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지구를 지켜줘 1 - 애장판
히와타리 사키 지음 / 대원씨아이(만화) / 2005년 2월
평점 :
구판절판


내가 <나의 지구를 지켜줘> 원작을 읽은 것은 늦어도 한참 늦은 2002년 초봄이었다. 이 작품이 87년에 연재를 시작했는데 10년도 지난 21세기에 보기 시작했으니 뒷북이 이런 뒷북이 싶었지만, 한 시대를 풍미한 고전에는 반드시 그만한 이유가 있고, 그것은 세월이 아무리 지나도 사람의 가슴 속까지 전달되는 법이다.
 
누구나가 학창시절 국어시간에 배웠겠지만, 하나의 이야기는 사건(events), 인물(characters), 배경(settings)이라는 3요소의 상호작용으로 이루어진다. 어떤 이야기가 재미를 주고 감동을 주기 위해서는 이 세가지 요소의 조화가 잘 이루어져야 하고, 걸작으로남으려면 기막힌 하모니를 들려주어야 하는 것이다. <나의 지구를 지켜줘>는, 전생물과 순정만화계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이 작품은 어떨까.

이 작품은 전생이라는 소재로 배경을 꾸미고 있다. 당시에는 일본 전역에 전생 붐을 일으켰을 정도로 엄청난 반향을 불러일으켰다고 하지만(그 영향으로 인해 한국에서도 <은행나무 침대>가 제작되었다는 주장도 있다),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설정은 그다지 마음에 와닿지 않았다. 강산이 바뀔 만큼의 시간이 흐른 지금, 전생 레퍼토리는 일본만화만이 아니라 다른 영역에서도 쉽게 찾아볼 수 있는 소재가 되어버렸던 것이다. 시대를 감안한다면 참신한 설정이었다고 해줄 수도 있겠지만, 별로 그러고 싶은 생각이 없다. 굳이 설정이 독특했다는 역사적 사실마저 참고하지 않더라도 이 작품은 충분히 대단하기 때문이다.
 
사건은 어떤가? 줄거리도 딱히 엄청날 것은 없다. 작품 전체를 살펴보았을 때 이 사건은 결국 '전생에 외계인이었던 한 남자애가 전쟁고아였던 기억에 휘둘려서 지구를 위태롭게 만들 뻔'했다는 걸로 요약될 수 있기 때문이다. 저 우주 너머까지 넘어가는 설정을 갖고도 결국 뉴스거리가 될만한 대소동이 벌어진 적은 없다. 클래이맥스에서 링이 도쿄타워에서 일으키는 소란 정도가 제일 요란했달까. 물론 그렇다고 해서 스토리텔러로서의 작가의 능력을 깎아내릴 수는 없다. 괜찮은 스토리 가지고도 죽을 쑤는, 이야기를 매끄럽게 이끌어가는 능력이 떨어지는 작가들이 한둘이 아니니까. 중반에 조금 늘어지는 감이 있지만, 쾅쾅 터지는 가시적인 사건 없이도 긴장감을 잃지 않고 자신이 해야할 이야기를 충실히 해냈다는 점에서 스토리 전개능력도 박수를 받을 만하다.

하지만 배경도 합격점, 사건도 합격점이라고 해서 이 작품이 세월을 뛰어넘어 사람들의 사랑을 받을 수 있었을까? 나는 <나의 지구를 지켜줘>가 가지고 있는 최고의 미덕은 사람의감성을 자극하는 왠지 모를 그리움, 그리고 그것을 표현하는 캐릭터들의 호소력이라고 생각한다.

세상에는 두가지 유형의 이야기가 있다. 이야기가 캐릭터들을 움직이는 타입과 캐릭터들이 이야기를 움직이는 타입. 딱 그렇게 갈라진 것은 아니지만 읽어나가다 보면 어느쪽인지 느껴진다. 이것은 어느 쪽이 좋다 그르다의 문제가 아니라, 작가의 취향과 역량을 동시에 보여주는 중요한 중심점이다.

