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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과 이데올로기
토마 피케티 지음, 안준범 옮김 / 문학동네 / 202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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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보야 문제는 정치야 !

(It’s the politics, stupid.)


               토마 피케티, 자본과 이데올로기, 문학동네 


  토마 피케티의 신작 [자본과 이데올로기]를 인내심으로 완독했다. 경제 전문가가 아닌 일반 독자로서의 어려움이 다소 있었으나 끝까지 읽을 수 있었다. 그 이유는 피케티의 매력 때문이다. 우선 피케티는 명료하고 단순하게 책을 썼고, 그가 말하고자 하는 논제를 정확한 통계와 수치, 역사를 통해 전개하기에 흥미진진했다. 


  피케티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분명하다. 현재의 세상은 경제적으로 불평등하다. 이러한 불평등의 세상이 된 이유는 정치적 합의에 따른 것이다. 우리는 불평등한 세상을 변화 시켜야 하며 그것은 깨어있는 지식인과 시민들의 연대와 적극적 정치참여(선거)다. 우리는 이러한 노력을 통해 보다 평등한 세상으로 바꿔갈 수 있다. 


1. 우선 피케티가 제시하는 불평등의 역사를 생각해보자. 피케티는 프랑스에서의 앙시앙레짐, 즉 프랑스 혁명 전의 구 체제에서 시작한다. 피케티는 그 시대를 삼원사회라 규정한다. 즉 사제, 귀족, 제3신분으로 구성된 사회란 뜻이다. 시대별 변화의 추이는 있으나, 사제와 귀족은 전 인구의 3%정도였고, 나머지 97%는 노동자와 상인 등이다. 문제는 인구의 3%에 불과하는 전자가 국민소득의 총 50% 이상을 소유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피케티는 이것은 불평등이라 말한다. 


  그런데 이러한 불평등 체계가 별 저항 없이 존재하게 된 이유는, 이데올로기 즉 당시 종교와 정치가 주입한 생각들 때문이다. 사제와 귀족은 태어날 때부터 구별되었고, 나라 전체의 안보와 유지를 책임지고 있기 때문에 그들이 이에 합당한 보상을 받는 것이라는 이데올로기 때문이다. 이러한 생각에 별 이의가 없었다. 당연히 그들은 소득세, 상속세를 거의 내지 않았다.(약 1%)


2. 프랑스 혁명은 이러한 구조에 대한 반동이다. 이러한 불평등한 세상을 바로잡고자 하는 이데올로기의 전환이자 경제적 평등을 향한 시민의 운동이었다. 혁명에 성공한 자들은 무엇보다 우선적으로 사제와 귀족 계급의 재산을 몰수하고, 그들의 사법권을 박탈했다. 중앙집권적인 국가를 건설하고자 했고, 국가가 그 역할을 할 터였다. 그러나 혁명의 주체들은 준비가 되어있지 않았기에 우물쭈물했고, 곧 이어 공화정, 나폴레옹 체제의 군주정으로 후퇴하게 되었다. 


  새로운 정치 혁명으로 인해, 과거 사제, 귀족 계급은 신 부르주아 계급으로 탈바꿈했고, 조세 제도가 명확히 마련되지 않는 어수선한 상황에서 이들은 신흥 자산가들로 등장했다. 마침 산업혁명과 식민지 정복이라는 시대적 변화로 인해 막대한 자산이 몰렸고, 이러한 결과는 오히려 더욱 더 소유의 불평등 구조를 낳았다. 프랑스인들이 좋은 시대라 하는 ‘벨 에포크’는 실제로는 불평등이 더욱 심화되었던 시대다. 


3. 19세기 전반에 걸쳐 유럽 대륙이 부를 축적한 이유는 다양하다. 우선 산업혁명이라는 경제 혁명으로 신흥 자산가들이 출현했고, 막강한 군사력으로 해외 식민지 건설을 했다. 영국, 프랑스, 네덜란드 등은 아프리카, 아시아, 중남미 식민지들로부터 막대한 금, 은, 각종 재화를 수탈했다. 이는 또한 식민지의 흑인 노예를 이용한 노동력 착취라는 배경이 뒷받침했다. 이들은 값싼 노동력으로 각종 재화(면화, 목재 등)를 유럽으로 가져갔고, 이를 재가공하여 식민지와 아시아 국가들에 되 팔았다. 또한 인도, 중국, 인도차이나 반도 등의 아시아권 식민지에서 동인도회사 등을 통해 불평등 무역조약을 맺어 막대한 부를 축적했다. 


  피케티는 19세기-20세기 초 유럽의 막대한 자산과 부는 불합리하고 불평등한 식민지 정책과 노예 소유로 인해 획득한 것임을 주장한다. 


