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로의 비밀 모자 도란도란 마음 동화 4
김경옥 지음, 신진호 그림 / 청어람주니어 / 202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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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어람주니어에서 새 그림책 《마로의 비밀 모자》가 출간됐습니다. '도란도란 마음동화' 네번째 작품입니다.

밀짚 모자를 쓰고 있는 아이와 모자 속에서 얼굴을 빼꼼 내민 작은 동물들이 눈에 들어옵니다. 여름의 계절감이 살아있는 나무의 초록색이 시원해 보이고요. 아이의 꼭 다물고 웃고 있는 입 모양이 비밀 이야기를 숨기고 있는 것 같아요.



글_김경옥
어릴 때 방학이면 시골 외갓집에서 자연과 더불어 놀던 추억이 지금껏 글을 쓰는 자양분이 됐어요. 낮에는 산으로 들로 다니며 식물과 곤충을 채집하고, 밤이면 부엉이 울음소리를 들으며 잠들었던 날들이 그립답니다. 요즘 생물 다양성이 줄어드는 것을 안타까워하다가 필리핀 여행 중 보았던 안경원숭이에 대한 이야기를 쓰게 됐어요. 안경원숭이는 지구의 모든 영장류 중 제일 연약하고 작대요. 멸종 위기에 처한 영장류가 많다는데, 정말 심각한 일이지요. 마로 같은 미래의 주인공이 사라져 가는 동식물들을 잘 지켜 주기를 바라며 이 이야기를 썼어요. 그동안 지은 책으로는《공양왕의 마지막 동무들》《세 장의 욕망 카드》《가짜 뉴스를 시작하겠습니다》《불량 아빠 만세》《꽃밭 속 괴물》등 수십 권의 개인 창작집이 있습니다.

그림_신진호
파란 하늘과 에메랄드빛 바다, 신비로운 식물들로 가득한 보홀섬으로 훌쩍 떠나 보고 싶어요. 한 손에는 스케치북을 들고 두 눈 크게 뜨고 안경원숭이들도 찾아보고요. 저는 다양한 책들에 그림을 그려요. 《우리는 벚꽃이야》《여름맛》《다와의 편지》《창덕궁 꾀꼬리》《퓨마의 오랜 밤》《난민 말고 친구》《그냥 베티》등의 책에 그림을 그렸어요. 네이버 그라폴리오에서 '심플 라이프'라는 제목으로 일상의 소중함과 인생의 아름다움을 담은 그림을 연재 중이에요.






표지를 넘기면 안경원숭이에 대한 정보를 알 수 있는 지면이 있어요. 안경원숭이를 직접 본 적은 없지만 멸종 위기 동물이라고 하니 좀더 눈여겨보게 되었습니다. 사진도 찾아봤어요. 작은 몸에 큰 눈, 귀엽기도 하고 겁이 많아 보였습니다. 이 그림책은 멸종 위기 동물에 대한 관심을 모으기 위해 만들어졌군요.


"동식물의 생물 다양성이 줄어들면 자연의 균형이 깨지면서 전염병이 생기는 등 인간에게도 나쁜 일이 일어난대. 사라져 가는 동물들에게 관심을 가지면 좋겠어."






필리핀 보홀섬의 마호가니 숲, 수많은 여행객들이 안경원숭이를 구경하기 위해 찾는 곳이라고 해요. 기운없이 나뭇가지에 달라붙어 있는 안경원숭이를 만지거나 쉴새없이 카메라 셔터를 누르는 사람들의 모습이 그려져 있지요.

안경원숭이는 영장류 가운데 가장 작은 동물이라 몸의 크기가 10cm 정도밖에 되지 않고, 반드시 낮잠을 자야 하는 야행성이라고 하는데요. 안경원숭이 눈에는 거대한 생명체로 보일 만한 사람들이 온종일 돌아다니며 손을 대고, 카메라를 들이미는 게 얼마나 위협적으로 느껴질까요.

날마다 사람들에게 시달리며 극심한 스트레스에 지쳐가던 안경원숭이 포포와 요다 앞에 커다란 밀짚모자를 쓴 아이가 나타났어요. 안경원숭이가 보기에 마로라는 이 아이는 아무리 봐도 옷차림도 이상하고, 농장 안을 두리번거리는 행동도 수상했지요.

마로는 확실히 다른 아이들과 달랐어요. 예전에 청개구리를 키우면서 자꾸 만지고 귀찮게 해서 죽게 만든 경험이 있었고, 보홀섬으로 오면서 동물백과사전을 읽으며 안경원숭이에 대해 공부도 했기 때문에 안경원숭이들을 함부로 만지거나 괴롭히지 않았거든요.