전자의 경우, 대개는 엄청난 음모가 배후에 도사리고 있다. 그걸 알아차리게 된 주인공을위시한 캐릭터들은 어쩌구 저쩌구 이러자 저러자 자신들의 머리를 맞댈 틈도 없이 그 상황에 대항하게 된다. 이미 '주어져 있는 어떤 배경'에 의해 '자신들에게 주어진 역할'에 따라 이야기를 만들어가게 되는 것이다. 이런 이야기는 보통 스케일이 크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각 캐릭터의 마음이나 향방보다는 사건이 중요시되는 것이다. 그 캐릭터 하나가 움직인다고 대사건의 방향이 갑자기 휙 돌아설 리는 없으니까. 일반적이라고까지는 말할 수 없지만 보통 소년만화쪽에서 보이는 경향이다.
 
그럼 후자는? 보통은 소소한 일상을 그리는 작품에서 찾을 수 있다. 남녀간의 밀고 당기는 감정선만으로 제어하는 순정만화나 학원물, 옴니버스 스토리에서의 캐릭터들은 벌어진 사건에서 받는 중압감으로부터 훨씬 자유롭다. 캐릭터 중 한 명이 마음을 바꾸면 그만큼 이야기에 미치는 파급효과도 크기 때문이다. 자잘한데 마음씀이 많이 가는 순정만화 쪽에서 많이 찾을 수 있다.

그리고 당연하지만 양쪽 다 위험요소를 내포하고 있다. 전자는 세계에 치중한 나머지 인물을 잃을 수 있다. 즉, 사건을 이끌어가는데 신경을 쓰다보니 캐릭터들이 어떤 기분을 느끼고 있는지, 무슨 생각을 품고 있는지, 그 속내를 표현해주는데 소홀해지는 것이다. 하지만 그래가지고는 사건이 아무리 흥미있어도 독자들이 인물들에게 감정을 이입하는데는 걸림돌이 된다. 그래서 맨날 친구들끼리 사각관계 오각관계로 번져서, 기껏해야 연애타령으로 그들의 감정을 표현하는데 급급하다. 사랑이 가장 인간의 반응을 확실하게 보여주는 감정이기 때문일까? 후자는 캐릭터가 생명력을 유지하는 대신에 사건의 끈을 놓쳐버리기 쉽다. 얘랑 놀았다 쟤랑 놀았다 캐릭터들끼리 시시덕거리다가 어느 순간 정신을 차려보면 배경설정은 남아있는데 사건은 없다. 처음과 끝을 일관된 하나의 스토리로 이을 수가 없는 지경에 빠져버려서야 황급히 끝이라는 간판을 내거는 3류 순정들이 한두개가 아니다. 독자는 캐릭터들의 감정선 교차를 따라가며 그들이 벌이는 만담쇼를 재미있게 지켜보기는 하지만, 책장을 덮고 나면 남는 것이 없다. 아주 맘에 드는 캐릭터가 없었다면 먼지가 쌓여 잊혀져가는 스토리가 될 뿐이다.

설명이 길었지만, <나의 지구를 지켜줘>는 사건 속의 캐릭터들의 조화라는 점에 있어서는 버금가는 작품을 꼽기 힘들 정도로 뛰어난 균형을 보여준다. 초반에 등장한 주요 캐릭터들과 주변인물만으로 이렇게 아기자기한 형태로 깔끔하게 이야기를 끌어나간 것은 당시 내게 거의 기적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캐릭터들이 살아 움직인다는 느낌이 강하게 왔지만 전개방향을 크게 벗어나지도 않고 있었다.