4. 19세기 중 후반 영국, 미국, 프랑스 등지에서 노예 해방이 이루어졌다. 노예무역 철폐와 노예들의 자유를 보장했다. 그러나 피케티가 관찰한 바에 의하면, 어느 나라에서도 노예들에 대한 보상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오히려 노예 소유주들에게 국가가 국채를 발행해서 거대한 보상을 실시하였다. 이러한 결과로 과거 노예 소유주들은 막대한 부를 획득함과 동시에 자립이 안 되었던 노예들을 다시 자발적 노예 노동자로 끌어들일 수 있었다. 


 프랑스는 아이티의 정치적 해방을 약속했으나 실제로 당시 국민소득의 300%에 달하는 배상액을 요구하였기에, 아이티는 또다시 경제적 예속 관계로 들어갈 수 밖에 없었다. 이에 반해 아이티의 노예소유주들은 인접한 쿠바 등지로 옮겨 그들의 자산을 유지할 수 있었고, 경제 보복(국경 봉쇄) 등을 통해 아이티를 압박했다. 


5. 변화의 도화선은 20세기 초, 중반에 일어났다. 불평등의 증가에 대한 불만이 유럽에서 공산주의, 사민주의 형태의 이데올로기 운동으로 일어났고, 무엇보다 민족주의의 과도한 성장은 전쟁이라는 결과를 낳았다. 세계 1차 대전의 포화 속에 자산가들의 자산은 추락했고, 이어 1930년대의 세계 공황, 이어진 세계 2차 대전으로 인해 자산 추락은 불가피했다. 


  우선 전쟁 물자 조달을 위한 국채발행이 불가피했고, 자산가들은 국가를 위해 반강제적으로 해외 자산을 매각함으로 국채를 사들여야 했다. 또한 이 시기 국가는 기간산업을 국유화했다. 미국은 대공황을 극복하기 위해 뉴딜정책을 실행했고, 역시 막대한 국채 발행, 이것을 감당하기 위한 불가피한 증세가 이어졌다. 


  유럽과 미국에서 공히 소득에 대한 누진세가 실행되었고, 상속분에 대한 누진세가 신설되었다. 소득구간에 따라, 상위 10%의 고소득자에게 60-70%의 세금이 부과되었고, 이러한 세금으로 국가의 재건, 교육 투자, 연금, 보건 등의 국가 정책을 실시하였다. 따라서 전후 1950-1980년대의 유럽과 미국은 불평등의 수치가 역사적으로 가장 낮았다. 


  피케티는 이러한 변화의 동력의 이유를 시민들의 적극적 정치 참여를 들었다. 무엇보다 선거권의 확대가 이러한 정책을 유도했다는 것이다. 세계대전 전의 국가들에서 선거권은 부유한 자산가들과 귀족들에게만 있었다. 그러나 양차 대전 후 선거권은 모두에게 주어졌고, 이들은 자신들의 이익을 대변하는 사민당, 노동당, 민주당에 표를 던졌다. 


6. 1980년대 이후 전반적이고 급격한 변화의 흐름이 다가왔다. 미국의 레이건, 영국의 대처를 중심으로 하는 보수의 반격이 시작되었다. 레이건의 공화당, 대처의 보수당은 우선 기업의 법인세를 인하했다. 그리고 국가 소유의 기업들을 민간에 매각했다. 또한 소위 신자유주의 정책을 받아들여 금융에 대한 제재를 완화했고, 국가 간 자본의 이동을 자유롭게 하는 정책을 주도했다. 


  때마침 과거 공산주의 국가들의 연쇄적 붕괴가 이어졌고, 탄력을 받은 영미의 정치지도자들은 자신들의 정책을 보란 듯 관철시켰다. 


  이로 인한 결과는 주지하듯, 역사상 유래 없는 불평등 구조를 낳았다. 전 세계 자산의 50% 이상을 부유한 1%가 소유하는 현실이다. 


  금융자본주의의 발달과 소위 닷 컴 기업의 등장으로 슈퍼 부자들(억만장자)이 등장했고, 각 기업들의 CEO의 연봉은 치솟았다. 한국의 대기업 총수들의 연봉은 많게는 200억, 작게는 50억에 이른다. 이는 대졸 신입사원 연봉의 700배에서 150배에 이르는 액수다. 물론 워렌 버핏 같은 투자계의 슈퍼 리치들도 등장하여 억만장자들의 자산은 헤아릴 수 없을 정도다. 


7. 피케티가 말하는 핵심 논증은 이러하다. 이들 슈퍼 부자들이 등장한 이면에, 정치적 함의가 있다는 것이다. 무엇보다 이들을 옹호하는 성공 이데올로기가 존재한다. 이들은 성공의 아이콘, 신화로 등장하면서 자신들의 부를 부러움의 대상으로 만든다. 


