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이라이프
김사과 지음 / 창비 / 202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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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나더 유니버스의 김사과는 SNL PD일 것이고 그 어나더 유니버스의 SNL은 현재의 미지근한 맛이 아닌 매주 SNS와 온라인 커뮤니티, 인터넷 뉴스를 마비시키는 광기의 도파민 쇼이리라는 것이 나의 가설이다. 그냥 하는 말이 아니라 이게 다 <하이라이프>가 진짜 너무 재미있어서.

<하이라이프>를 읽고 내가 김사과 단편을 좋아한다는 걸 오랜만에 느꼈다.

아직 도파민이라는 단어가 남발되기 전에 읽은 단편집 <02>는 나의 말랑한 20대 뇌에 전기자극을 메다꽂았다. 수록 단편들은 지금 돌이켜봐도 하나 하나 최고의 명작이고 한국 현대문학의 보배다. <이나의 좁고 긴 방>과 <정오의 산책>은 어디 비석에라도 새겨야 한다. 아니 어쩌면 이미 새겨졌을지도 모르지....

한 편 읽을 때마다 머리가 광광 울리는 문화충격을 기대하면서 집어든 장편들은 대체로 비교적 순한 맛이었다. 그럴 때마다 김사과 새 단편집을 부르짖었지만 정작 하이라이프 직전의 단편집은 기억이 안난다. 어, 읽었던 것 같은데....?

하여튼 하이라이프에서 가장 반가운 건 1차원적으로는 김사과의 유머감각이다. 중산층 주부의 우당탕탕 일상의 <두 정원 이야기>, 그리고 서울출생 밀레니얼 힙스터(이것도 이제 사어인데) 여성의 애환을 담은 <예술가와 그의 보헤미안 친구>는 김사과의 팬이라면 정신을 잃고 읽어나갈 수 밖에 없는 단편들이다. <N.E.W>와 <미나>를 읽으며 울적했던 마음을 블랙코미디로 상쇄시킬 수 있는 기회이기도 하다. 김사과 특유의 중산층 광기 묘사가 일품이다.

하지만 당신이 책을 처음부터 읽는 타입이라면, 두 단편을 읽기 전에 넘어야 할 사과동산이 있다. 하이라이프 초반에는 <테러의 시>나 <정오의 산책>을 떠올리게 하는, 다소 멍해지는 관념적 텍스트가 꽉 쥐고 있다. 광기 속의 선(禪), 역시나 김사과의 맛이다. 아는 맛이 무섭다.

하이퍼리얼리즘 쇼에서 표제작 <하이라이프>의 몽환과 환상까지, 김사과의 다채로운 이야기는 소비사회에서 돌아버린 현대인의 단면들을 다층적으로 짚어내는 일종의 르포이자 예언서이다. 김사과는 언제나 현재를 보여주고, 이는 책 뒤편 금정연의 서평이 말하듯 우리에게서 일어나는 지금의 '리얼리즘'이다. 

<천국에서>에서 방언처럼 "우리 이제 망했음"을 외친 후 김사과의 책들이 다소 우울해졌다고 느꼈다. 하지만 망한 정국에서 진짜배기 통찰과 유머가 나오는 것처럼 <하이라이프>는 여전히 선과 도파민 사이에서 줄타기를 하면서 시대를 우리에게 전달하고 있다. 그런 점에서 근미래SF인 <소유의 종말>도 꽤 인상 깊다. 

요약하면 <하이라이프>는 일종의 김사과 테마파크로서 (의도치 않았더라도) 팬들에게 말아주는 따끈한 국밥이다. 이 집이 역시 맛집이여.

잘 먹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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