히와타리씨의 후기에 따르면, 그녀의 캐릭터들은 가끔 전개에 반항도 하고 자신이 의도하지 않은 방향으로 가려고 움직일 때도 있다고 한다. 그럴 때 자신은 보통 그 캐릭터가 원하는대로 하도록 놔두지만, 대신 누군가를 곁에 붙여 설득시키는 식으로 돌아오게 만든다고 한다. 대표적인 장면이라면 잇세이가 삐진 나머지 시온 편에 붙겠다고 했을 때와, 아리스가 하루히코와 함께 있게 된다는 말에 겁을 먹고 도망친 때 등이 있다. 하마터면 스토리가 급회전할 뻔한 이 위기를 작가가 어떻게 빠져나갔는지, 독자라면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또 캬와 라즐로 같은 경우 본래 계획에 없던 캐릭터지만 왠지 들어갔다면서, 아마도 시온이 그런 추억을 간절히 원했기 때문이 아닐까라고도 말했다(실제로 시온이 항상 그리게 되는 안식처의 이미지는 그곳에 머물러 있다). 거의 캐릭터들의 애드립으로 처리한 장면조차 있다고 한다(다이스케와 링의 대치씬). 전체적으로는 커다란 사건이 분명 존재하지만(링의 계획) 동시에 캐릭터들은 그만의 생명력을 가지고 스스로의 감정을 느끼며 생생하게 살아 숨쉬고 있다. 물론 이 사건이라는 것이 많은 사람이 관계되어 꾸미는 음모 같은 것이 아니라 한 사람의 계획이었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컨트롤하기 쉬웠을 것이라는 것은 인정한다. 하지만 덕분에 하나의 사건이 이야기로서 완결성을 가지면서도 캐릭터들의 감정선과 행동 역시 건드리지 않은 채 성립되고 있다. 적절한 선에서 끊었다고밖에 표현할 길이 없다.

그녀는 자신과 타인의 간격을 확실히 알고 있는 작가라고 생각한다. 자신 안에 캐릭터들의 마음을 모두 담아두고 하나하나씩 열어보면서 그들의 이야기를 엮어가고 있다는 느낌이다. 물론 다른 장르도 아니고 순정만화에서 감정선을 놓치면 그 작품은 그 날로 끝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겠지만, 그렇다고 해도 대단하다. 그걸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가 캐릭터들의 전생이다.

잠깐 다른 만화의 예를 들어보자. 와타세 유우를 인기작가 반열에 올려놓은 유명작 <환상게임>. 중반부가 어찌 흘러가는지도 모르게 전개가 늘어지긴 했지만 상당히 멋진 작품이었다. 그러나 2부는 아무래도 군더더기라고밖에 생각할 수 없었다(1부에서 죽었던 캐릭터들이 유령이라곤 해도 할거 다 하며 즐기고 있는 모습을 보자니 '젠장, 내 눈물 물어내!'라고 외치고픈 심정이었다). 몰라보게 늘은 작화실력에 눈이 즐겁기는 했지만, 아무래도 뭔가가 걸려서 맘편하게 지켜보기가 힘들었다. 그 결정적인 위화감을 내 동생의 한마디가 짚어주었다.

"아무래도 유위가 유귀와 같은 인물이라는 느낌이 안 들어."

그랬다. 1부에서의 그 돈벌레 바보열혈순진소년 유귀는 어디 가고 자상하고 부드러운 미소의 어른스런 오라버니만이 남아있었던 것이다! 세일러문에서의 코우 세이야가 치바 마모루로 바꿔치기된 기분이라면 이해하려나. 작가는 후기에서 '소년이 청년으로 성장한 모습을 표현하려고 했다'라며 변명했지만 아무래도 이건 아니었다. 환생 이전 모습인 유귀가 적으로 등장하기까지 하니 더더욱 둘을 비교하게 되고 사태는 점입가경. 유귀가 유위로 성장해가는 과정이 그려졌었다면 별문제지만 그 두사람은 '전생'과 '환생'이라는 차이를 가지고 있었다. 도대체 무얼 믿고 미주가 그 둘을 같은 사람이라 단언할 수 있는가? 이 작가는 2부에서 바로 그 문제의 해결책을 제시하려고 애쓴 모양이지만.... 결과물은 설득력이 떨어졌다.