  피케티는 이것은 잘못이라고 주장한다. 닷 컴 기업들의 고도성장은 자신들만의 아이디어나 노력이 아니라, 국가의 체계적이고 지속적인 지원과 특혜 속에 이루어졌다. 따라서 이들의 소득에 대해 강력한 누진세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아울러, 기업의 슈퍼 연봉도 철저히 1인 1주의 의결권으로 인한 결과임을 자각해야 한다. 자신들이 자신들의 연봉을 책정하고 이를 당연시한다. 피케티는 이것은 잘못이라고 말한다. 기업들의 성장 배경에도 분명히 국가의 지원, 세제 혜택, 무엇보다 수많은 노동자들의 노력, 그리고 국민들의 구매가 있어 가능했기에 이는 부당하다는 것이다. 누진세를 통한 사회 환원을 피케티가 주장하는 이유다. 


8. 피케티는 1980년 이후의 역전 현상에 대한 중요한 변수로 고학력자들의 등장을 말한다. 피케티는 이를 브라만 좌파라 칭한다. 즉, 고학력을 바탕으로 과거 노동자의 정당인 미국의 민주당, 영국의 노동당을 장악한 이들은 자신들도 상당한 신흥 자산가가 되었기에, 당연히 자신들에게 손해가 되는 정책들을 펴지 않는다. 그들은 이제 노동자들이 아니라, 자신들과 소위 상인 우파(자산가)의 대변인이 되었다. 이로 인한 결과는 정치 불신이며 낮은 투표율이다. 물론 이러한 결과로 그들은 계속해서 자신들의 이해관계를 대변하는 정당으로 존속한다. 


 (한국의 상황도 동일하다고 여겨진다. 미래통합당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더불어민주당의 구성원들도 대부분 피케티가 말하는 고학력자들, 기득권자들로 구성되어 있다. 대부분 부동산 및 금융 자산을 소유한 이들이 조세 개혁이나 부동산 개혁 정책들을 제대로 펼 리 만무하다. 이래저래 정치 불신만이 쌓여간다.)


9. 피케티는 자산 축적의 편법적 도구인 역외 탈세 및 조세피난처에 대한 국제적 대응을 강력하게 촉구한다. 러시아, 중국, 중동 국가들의 조세피난처로의 자산 이탈은 천문학적이다. 국제조세정의 단체의 폭로에 의하면 러시아의 조세피난처에 감추어진 자산은 1000조가 넘는다. 과거 오바마 대통령의 강력한 요구에 의한 스위스 은행의 미국 자산 회귀를 예로 들면서 피케티는 국제적 공조만 있다면 이러한 역외 탈세의 징수 및 환원은 가능하다고 말한다. 문제는 정치적 이해관계다. 


10. 피케티는 이러한 현 상황을 개선하기 위해 몇 가지 정책들을 주문한다. 우선, 자산과 소득에 대한 누진세다. 소득 구간별로 차등을 두는 누진세야말로 사회정의를 위한 첫걸음이다. 이러한 것도 역시 이데올로기 싸움이다. 능력주의 이데올로기 신봉자들은 자기가 쌓아올린 소득에 대한 조세는 불가능하다고 항변한다. 반대로 그들의 고소득 구조는 국민들의 구매와 국가의 지원 하에 이루어진 것이기에 일정 부분 국가에 환원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하면 불가능한 것이 아니다. 


  피케티가 주장하는 두 번째 해법은, 참여사회주의 형태의 정치구조다. 이는 공산주의와 자본주의의 단점을 보완할 수 있는 정치형태다. 북유럽 국가들, 스웨덴, 덴마크, 벨기에 등이 시도하는 정치구조다. 정치에 대한 시민들의 적극적 참여와 조세제도의 변화다. 물론 누진세의 수입원은 교육, 의료, 연금, 주거에 쓰이도록 해야 한다. 이러한 기본재화가 보장되는 국가가 정의롭다. 


  피케티의 세 번째 해법은, 이러한 정책들을 시행하기 위한 국제적 공조다. 무엇보다 역외 탈세 및 조세회피 등을 막기 위한 글로벌 세제의 규격화를 주장한다. 개 국가의 이익을 위한 세제 혜택 정책 등을 막자는 것이다. 이를 위해 국제적인 투명한 정보 교환이 필요하다. 


