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 온 뒤 맑음 - 사진과 이야기로 보는 타이완 동성 결혼 법제화의 여정
무지개평등권빅플랫폼 지음, 강영희 옮김, 성소수자 가족구성권 네트워크 감수 / 사계절 / 202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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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5월 타이완이 아시아 국가 최초로 동성 결혼을 법제화했다는 놀라운 소식을 듣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바다 건너에서 벌어진 일에 대한 관심은 금세 사그라들었고 한동안 기억에서도 지워버린 채 저의 삶을 살았습니다. 저는 다른 이들의 권리에 큰 관심이 없는, 조금은 뒤처진 인권의식을 가진 사람이거든요. 그렇게 3년여가 흐른 지금, 그날의 타이완의 모습을 담은 책이 출간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이 책을 읽은 뒤의 제 모습이 궁금해져 읽어보게 되었습니다.


이 책은
2016년부터 결혼 평등권 빅 플랫폼이 탄생한 순간부터, 타이완 국민들이 동성 결혼 특별법을 쟁취한 2019년 5월 24일까지의 이야기를 기록하고, 그곳에 함께했던 이들의 인터뷰를 담은 책입니다.
1986년 한 동성애자의 커밍아웃을 시작으로, 타이완 사회에서 여러 번 화두로 떠올랐던 결혼 평등권에 대한 이야기는 30여 년간 좌초를 반복했습니다.
2016년 동성의 연인 쩡칭차오와 35년간 사실혼을 유지했음에도, 이성 간의 결혼만 인정하는 타이완의 법 때문에 암에 걸린 연인의 치료와 관련해 아무런 결정도 내리지 못하고, 마침내 연인의 사망 후 함께 살던 집에서도 쫓겨난 프랑스 출신으로 타이완 대학 비안성 교수의 자살 사건으로 인해 결혼 평등에 관한 논의가 급물살을 타게 됩니다.

2017년 5월 24일 타이완 사법원은 현행 민법이 동성 결혼의 자유를 보장하지 않는 것은 위헌 소지가 있다고 밝히고. 2년 이내에 관련 법을 개정하거나 제정해야 한다고 알립니다. 잠시 순탄해 보이던 동성 결혼 법제화의 길은 2018년 2월 동성애 반대 단체 ‘다음 세대 행복 연맹’에서 제안한 국민투표에 대패하며 다시금 짙은 안갯속을 걷는 듯했지만, 마침내 2019년 5월 17일 입법원에서 결혼 평등에 관한 법안이 통과되며 평등을 위한 타이완인들의 긴 여정은 끝이 납니다.

책 속의 누군가의 이야기처럼 '결혼 평등권 빅 플랫폼'은 동성 결혼에 부정적이던 대중의 마음을 움직이는 법을 정확히 알았던 것 같습니다. 결혼을 갈망하는 평범한 동성 연인과 그 친구들이 서로를 지지하는 모습을 전면에 내세움으로써, 동성 결혼에 미온적이었던 많은 사람들을 마음을 데우는데 성공합니다. 자신의 손녀가 여자친구와 결혼하는 것을 지지한다는 광고 속의 93세 춘타오 할머니의 미소를 본 이들이 어떻게 마음의 빗장을 풀지 않을 수 있을까요. 자극적이고 과격한 시위 대신 그저 그들의 이야기를 들려주고 보여줌으로써 그들도 우리와 다르지 않은 평범한 인간이라는 당연한 사실을 쉽게 받아들이게 만들었습니다.

‘동성 결혼’과 ‘법제화’라는 다소 어려울 수 있는 주제를 담았지만, 사랑과 평등을 외치는 타이완 사람들의 생생한 모습을 담은 사진과 함께 읽으니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빠져들게 되었습니다. 책 속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거리로 쏟아져 나와 깃발을 흔들며 행진을 하고, 평등권 스티커를 나누어 가지며 자유와 평등을 위한 목소리를 냅니다. 자연스럽게 그들의 발자국을 따라 걷다 보니 어느새 그들의 사랑과 용기에 동화되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그것은 이념의 싸움이 아니라
하루하루의 생활이자
날마다 느끼는 고통이었다"

그들은 특별한 대우를 바라거나, 이익을 위해 투쟁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가정을 이룰 수 있는 평등한 권리 하나만을 요구했습니다. 그럼에도 거짓 소문을 퍼트리고, 자본과 권력을 이용해 혐오와 차별을 조장하는 이들의 모습을 보니 지금의 대한민국의 모습과 별반 다르지 않아 보였습니다.
하지만 2부에 수록된, 법제화를 위해 발 벗고 나섰던 여당 소속 의원 유메이뉘와 야당 소속 의원 쉬이런처럼 당론에 관계없이 자신의 신념을 위해 행동할 수 있는 정치인이 과연 대한민국에 몇이나 존재할까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있긴 있을까요? 과연 지금의 대한민국의 모습은 진정한 선진국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이 책을 읽었다고 해서 제가 하루아침에 동성애자 인권을 위해 길거리로 나가지는 않을 테지만, 매일 조금씩 차곡차곡 쌓아가다 보면 타이완의 그들처럼 누군가에게 든든한 친구가 되어줄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
세상은 빠르게 변화하고 있고, 그 물결은 돌릴 수 없다는 걸 인정해야 할 때라고 생각합니다. 알지만 쉽게 받아들이지 못하는 저 같은 사람에게는 꼭 필요한 책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자신과 같은 성별을 가진 이를 사랑하는 그들의 모습이 아직도 거북하고, 유별나게 느껴지고, 이해되지 않는다면 이 책을 읽어보셨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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