문제점은 저것이다. 환생이라고는 하지만 어디까지나 다른 사람이다. 그 사실을 표현할 수 있는가? 전생의 모습을 쫓아 사랑을 하는 것이 옳은 일인가? 전생의 기억을 가지고 있는 사람을 어떻게 전생인과 다른 인간이라고 독자에게 납득시킬 수 있는가? 하지만 히와타리 사키의 <나의 지구를 지켜줘>를 읽어나가다 보면 그 문제들은 자연스럽게 캐릭터들 사이에서 그리고 독자 안에서 녹아내린다. 진바치가 "난 아리스가 좋아"라고 하자 잇세이가 "잘해봐, 진바치! 우리들은 친구잖아?"라고 대답하는 장면에서 독자들은 무엇을 느꼈을까. "사실 엔쥬의 사랑은 이미 전생에서 끝난 거야. 네가 멋대로 그 유령에 잡혀버린 거지"라고 사쿠라가 말하는 장면에선 무엇이 느껴지는가. "모두 링 때문에 기억해낸 거야!!!"라고 울부짖던 아리스의 모습은 어떤가. "넌 이제 시온이 아니니까"라고 말하는 장면에선 눈물이 쏟아진다.

이 만화에서 계속 강조하고 있는 것 중 하나가 '아리스와 모쿠렌은 다른 인물이다,'라는 사실이다. 굳이 아리스만이 아니라 다른 여섯 명도 마찬가지다. 그들은 별개의 인격을 가지고 있는 타인이다. 하지만 그 타인의 기억이 고스란히 자신의 안에 머물러 버렸을 때, 그 사람의 자아에는 어떤 변화가 일어날 것인가? 그런 것을 누가 상상할 수 있을까. 상상할 수 없는 것을 어떻게 설득력있게 그려낼 수 있을까. 하지만 다른 사람도 아니고 캐릭터들과 대화를 나누는 작가, 히와타리 사키는 전생물의 문제점을 부드럽게 극복했다. 바로 그리움을 자아내는 원인, 추억이라는 키워드를 이용한 것이다.


전생인은 이미 죽었다. 하지만 그들의 추억이 현재에 사는 이들의 뇌리 속에 새겨져 있기에, 과거를 향한 그리움과 후회가 얽혀 있기에 다들 그것을 떨쳐내지 못하고 갈등을 일으키는 것이다. 아무것도 안했건만 죄의식을 느끼고(하루히코), 연정을 느끼고(잇세이), 책임감을 느끼고(다이스케), 복수심을 느낀다(링). 참 억울하다고 느껴질 만한 상황이지만 그래도 아이들은 잘 극복해낸다. 그리고 이것이 히와타리의 성공요인 중 하나가 아닌가 생각된다.

일곱명의 환생자들에게는 하나씩 강하게 품고 있는 추억(思い)이 있다. 사쿠라에겐 엔쥬를 향한 우정(걱정)이, 진바치에겐 모쿠렌을 향한 연심이, 그리고 아리스에겐 시온과의 사랑이 남아있다. 이렇듯 각 캐릭터들에게 하나의 중심점이 있었기에 그것을 포착해서 그들에게 목적성이 확고한 행동패턴을 부여하는 것이 가능했고, 그것에 어떻게 반응하고 움직이느냐에 따라 각자의 생명력을 얻었다. 더불어, 그 추억들은 환생자들에게 있어 인과관계가 성립되지 않기에 전생과 환생은 별개의 인격으로 존재할 수 있었다. 자신이 저질러서 온 댓가가 아니고 하늘에서 어느날 떨어진 것이나 마찬가지인 감정이기에, 독자들 역시 '과거에 존재했던 엔쥬'와 '현재를 살아가는 잇세이'를 구분하고 자칫 착각하기 쉬운 그 둘을 별개의 객체로 인식하는 것이 가능하다. 그 추억들이 차례차례 승화되면서 마침내 모두는 한덩어리가 되어, 최종문제로 남아있는 시온의 추억을 달로 떠나보내기 위해 클래이맥스로 치달아가는 것이다. 소름끼칠 정도로 정교한 구성이다. 어느 시점에서 각자의 추억이 승화되었는가를 살펴보는 것도 팬으로서 즐길 수 있는 묘미 중 하나다. 이 작품의 메시지 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추억에 얽매이지 말고 현재를 살아가야 한다'.