11. 피케티의 마지막 말처럼, 이러한 시도가 성공할지 아닐지는 확실하게 전망할 수는 없다. 그러나 결국 역사는 가보지 않은 길에 대한 선택이었고, 가장 합리적인 최선을 선택하는 것 아니겠는가? 무엇보다 경제는 단순히 경제의 문제가 아니라 정치의 문제이며, 이데올로기의 문제, 즉 생각의 문제다. 우리가 생각을 바꾸고 적극적으로 참여하면 제도는 바뀔 것이며 사회는 정의를 향해 나아갈 것이다. 21세기 정치 민주화를 넘어 경제 민주화를 향해 깨어있는 시민들의 연대와 적극적 참여를 기대한다. 우리가 원하면 세상은 바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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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예언서 어떻게 읽을 것인가 3 - 스바냐, 학개, 스가랴, 말라기 어떻게 읽을 것인가 (성서유니온선교회)
김근주 지음 / 성서유니온선교회 / 201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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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다리던 김근주 교수님의 책이 나왔기에 묻지도 않고 주문했다. 그것은 아마 전작에 대한 신뢰가 있기 때문일테다. 김근주 교수님의 [특강 예레미야]를 집어 들고 멈출 수가 없었다. 우선 풍부한 배경지식, 본문에 대한 정확한 주석, 그리고 우리 시대에 접목할 적용이었다. 무엇보다 행간에서 읽혀지는 교수님의 열정이었다. 그 열정은 살아 움직였고 예레미야 못지 않은 묵직함으로 다가왔었다. 


  그가 쓴 소예언서 시리즈 1,2 편을 집어 들고 역시 손을 뗄 수 없었다. 무엇보다 접근성이 약하고 평소 잘 들어보지 못한, 읽어보지 못한 소 예언서라서 더욱 기쁨은 컸다. 이렇게 풀어낼 수 있구나, 이렇게 열정적으로 강의할 수 있구나, 그리고 이렇게 정확하게 우리 시대에 적용할 수 있구나. 


  이번에 받아 든 소예언서 3은 후기 예언자들의 글이라 더욱 반가왔다. 스바냐, 학개, 스가랴, 말라기, 포로기 후 선지자들이다. 바벨론 포로를 경험했고, 귀환을 경험했던 예언자들이다. 그들이 겪었을 격동의 시대가 고스란히 담겨져 있다. 선조들의 실패로 인한 절망, 귀환이라는 흥분, 그리고 감내해야 했던 처절한 현실이 다가온다. 부푼 꿈을 안고 귀향한 그들이 감당해야 했던 영적 현실, 성전 건축이라는 거대한 부담감, 식어버린 가슴에 다시 지펴야 할 영적 열정, 그리고 메시야 대망, 하나라도 만만한 것이 없다. 그러나 그 시대를 이들은 살아갔고 자신들의 몫을 다 했다. 


  김근주 교수님의 이 책은, 우선 각 예언서들의 시대적 배경, 예언자들에 대한 정보, 그리고 개요를 풀어내주고 있어 시대 이해를 정확히 할 수 있다. 그리고 이어지는 각 구절에 대한 주해, 원어의 의미를 살려내면서 동시에 각 구절의 의미를 풀어내고 있어 아주 유익하다. 또한 김근주 교수님의 장기이자 특징인 오늘을 위한 구체적 적용이 따르고 있어, 마치 오늘 우리 시대를 위한 예언자들의 활동인 듯 하다. 


  스바냐, 학개, 스가랴, 말라기를 풀어내고 있지만, 그 시대에 국한 된 사문서가 아니라 오늘 우리 시대에 펄떡이는 살아있는 목소리로 다가온다. 그런 의미에서 저자는 마치 예언자들이 다시 살아나 부르짖는 것이라 할 만하다. 


  특히 학개서의 해석처럼, 경건하고 은혜로운 수동태 동사와 같이 되어 버린 오늘 우리시대의 성도들에게 하나님의 살아있고 능동적인 동사가 되기를 원하는 가르침은 묵직하다. 오랜 절망, 손을 놓아버리고 마음을 놓아버린 시대를 향한 부르짖음은 그 때에나 지금이나 일반이다. 편벽한 집을 짓는 반면 성전 공사는 손 놓아 버린 현실은 아파트 공화국의 영적 탈진을 보여주고 있어 안타깝다. 


  그러나 당시에 학개를 불러 깨우친 하나님이 오늘 우리의 하나님이시기에 소망을 가져본다. 영적 무관심의 시대, 하나님의 나라보다 자기 일신이 더욱 중요하게 여겨지는 시대, 다시 소 예언서가 울려 퍼지길, 우리가 이 예언서들에 반응하기를, 그리하여 하나님의 나라를 대망하고 다시 부흥의 시대를 열 수 있기를 갈망한다. 그러한 열망을 가진 이들이 반드시 읽어야 할, 그리고 설교해야 할 책이다. 이 책의 사람들이 되기를, 이 책을 통해 소예언서의 깊이를 깨닫게 되기를 소망한다. 아울러 그 시대를 다시 살아내기를 간절히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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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의 두 지평 - 에른스트 블로흐와 위르겐 몰트만의 희망사상
이종인 지음 / 박영사 / 201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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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 무엇을 희망하는가?


