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망의 두 지평 - 에른스트 블로흐와 위르겐 몰트만의 희망사상
이종인 지음 / 박영사 / 201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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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 무엇을 희망하는가?


  이종인, 희망의 두 지평, 박영사를 읽고 


  2018년 무술년이 시작되었습니다. 여러분은 올 한 해 어떤 희망을 가지고 있습니까? 진급? 연봉 인상? 경기 전망이나 지표는 우리에게 무엇을 말해 주고 있습니까? 과연 희망이 있습니까? 무엇인가 우리로 하여금 희망적이게 할 만 한 근거가 있습니까? 아니면 또 다시 암울한 절망 속에서 하루 하루를 버텨야 합니까? 희망을 이야기 하든, 절망을 이야기 하든 우리 안에는 지금의 상태보다 더 나아지려는 희망이 있습니다. 


  1. 희망의 본질 (철학적)


  사실 희망이라는 것은 본질상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그 예전 프로메테우스가 인간에게 불을 전해주고, 판도라의 상자를 열어젖혔을 때 온갖 절망이 이 세상에 다 나왔으나 마지막 남은 것이 희망이라고 합니다. 말인즉 희망이라는 것은 본질상 갇혀 있는 것이란 말입니다. 아울러 희망하는 것이 우리에게 주어졌을 때 그 대상은 이미 희망할 수 없기에 희망은 본질 상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양귀자의 소설 제목처럼, 나는 소망한다 내게 금지된 것을,, 어쩌면 소망하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에, 우리 안에 없기 때문에 역설적으로 가능한 것인지도 모릅니다. 


  일찍이 플라톤이나 토마스 무어 같은 사상가들이 ‘유토피아’를 꿈꾸었습니다. 그러나 유토피아라는 말 자체가 그리스어 ou + topos 로 이루어졌기에 이 세상에 없는 장소가 곧 유토피아입니다. 없기에 한 없이 희망하고 꿈 꿀 수 있는 것이 곧 유토피아의 특징이기도 합니다. 


  전후 희망의 철학자라 불리는 에른스트 블로흐는 “인간은 불합리한 것을 개선하기 위해 희망이 필요하고, 희망하는 한 현재의 불합리성을 인지하며, 그것을 개선하기 위해 노력한다. 희망하는 것은 미래적 막연한 시점이 아니라 현재의 절망을 극복하려는 의지다.”라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희망하는 사람은 현재에 만족하지 않고, 현재의 상황을 더 낫게 개선하려고 애쓴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블로흐의 희망은 한계가 있습니다. 만약 A라는 사람과 B라는 사람이 동일한 어떤 것을 희망하고 그 희망하는 것을 이루기 위해 애쓴다면 불가피하게 A와 B 는 경쟁 관계에 있으며 심지어 적대 관계에 있기 마련입니다. 결국 희망하는 것이 제한적일 때, 경쟁에서 혹은 블로흐의 용어를 빌리자면 투쟁에서 이긴 사람만이 소유하게 되고, 그 말은 반대의 사람은 또 다른 절망에 빠져버리게 됩니다. 이것이 세상적 희망이 가지는 구조적 한계입니다. 모두 임원을 희망하지만 소수만이 그 희망을 이룰 수 있고, 상당수는 이루지 못한 희망으로 인해 상대적 절망에 이르게 된다는 뜻입니다. 블로흐가 말하는 희망은 본질적으로 구조적 한계에 이르게 됩니다. 또한 블로흐의 희망은 결론이 모호합니다. 완전한 희망이든지 완전한 절망이든지 둘 중 하나라고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그의 희망은 오히려 불안합니다. 