이 전략에서 가장 힘들게 표현된 것은 고바야시 링일 것이다. 다른 캐릭터들은 확고한 자아를 가지고 있었고, 그래서 갑작스런 추억에 휘둘리면서도 알아서들 대처했지만, 이제 7살된 링에겐 그런 대응이 불가능했다. 그는 어린데다 그렇잖아도 무거운 시온의 기억에 짓눌려서 계속 괴로워한다. 그 기억을 떨쳐버리려는 필사적인 몸부림으로서, 시온의 기억이 잠들어 있는 달기지를 날려버리려 시도했지만, 동시에 시온의 기억이 요구하는 지구 조종에도 동조한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클래이맥스로 가기까지, 정확히는 아리스가 눈치채기 전까지 독자들도 어디까지가 링이고 어디까지가 시온인지 구별하기가 힘들었을 걸로 생각된다. 7살짜리 꼬마가 애늙은이처럼 행동하는데 어떻게 그가 이전의 꼬맹이와 같은 인물임을, 시온이 아니라 링임을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있겠는가?(링의 어머니의 딜레마도 여기에 있었다) 결국 시온의 기억은 그런 식으로 해소되지 못하고 친구들의 도움으로 승화했다.

각 캐릭터에게 특정적인 추억을 부여함으로서 생명력과 사건 두 마리 토끼를 한꺼번에 잡는다... 발상만 좋은 것이 아니다. 그 방법 면으로 봐도 히와타리의 선택은 탁월했다.

키워드를 기억하는가? 일곱 명의 과학자가 가지고 있던 키워드는 단순히 달기지 작동만을 위한 것이 아니었다. 아니, 그보다 몇배는 큰 역할을 작품 내에서 하고 있었다. 그 키워드들은 전생인들의 추억을 시적으로 표현해 독자들의 뇌리에 심어주고 '그들이 어떠한 사람이었구나'라는 것을 이미지화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이다. 하이쿠에서 힌트를 얻은 걸지도 모르겠다.

 

<모쿠렌을 영원히 사랑한다>

교쿠란 : 모쿠렌을 향한 사랑

 

<오크 다코 사놀 히이라기>

히이라기 : 자기 이름(고지식하게리 항상 자기 이름을 암호로 사용했다는 점이 책임자 히

이라기답다)

 

<엔쥬를 돌보는 건 이제 질렸어>

슈스란 : 엔쥬를 향한 걱정섞인 우정(그리고 동경)

 

<교쿠란 곁에 있고 싶어>

엔쥬 : 교쿠란을 향한 연정

 

<꿈에도 그리던 낙원을 찾는다>

슈카이도 : 맘둘 곳 없는 그에게 있어 지구와 모쿠렌은 노스텔지어의 대상이었다

 

<자이 테스 시온>

모쿠렌 : 시온을 향한 애정

 

<빨리 어딘가로 돌아가고 싶어>

시온 : 고독에 지친 그의 마음을 대변(어딘가 슈카이도와 닮았다. 서로 겉모습을 바꾸어

태어났듯이 극단은 닮는 걸지도).

 

 

 

하지만 이것만으로는 부족했다고 느꼈는지, 히와타리는 전생인들의 기억 역시 스토리에 끼워넣어 캐릭터에 설득력을 더하려고 노력했다. 물론 전생인들의 이야기도 이 작품의 한 축이고 더할나위없이 중요한 부분이지만, 그래도 일단 전생의 기억은 '배경설정'에 해당되는데 좀 무리한 건 아닌가 싶다(중반부가 늘어진다는 평가를 받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그러나 그녀는 여기서도 대담한 표현기법으로 지루함을 상당부분 없애고 개개인의 생명력을 북돋았다. 바로 '서로의 시점'이다.