  이종인, 희망의 두 지평, 박영사를 읽고 


  2018년 무술년이 시작되었습니다. 여러분은 올 한 해 어떤 희망을 가지고 있습니까? 진급? 연봉 인상? 경기 전망이나 지표는 우리에게 무엇을 말해 주고 있습니까? 과연 희망이 있습니까? 무엇인가 우리로 하여금 희망적이게 할 만 한 근거가 있습니까? 아니면 또 다시 암울한 절망 속에서 하루 하루를 버텨야 합니까? 희망을 이야기 하든, 절망을 이야기 하든 우리 안에는 지금의 상태보다 더 나아지려는 희망이 있습니다. 


  1. 희망의 본질 (철학적)


  사실 희망이라는 것은 본질상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그 예전 프로메테우스가 인간에게 불을 전해주고, 판도라의 상자를 열어젖혔을 때 온갖 절망이 이 세상에 다 나왔으나 마지막 남은 것이 희망이라고 합니다. 말인즉 희망이라는 것은 본질상 갇혀 있는 것이란 말입니다. 아울러 희망하는 것이 우리에게 주어졌을 때 그 대상은 이미 희망할 수 없기에 희망은 본질 상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양귀자의 소설 제목처럼, 나는 소망한다 내게 금지된 것을,, 어쩌면 소망하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에, 우리 안에 없기 때문에 역설적으로 가능한 것인지도 모릅니다. 


  일찍이 플라톤이나 토마스 무어 같은 사상가들이 ‘유토피아’를 꿈꾸었습니다. 그러나 유토피아라는 말 자체가 그리스어 ou + topos 로 이루어졌기에 이 세상에 없는 장소가 곧 유토피아입니다. 없기에 한 없이 희망하고 꿈 꿀 수 있는 것이 곧 유토피아의 특징이기도 합니다. 


  전후 희망의 철학자라 불리는 에른스트 블로흐는 “인간은 불합리한 것을 개선하기 위해 희망이 필요하고, 희망하는 한 현재의 불합리성을 인지하며, 그것을 개선하기 위해 노력한다. 희망하는 것은 미래적 막연한 시점이 아니라 현재의 절망을 극복하려는 의지다.”라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희망하는 사람은 현재에 만족하지 않고, 현재의 상황을 더 낫게 개선하려고 애쓴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블로흐의 희망은 한계가 있습니다. 만약 A라는 사람과 B라는 사람이 동일한 어떤 것을 희망하고 그 희망하는 것을 이루기 위해 애쓴다면 불가피하게 A와 B 는 경쟁 관계에 있으며 심지어 적대 관계에 있기 마련입니다. 결국 희망하는 것이 제한적일 때, 경쟁에서 혹은 블로흐의 용어를 빌리자면 투쟁에서 이긴 사람만이 소유하게 되고, 그 말은 반대의 사람은 또 다른 절망에 빠져버리게 됩니다. 이것이 세상적 희망이 가지는 구조적 한계입니다. 모두 임원을 희망하지만 소수만이 그 희망을 이룰 수 있고, 상당수는 이루지 못한 희망으로 인해 상대적 절망에 이르게 된다는 뜻입니다. 블로흐가 말하는 희망은 본질적으로 구조적 한계에 이르게 됩니다. 또한 블로흐의 희망은 결론이 모호합니다. 완전한 희망이든지 완전한 절망이든지 둘 중 하나라고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그의 희망은 오히려 불안합니다. 


2. 희망의 본질 (신학적)


  블로흐와 달리 희망의 신학자 몰트만은 기독교야 말로 희망의 종교며 우리의 믿음은 희망과 직결된다고 말합니다. 그는 우선 우리가 믿는 하나님이 희망의 하나님이라고 가르칩니다. 하나님은 무에서 유를 창조하셨고, 창조한 세계가 진보해 나가도록 설계하셨습니다. 태초에 창조된 세계는 종말을 향하여 나아가고 있고, 종말은 창조의 온전한 회복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그리고 그 분이 창조한 세상과 인간은 본질적으로 희망을 담지하고 있습니다. 더 나은 세상으로 회복되어 가는 것이 그 분의 뜻이며, 우리도 그 분의 형상으로 온전하게 변화되어 가는 것이 그 분의 뜻이므로 우리는 이러한 희망을 가지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희망은 두 가지입니다. 하나님의 창조 세계가 온전히 회복되어 지는 것이며, 우리 자신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온전히 회복되어 지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희망입니다. 