2. 희망의 본질 (신학적)


  블로흐와 달리 희망의 신학자 몰트만은 기독교야 말로 희망의 종교며 우리의 믿음은 희망과 직결된다고 말합니다. 그는 우선 우리가 믿는 하나님이 희망의 하나님이라고 가르칩니다. 하나님은 무에서 유를 창조하셨고, 창조한 세계가 진보해 나가도록 설계하셨습니다. 태초에 창조된 세계는 종말을 향하여 나아가고 있고, 종말은 창조의 온전한 회복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그리고 그 분이 창조한 세상과 인간은 본질적으로 희망을 담지하고 있습니다. 더 나은 세상으로 회복되어 가는 것이 그 분의 뜻이며, 우리도 그 분의 형상으로 온전하게 변화되어 가는 것이 그 분의 뜻이므로 우리는 이러한 희망을 가지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희망은 두 가지입니다. 하나님의 창조 세계가 온전히 회복되어 지는 것이며, 우리 자신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온전히 회복되어 지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희망입니다. 


  우리가 가진 이 희망은 하나님의 역사 개입으로 입증된 것입니다. 구체적으로 애굽의 노예였던 이스라엘, 절망의 포로였던 그들에게 느닷없이 임한 구원은 희망의 확실한 증거입니다. 희망할 수 없었던 그들이 희망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애굽의 노예였던 그들이 출애굽하여 가나안 이라는 약속의 땅을 희망하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언약, 약속에 근거합니다. 물론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이 약속, 희망을 실현해 내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의 말처럼, 피조물이 고대하는 것은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3. 우리의 희망 예수 – 십자가와 부활 


  출애굽을 넘어서 하나님이 희망을 온전히 드러내신 사건은 십자가와 부활입니다. 십자가는 사실 절망 그 자체이며 죽음 그 자체입니다. 모든 것이 끝나 버렸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죽임을 당했고 제자들은 모든 흐망을 상실한 채 도망 가 버렸습니다. 그러나 3일 후 하나님은 죽음의 권세에서 예수님을 다시 살리셨고, 부활은 죽음을 극복함으로 희망이 주효하다는 것을 증명해 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절망의 극복이자 희망의 근거가 되었습니다. 또한 예수의 부활은 부활의 첫 열매로써 우리도 장차 부활할 것임을 약속하는 근거가 됩니다. 하나님이 역사라는 시공간에서 죽음, 최악의 절망을 물리치시고 최고의 희망을 증명해 내셨습니다. 부활은 희망의 극치이며 완전함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희망은 이 세상에서의 무엇인가 더 나은 삶이 아니라, 완전히 새롭게 찾아오는 삶, 변화된 삶을 기대하게 합니다. 우리의 관심을 이 세상에서 저 세상으로, 땅에서 하늘로 옮겨놓습니다. 


  몰론 우리의 이 희망은 극단적 종말주의자들의 주장처럼 이 세상의 모든 관심을 외면한 채 살아가는 것을 말하지 않습니다. 모든 것을 포기하고 살아가는 것이 아닙니다. 부활하신 주님은 말씀하시기를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라고 하셨습니다. 그 분이 왕의 왕이요 주의 주가 되셨습니다. 죽음에서 일어나시고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습니다. 하나님은 그 분에게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셨고 가장 존귀한 분으로 삼으셨습니다. 물론 우리는 그 분의 신실한 제자들로써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예수를 주로 삼아 그 분의 발 앞에 엎드릴 것을 위해 살아갑니다. 우리의 희망은 우리의 주님이 온 세상에서 높임을 받고 장차 온 세상이 그 분의 뜻대로 회복되는 것입니다. 


  희망이 본질상 없는 것이기에 더욱 희망하며, 그러하기에 희망하는 자는 현재의 삶을 개선하고자 한다면, 우리의 개인적 희망에서 하나님 나라의 원대한 희망을 꿈꾸며, 오늘 우리 삶에서 하나님 나라를 욕망하는 것이 희망의 두 지평, 아니 한 지평일 것입니다. 그대, 이러한 희망을 가질 수 있기를 바랍니다. 


p.s. 이종인 박사의 희망의 두 지평을 읽고 쓴 서평입니다. 이렇게 좋은 책을 집필해 주신 이종인 박사께 감사드리고, 아울러 이 책을 통해 에른스트 블로흐와 위르겐  몰트만의 세계로 들어갈 수 있게 되어 감사하고, 독자들은 이 책을 통해 더 깊은 학문적 의미로 갈 수 있으리라 확신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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