남과 이별을 이야기한다. 남겨진 누군가가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 지금은 사라지거나 떠나간 인물을 회상한다는 점이 작가의 쓸쓸하고 덤덤한 문체에 잘 녹아들어 작품을 끊어 읽더라도 어쩔 수 없는 헛헛한 마음을 유지할 수 있게 도와줬다. 단순히 미성년 시기를 생각하면 빨간색 동그라미 속 볼드한 글자로 처리된 19 모양의 앰블럼 때문인지 붉은 색감이 먼저 머릿속에 배경색으로 뿌려지는 것 같다. 감정적으로나 신체적으로 대부분의 것이 조금은 불안정하고 위태로운 느낌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그런 시기에 의도의 유무를 떠나 저질렀을 법한 과오나 느꼈을 법한, 일어났을 법한 이야기를 작가는 차분하면서도 그립고 쓸쓸하며 어딘가 회한하는 듯 한 느낌의 흰 끼가 낭낭하게 서려있는 하늘빛 문체로 이야기를 써내려가고 있다.
눈물이 그렁그렁한 눈의 어린 아이가 내 옷자락을 잡고 있는 것처럼 책을 덮고 난 뒤까지 떨쳐내기 어려웠던 작품은 단연 이 책의 제목이 언급되는 ‘고백’이었다. 고백 외의 다른 이야기 속 인물들은 지금 나의 공간과 내 시간에 함께하지 않을 뿐 그만의 시간을 지나며 또 다른 이야기를 써내려 갈 텐데 ‘고백’의 진희만큼은 더 이상 그가 주인공이 되어 그려나가는 세상이 없다는 점이 더욱 아프게 다가온다. 무엇보다 진희가 입은 상처는 계속해서 고통을 만들고 붉은 피를 흘릴 수 있을 뿐 진물도, 고름도, 딱쟁이도 앉을 수 없다는 것이 차마 그 앞에서 눈물을 보이는 것조차 기만이라고 여겨질 만큼 어찌할 바를 모르게 만들었다.
-그땐 몰랐기에 그랬어.
-괜찮아 이해해.
나 또한 몰랐기에 저지른 무해하고 싶었으나 그렇지 못한 행동들을 다시금 되짚어보게 하는 이 이야기들 속에서 내 마음 편해지고 싶은 이기심이 또 발동한 것이다. 결국 과거보다 성숙해진 ‘우리’가 만나면 이런 대화를 나누지 않을까. 잊을 순 없어도 잘 덮고 다시는 열어보지 않을 수도 있겠지. 적어도 ‘우리’가 같이 있을 땐 말이다.
고백의 진희에게 만큼은 그것이 불가능했다. 그러니 자연히 미주와 주나도 고름을 내고 딱쟁이를 앉힐 수 없었을 것이다.
이 작품은 나에게 건조하고 매서웠다. 누군가에게 질책을 당하더라도 할 말이 없어 눈물만 뚝뚝 흘렸을 텐데, 오히려 그러는 편이 좀 더 속을 후련하게 할 것 같은데 그것조차 허락하지 않는다. 우리에게선 더 이상 써내려갈 이야기도 함께 마주할 공간도 없으니 감당하라고, 자만하지 말라고. 내게 무해한 사람을 찾기보다 먼저 무해한 내가 될 수 있게끔 낯설고도 다정한 시간과 공간을 마련해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