  우리가 가진 이 희망은 하나님의 역사 개입으로 입증된 것입니다. 구체적으로 애굽의 노예였던 이스라엘, 절망의 포로였던 그들에게 느닷없이 임한 구원은 희망의 확실한 증거입니다. 희망할 수 없었던 그들이 희망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애굽의 노예였던 그들이 출애굽하여 가나안 이라는 약속의 땅을 희망하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언약, 약속에 근거합니다. 물론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이 약속, 희망을 실현해 내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의 말처럼, 피조물이 고대하는 것은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3. 우리의 희망 예수 – 십자가와 부활 


  출애굽을 넘어서 하나님이 희망을 온전히 드러내신 사건은 십자가와 부활입니다. 십자가는 사실 절망 그 자체이며 죽음 그 자체입니다. 모든 것이 끝나 버렸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죽임을 당했고 제자들은 모든 흐망을 상실한 채 도망 가 버렸습니다. 그러나 3일 후 하나님은 죽음의 권세에서 예수님을 다시 살리셨고, 부활은 죽음을 극복함으로 희망이 주효하다는 것을 증명해 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절망의 극복이자 희망의 근거가 되었습니다. 또한 예수의 부활은 부활의 첫 열매로써 우리도 장차 부활할 것임을 약속하는 근거가 됩니다. 하나님이 역사라는 시공간에서 죽음, 최악의 절망을 물리치시고 최고의 희망을 증명해 내셨습니다. 부활은 희망의 극치이며 완전함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희망은 이 세상에서의 무엇인가 더 나은 삶이 아니라, 완전히 새롭게 찾아오는 삶, 변화된 삶을 기대하게 합니다. 우리의 관심을 이 세상에서 저 세상으로, 땅에서 하늘로 옮겨놓습니다. 


  몰론 우리의 이 희망은 극단적 종말주의자들의 주장처럼 이 세상의 모든 관심을 외면한 채 살아가는 것을 말하지 않습니다. 모든 것을 포기하고 살아가는 것이 아닙니다. 부활하신 주님은 말씀하시기를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라고 하셨습니다. 그 분이 왕의 왕이요 주의 주가 되셨습니다. 죽음에서 일어나시고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습니다. 하나님은 그 분에게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셨고 가장 존귀한 분으로 삼으셨습니다. 물론 우리는 그 분의 신실한 제자들로써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예수를 주로 삼아 그 분의 발 앞에 엎드릴 것을 위해 살아갑니다. 우리의 희망은 우리의 주님이 온 세상에서 높임을 받고 장차 온 세상이 그 분의 뜻대로 회복되는 것입니다. 


  희망이 본질상 없는 것이기에 더욱 희망하며, 그러하기에 희망하는 자는 현재의 삶을 개선하고자 한다면, 우리의 개인적 희망에서 하나님 나라의 원대한 희망을 꿈꾸며, 오늘 우리 삶에서 하나님 나라를 욕망하는 것이 희망의 두 지평, 아니 한 지평일 것입니다. 그대, 이러한 희망을 가질 수 있기를 바랍니다. 


p.s. 이종인 박사의 희망의 두 지평을 읽고 쓴 서평입니다. 이렇게 좋은 책을 집필해 주신 이종인 박사께 감사드리고, 아울러 이 책을 통해 에른스트 블로흐와 위르겐  몰트만의 세계로 들어갈 수 있게 되어 감사하고, 독자들은 이 책을 통해 더 깊은 학문적 의미로 갈 수 있으리라 확신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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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BC 신명기 UBC
크리스토퍼 라이트 지음, 전의우 옮김 / 성서유니온선교회 / 201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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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명기가 이렇게 재밌는 책이었는가?

크리스토퍼 라이트, 신명기 주석을 읽고 


김양현 


 설교자로서 늘 가지게 되는 고민은 본문을 정확히 해석하고 전달하는 것이다. 설교자로서 늘 부담을 가지는 부분이다. 나의 지식적 한계, 혹 성경에 대한 오독으로 인해 성경 본문을 엉터리로 가르치면 안 되지 않겠는가? 그래서 주석을 찾아 읽는다. 주석이라고 불리는 이 독특한 책들은 당연 신학적 안목을 가진 전문가들이 집필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구약 혹은 신약을 전문적으로 연구하고 공부한 대가들이다. 원어를 읽어내고 그 뜻을 밝혀내는 사람들이다. 그래서 그들에게 의존하기 마련이다. 


