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그림자는 월요일
김중혁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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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편지들이 공개되면 저는 두 번 죽는 거나 마찬가지입니다.”(79)

 

경찰을 그만두고 탐정 일을 시작한 주인공 구동치 앞에 한 소설가가 찾아온다

소설가는 한 사람에게는 미공개 작품이 담긴 편지를 보내고 

다른 한 사람에게는 연애편지를 보냈는데 어떻게든 몰래 전부 회수하고 싶다고 말한다

불법적인 수단까지 동원하려는 소설가를 이해하지 못했지만

살인 빼고 가릴 처지가 아니라 의뢰를 수락한다

이것이 구동치의 첫 딜리팅deleting’이었다.


사람들은 저마다 비밀을 간직하고 있다

악어빌딩의 백기현처럼 오래전에 헤어진 애인 사진을 부인 몰래 지갑 속에 간직하기도 하고 

남에게 보여줄 수 없는 파일로 가득 찬 직박구리폴더를 D 드라이브에 숨겨두기도 한다

만에 하나 공개되는 상황은 상상만 해도 오싹하다

확 없애면 그만인데 왠지 결심이 서지 않는다

더구나 원치 않는 정보가 이미 남의 손에 있다니, 소설가의 초조한 마음도 충분히 이해가 간다

예기치 못한 죽음을 대비해 농담 삼아 지인끼리 사후 처리를 부탁해 보지만

실제 상황이 닥쳤을 때 정말 없애줄 수 있을지 불안하기만 하다.

바로 그런 걱정을 말끔하게 해결해주는 전문가가 구동치다

그의 귀는 아주 깊은 우물과 같아서 돌을 던져도 소리가 나지 않으니 

어떤 비밀도 안심하고 맡겨도 좋다

다만 우물을 깊게 파려면 돈이 필요할 뿐이다. 그것도 아주 많이.


의뢰자가 죽었다는 연락을 받고 구동치는 평소처럼 딜리팅을 시작하지만

태블릿 피시는 찾을 수 없었다

사라진 피시의 행방을 더듬자 손 떼라고 경고하듯 

누군가 사무실을 침입하여 일부러 흔적을 남긴다

경찰 시절의 선배는 의뢰자의 죽음을 타살로 의심한다

종적이 묘연하던 태블릿 피시에 전원이 들어와 위치를 더듬어갔다가 

무력으로 회수하려는 세력과 맞닥뜨린다

그들은 이미 오래전에 사라졌다고 알려진 무술가 집단이었다

사건은 태블릿 피시의 행방을 두고 생사를 오가며 긴박하게 흘러간다.


거대한 비밀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추리는 고전이라 할 수 있다

딜리팅이라는 낯선 이름을 달았지만

누군가의 비밀을 캐내거나 지운다는 면에서 보면 새롭지 않다

그런데도 손에 땀이 나고 흥미진진하게 읽을 수 있는 것은 요즘 세상이라 그럴지도 모른다.

인터넷이 등장하면서 정보의 파급 효과가 터무니없이 커졌다

일단 공개되면 완전히 없애는 건 불가능에 가깝다

본인의 의사와 상관없는 자료가 인터넷을 떠돌아 고통받는 사람이 있다

디지털 주홍글씨를 완전히 없앨 수 없다는 절망감에 자살하기도 한다

안타까운 사연들이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들면서 잊힐 권리를 생각하게 된다

한편으로 최근 한창 시끄러웠던 태블릿 피시가 떠올라 씁쓸한 기분도 든다.


다만 이건 어디까지나 내가 연상한 이야기일 뿐

이 문제를 진지하게 다루는 딱딱한 소설이 아니다

적절한 농담과 웃음이 살아있다. 구동치는 말할 것도 없으며 모든 등장인물이 개성이 뚜렷하다

주고받는 대사들이 유쾌하고 해학이 살아있다

마치 시리즈 드라마의 극장판을 보듯 감춰진 뒷이야기가 궁금해진다

추리소설이었다면 다음 편을 쓰려는 복선이라고 여길만한 장면이 제법 눈에 띈다.


인물 묘사도 돋보인다. 구동치는 테니스가 상대방을 때리거나 물어뜯거나 비난하지 않고 

자신의 밸런스를 유지하는 것만으로 승리를 쟁취할 수 있는 운동이라서 좋아한다

악의 축인 천일수는 ‘40년 동안 단 하루도 빼놓지 않고 

매일 밤 11시에 한 줄짜리 일기를 쓰는남자다

이처럼 성격을 짐작게 하는 재기발랄한 문장을 읽는 재미가 쏠쏠하다.


한편 구동치는 또 다른 딜리팅 과정에서 의뢰자의 딸인 정소윤과 마주친다

정소윤은 삭제된 컴퓨터가 물리적으로 부친의 것이라도 

저장된 내용은 자신의 것이기도 하다고 주장한다

구동치는 물리적인 하드를 파괴한 것이 아니라 정소윤의 추억까지 삭제한 셈이었다

앞서 나온 소설가의 연애편지도 마찬가지다

간직하던 편지가 누군가에 의해 사라졌다는 걸 알면 어떤 기분일지

단순히 비밀에 얽힌 스릴만이 아니라 우리가 기억하고 싶은 것 

혹은 지우고 싶은 기억에 관하여 여러 가지를 생각하게 만든다

구동치가 에필로그에서 소중하게 생각하는 걸 던지면 영원히 사라지지 않는다는 

피오르를 방문하는 것도 의미심장하게 느껴진다.


사실 구동치는 처음 소설가의 편지를 몰래 복사해 두었다

악용하려는 의도는 없지만, 존재해선 안 되는 물건을 소유하는 데서 쾌감을 느낀다

그 후 딜리팅사업이 성황을 이루면서 구동치의 파일 보관함도 점점 늘어난다

어쩌면 비밀은 완벽하게 감춰져서야 의미가 없는지도 모른다

공개되었을 때 비로소 가치가 생기는 건 아닐까. 얼마 전 사건이 그러했듯이.


처음에 소설을 읽으면서 이런 서비스가 실제로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구동치처럼 엄정한 사람이 있다면 믿을 수 있을 것이다

작가는 친절하게도 구체적인 액수까지 알려주어 포기하게 만들지만 말이다


하지만 역시 세상에 믿을 사람은 없다

남에게 맡기지 말고 스스로 없애야겠다고 생각하며 내 직박구리 폴더를 열어본다

막상 지우려하니 파일을 하나하나 살피지 않아도 그간 들어간 수고가 보인다

아무래도 오늘은 날이 아니다. 시간을 두고 생각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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