 
똑같은 사건을 얘기하는데도 서로의 이야기는 다 다르다. 누구나가 해본 경험이었으리라 생각한다. 사건을 비추는 각자의 기억이 다르고 받아들이는 입장이 다르기 때문이다. 견해가 일치하는 경우만큼 갈라지는 경우도 많은 것이 현실이다. 그래서 초반에 진바치와 잇세이가 옥상에서 대화하는 장면 중, "글쎄? 슈카이도는 그럴 인간이 아니라고 생각하는데" "그렇지 않아. 슈카이도가 그래봬도 교활한 놈이었어. 내가 기억하기론"이라는 대사가 나오는 데서 감탄했었다. 서로 같은 기억을 공유하고 있지만 시점이 다르다는 문 드림을 표현하는데 이보다 적절한 대사가 있을까? 이런 식으로 작게나마 시점의 차이를 암시하는 장면을 꼼꼼히 끼워넣던 히와타리는 전생의 기억파트에서 급기야 시점에 따른 장면변화를 시도한다. 모쿠렌의 첫미팅이나, 샤워소동을 상기해보면 웃음을 터뜨릴 분이 많으실지도 모른다. 다른 사람 눈에는 이렇게 비치지만 실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지 본인밖에는 모르는 것이다. 이러한 시점변화를 생각해낼 정도로 자신과 타인과의 거리를 잘 인식하고 있었기에, 캐릭터성을 그토록 잘 표현할 수 있었던 것이라고 생각한다.

또한, 이 스토리의 근본적인 시발점이라고 볼 수 있는 모쿠렌과 시온의 사랑은, 분명히 그것은 서로에 대한 애정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제대로 전해지지 못하고 일그러져 갖가지 오해를 불러일으키고 환생자들마저 휘두르는 결과를 낳았다. 두 사람 사이에 오가는 감정선은각자의 시점에서 봄으로서 더욱 확실하고 분명하게 독자들에게 전달되고, 그래서 독자들은 그들의 오해에 안절부절 못하며 끝내 모쿠렌의 사망씬에서 눈물을 쏟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그런 아픔많은 사랑일지언정 기적을 일으킬 수 있는 힘을 간직하고 있었다. 모쿠렌에게 지구가 보여준 마지막 기적... 환생이 가능한 세계관 속에서, 과거에 대한 향수와 미래를 향한 희망은 서로 얽혀서 결국 시간의 경계를 사라지게 한다. 그리하여 그들은 '미래로 돌아가서' '몇 번이고 만날 수 있는 것'이고 그렇기에 '이토록 그리운 것'이다. 모쿠렌의 마지막 메시지 역시 시적 아름다움을 간직하고 있다.  미래를 향한 그리움, 아무리 곱씹어봐도 질리지 않는 명대사라고 생각한다.

그렇게 모든 사건은 끝나고, 전생의 추억은 승화되었다. 링은 링으로, 아리스는 아리스로 살아나가는 것이다. 시온과 모쿠렌의 노스텔지어로 둘러싸인 지구에 안겨서. 시온과 모쿠렌은 죽었지만 그들의 사랑은 링과 아리스의 사랑으로 이어진다. 인간은 세대를 이어 지혜를 축적할 수 있는 유일한 종족이라 한다. 굳이 환생론을 들먹이지 않더라도, 우리는 그렇게 살아나가는 것이다.

 


"이상하군... 태어나서 단 한번도 저녁놀 따윈 본 일이 없을텐데... 왜 이런 기분이 드는 걸까? 저녁놀을 주욱 지켜봐온 선조들의 피가 내 몸 안에 흐르고 있기 때문일까?"  By 마키무라 <불새 망향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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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리프터 2006-01-31 13: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나의 지구를 지켜줘'의 열혈 팬으로서,
이렇게 좋은 리뷰는 본 바 없습니다. 잘 읽었습니다. 그리고 앞으로의 리뷰도 기대하겠습니다.

과거로의 회귀. 그리고 동시에 미래에 대한 그리움. 그것은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 모두의 갈등과 두려움과 그리고 기대감의 원인이라고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