  문제는 대부분의 주석서들이 딱딱하고 애매모호하다는 점에 있다. 원문의 뜻을 밝히는 것은 좋은데 어떤 때는 도무지 마음에 와 닿지 않는다. 때로는 주석으로 인해 더 헷갈리고 무엇을 선택하고 어떻게 전달해야 할지 오리무중에 빠지기 십상이다. 한 마디로 주석은 꼭 필요하지만 아이러니하게 잘 읽혀지지 않았다. 가독성이 없다. 혹 메마른 원어 분석이나 신학자들의 옥상옥 같은 논쟁에 빠져 더 헤어나오지 못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런 기우를 크리스토퍼 라이트는 말끔히 해결해 주었다. 책 서문을 읽을 때 ‘이것이다’라고 탁자를 치게 된다. 우선 라이트는 서문에서 신명기의 신학적 의미, 주제, 위치를 깔끔하게 제시해 준다. 그가 말하는 신명기는 한 마디로 ‘경계의 책’이다. 신명기를 받아 든 원 독자 이스라엘은 경계에 서 있다. 모압평지와 가나안의 경계에 서 있다. 구 세대(흔히 출애굽 세대라 불리는)와 신 세대(광야에서 태어난 세대)의 경계에 서 있고, 하나님과 이방 문화의 경계에 서 있다. 그 경계에서 어떻게 행하여야 하면 어떻게 살아야 하는 지 지침을 주는 책이 바로 신명기라는 뜻이다. 저자의 이 탁월한 혜안은 그 당시 이스라엘 뿐 아니라 지금 우리에게도 유익하다. 


  경계에 서 있기 때문에 자연스레 신명기는 선교적이다. 신명기가 아브라함의 원 축복의 연장선이라고 볼 때 당연히 그들은 이방의 모범이 되고 이방을 비추는 빛이 되어야 마땅하다. 신명기를 읽고 묵상하고 체화할 때 그들은 이방을 향한, 이방을 위한 민족의 정체성을 유지할 수 있게 된다. 신명기의 체화 여부가 이 위대한 사명의 성패를 가른다. 선교적 사명을 감당해야 할 이스라엘은 유일신이신 야훼만을 섬기는  데 있어서 배타적 헌신을 해야 하며(우상과 야훼는 공존할 수 없다.) 야훼의 법을 전달하는 데 있어서는 사랑과 포용이다. 그러므로 경계의 책이다. 


[이스라엘의 선교/사명은 민족들에게 모델이 되는 것이었다. 선교는 가기(going)의 문제가 아니라 되기(being)의 문제였다. 그들 자신이 되고, 민족들 앞에서 야훼 하나님의 백성으로 사는 것이었다.]


  아울러 라이트가 이 명료한 주석에서 지속적으로 강조하는 것은 이스라엘이 야훼의 민족, 국가로서 제 위치를 감당하는 것이다. 곧 야훼가 바라는 공의와 정의가 살아있는 나라를 세워가는 것이다. 그것은 곧 사회적 평등이요 공존하는 사회다. 구체적으로 고아와 과부, 나그네 등 가난한 자들을 형제로 여기고 함께 살아가는 사회다. 그러므로 신명기는 사회적이고 경제적 아젠다도 강조한다. 그들이 살았던 과거의 애굽이나 현재 들어갈 가나안의 사람들은 이런 나라가 아니다. 절대군주의 강력한 통치, 억압, 착취, 그로 인한 비윤리, 불의가 가득하다. 이러한 것이 야훼의 심판의 이유였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은(그리고 지금 그리스도인들은) 세속 법이 아니라 야훼의 법을 따라야 마땅하다. 


[이 율법의 동기는 신학적 원칙과 경제적 사실에서 비롯된다... 신학적 원칙은, 애굽에서 ‘히브리들’이었고 야훼의 해방을 경험한 이들은 자신들 중에 있는 ‘히브리들’에게 자유를 주길 주저해서는 안된다...경제적 원칙은, 주인이 정기적으로 일꾼을 고용했을 때에 비해 훨씬 낮은 비용으로 종의 노동력을 통해 이익을 얻었기 때문이다.]


 폐일언하고 크리스토퍼 라이트의 신명기는 은혜스러운 주석이며 무엇보다 잘 읽혀지는 책이다.(이 부분에서는 역자의 노고를 잊지 말아야 한다. 역자의 번역 또한 칭찬 받아 마땅하다.) 감동적이며 통찰력을 준다. 저자의 선교사로서의 삶이 곳곳에 베여있거니와 그렇다고 신학적 통찰이 약하지도 않다. 두 마리 토끼를 잡은 셈이다. 그러므로 신명기를 더 잘 이해하고 읽기 원하는 독자들에게 이 책을 꼭 권하고 싶다. 연말이라는 시의적절한 상황이 더욱 이 책을 가치 있게 한다. 신명기의 핵심 주제가 다름 아닌 ‘기억하고 (광야를) 기대하라(가나안을)’기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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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하밥집 - 따뜻한 한 끼, 새로운 삶의 디딤돌
김현일 지음 / 죠이북스 / 201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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먹고 기도하고 사랑하라

김현일, 바하밥집을 읽고

 

태초에 하나님은 자신의 형상으로 만드신 사람을 에덴에 두시고 마음껏 먹으라 하셨다. “동산 나무의 모든 실과는 네가 임의로 먹되그렇다. 하나님은 인간이 마음껏 먹도록 하셨다. 물론 하나님이 유일하게 금지한 것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으므로 인간은 실낙원했고, 그 결과는 고된 노동으로 먹고 살아야 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금단의 열매를 원한 인간의 탐심은 곧 먹고 사는 것에 나타났는데, 먹을 만큼만 먹는 게 아니라 먹고 남을 잉여에 대한 탐심으로 드러났다. 사람들은 더 먹기 위해, 더 쉽게 먹기 위해 타인의 것을 빼앗거나, 타인을 강제로 노동하게 하는 식으로 변질되었다. 이집트의 왕 파라오는 나일 강 유역의 풍요로운 삼각지에서 생산되는 식량을 더 저장하기 위해 국고성을 지으려 했고, 그 일에 이스라엘 사람들을 강제로 동원했다. 탐욕이다.

 

하나님은 이러한 불평등의 세상을 원치 않으셨다. 하나님은 약자의 편에 서시고, 배고픈 자의 편에 서신다. 하나님은 열 가지 재앙으로 이집트의 탐욕을 심판하시고 자기 백성을 광야로 인도하셨다. 그리고 광야에서 자기 백성을 먹이셨다. 광야 음식의 특징은 먹을 만큼 공평하게 로 드러난다. 탐욕을 버리고 절제와 만족을 훈련시키신다.

 

한참 후 세상에 오신 하나님이신 예수는 역시 자기 백성을 먹이셨다. 자기 백성이 먹지 못함을 보시고 불쌍히 여기셨다. 예수는 한 어린 아이가 가진 적은 음식을 축사하시고 나누셨다. 그러자 말 그대로 놀라운 오병이어의 기적이 일어났다. 예수는 제자들에게 너희가 먹을 것을 나눠주라 하셨다. 예수는 십자가 전 날 마지막 식사를 하셨다. 그리고 부활 후에도 먹을 것을 달라고 하셨다. 이 후 기독교 공동체의 특징은 공동식사로 드러난다. 초기 교회의 특징은 함께 먹고, 함께 기도하는 것으로 자신의 사랑을 드러냈다.

 

근대를 지나 현대를 거치면서 먹고 먹이는 기독교 사역은 점점 그 모습을 감추게 되었다. 빠르게 성장한 외식업과 호텔업의 영향도 한 몫 한다. 이제 누구를 집에서 대접하는 것은 귀찮고 번거롭게 되었다. 우리는 불편하다는 이유로 핵심 전통을 잃어버렸다. 함께 하나님의 임재도 잃어버린다. 히브리서 기자의 말처럼 사람을 대접하는 것은 곧 하나님을 대접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세상에 김현일 대표의 바하밥집은 우리의 심금을 울린다. 단순하게 시작한 밥 사역, 김현일 대표의 눈에 노숙자가 보였고 라면 몇 개로 먹이기 시작했다. 점점 자리를 갖춰가며 이제 제법 많은 사람을 먹인다. 물론 그의 말처럼 김 대표는 밥만 먹이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임재를 경험한다. 자신에게 오는 사람들을 예수님의 손님으로 대한다. 예수님이 차려주시는 밥상으로 늘 생각한다. 그는 한국의 도로시 데이다. “저기 예수님이 누워계신다. 노숙자를 먹이고 입히는 것은 곧 예수님을 먹이고 입히는 것이다.”

 

김현일 대표의 [바하밥집]은 이 두 가지 기독교 전통을 이어가는 현장이다. 사람을 예수처럼 대하는 것, 그럼으로 밥의 현장을 예배의 현장으로 승화시키는 것. 오늘 우리가 잃어버리고 살아가는 오래된 미래다.

 

저는 예수님을 믿는 것을 넘어 예수님처럼 살고 싶거든요.”(108p) “저는 밥집에서 하는 일이 깊이를 알 수 없는 잔에 사랑과 돈을 쏟아붇는 것이라고 생각해요. 깊이를 알 수 없으니 마지막이 언제일지는 몰라요. 그건 하나님만이 아실거에요.”(115p) “제가 생각하는 하나님 나라의 정의는 justice가 아니라 fair에 가까워요.”(213p)

 

그의 고백을 듣고 있자니, 바하밥집이야말로 우리가 잊고 살아가는 하나님 나라의 생생한 보고서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바로 그 일, 같이 먹고, 기도하고 사랑하는 곳, 그 곳이 바로 하나님 나라가 아니고 무엇일까?

 

오늘 문득 바하밥집에 가고 싶어진다. 거기 하나님이 계신 곳, 예수님이 차려주신 식탁의 주인공으로 대접받고 싶어진다. 그 밥 한 그릇 먹고 나면 아마 평생 나도 갚아나가야 하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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