뿐만 아니라 안경원숭이 친구들에게 아주 놀라운 계획도 늘어놨어요. 별처럼 반짝이는 눈으로 들려주는 이야기들에 안경원숭이 친구들도 마음이 움직였고요.




마로의 계획에 함께하기 위해 안경원숭이 친구들에게 필요한 건 무엇이었을까요? 마로와 안경원숭이들의 표정을 보니 꽤 신나는 일이 생길 것 같아 앞으로 펼쳐질 일들에 기대가 생겼어요.

마로의 멋진 계획과 커다란 모자에 숨어 있는 비밀을 끝까지 따라가 보세요. 아름다운 자연 속에서 우리 곁에 살고 있는 동식물들과 어우러져 본 기억을 간직하고 있다면, 이 여름에도 만들어가고 있다면 이 책의 마지막 장을 덮을 때 분명히 마로처럼 미소를 짓게 될 거예요.


그림책을 몇 번 보고나서 관련 기사를 좀더 찾아보니 안경원숭이는 멸종위기종으로 매우 철저하게 관리하며 보호되고 있다고 해요. 그렇기 때문에 질병에 걸리거나, 천적에게 피해를 입는 경우는 드물지만 성격이 무척 예민해 스트레스로 죽는 경우가 오히려 많다고 합니다.

몸집이 작고, 스트레스로 생명에 위협을 느낄 만큼 예민한 데다가 야행성인 동물을 관광 코스에 선보이는 것 자체가 심각한 폭력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안경원숭이가 처한 문제 상황을 인식한다고 해도 관광지에서 카메라를 들거나 희귀한 동물을 직접 보고 만지고 싶은 것 또한 자연스러운 마음이기 때문에 소수의 관리, 보호 인력을 제외한 사람들과는 거리두기를 좀더 엄격하게 해야 할 필요가 있겠다고 생각했어요. 이미 늦은 감이 없지 않지만 사라져가는 동물들에 대한 작은 관심이 멸종 위기에 놓인 동물들은 물론 사람과 지구의 생명을 구하는 시작점이 될 것입니다.(*)


※ 출간 이벤트
《마로의 비밀 모자》를 구매하는 분들께 투명 부채를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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떴다! 배달룡 선생님 - 제26회 창비 ‘좋은 어린이책’ 원고 공모 대상작(저학년) 신나는 책읽기 61
박미경 지음, 윤담요 그림 / 창비 / 202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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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비에서 초등 1, 2, 3학년을 위한 신나는 책읽기 시리즈 61번째 작품 《떴다! 배달룡 선생님》이 출간되었습니다. 이 책은 제26회 창비 '좋은 어린이책' 원고 공모 저학년 부문 대상작이기도 합니다.

어린이책에서 특별하고 재미있는 선생님을 만나는 건 분명 새로운 경험이지요. 이 책은 그 새로움이 더 빛났어요. 지금까지 동화에서 볼 수 없었던 독특하고 참신한 캐릭터인 교장 선생님이 등장하기 때문입니다. 햇살 초등학교에서 신나게 노는 걸 가장 좋아하는 사람이 바로 햇살 초등학교 교장인 배달룡 선생님이거든요.

배달룡 선생님은 어릴 때부터 '짱'이 되는 꿈을 키웠는데, 드디어 그 꿈이 이루어졌어요. 그런데 햇살 초등학교의 짱이 된 배달룡 선생님은 첫날부터 딱지 치는 딱! 딱! 소리에 참을 수가 없었어요. 딱지 치는 소리가 너무 신경쓰였거든요. 참다 못한 배달룡 선생님은 결국 딱지 치는 아이를 찾아내 교장실로 불렀어요.

예상과 다르게 배달룡 선생님은 그 아이를 혼내기는커녕 막대 사탕 통을 건네며 반 친구들과 나눠 먹으라고 했어요. 사탕 먹는 동안 딱지는 안 치기로 약속을 받고서요.

다음 날 배달룡 선생님은 사탕 통을 새로 채워서 어제 만났던 1학년 1반 아영이네 교실로 찾아갔어요. 선생님 주머니에는 학교 앞에서 받은 학원 전단지로 납작하게 접은 딱지가 들어있었어요. 더이상 참지 못 하고 딱지 치기를 하러 간 거였어요. 교장 선생님을 이긴 사람에겐 막대 사탕을 주신대요. 정말 남다른 교장 선생님이시죠?

그렇다고 배달룡 선생님이 아이들과 노는 것만 좋아하는 건 아닙니다. 학교 앞 분식집 탁자에 그림을 그린 학생 때문에 가게 사장님 전화를 받고 학부모 대신 달려가는 일도 있고요. 그 와중에 그 학생이 그림을 잘 그린다는 것도 발견하고, 분식집 사장님께 떡볶이 비법을 전수하기도 합니다.

친구에게 숙제를 대신 하게 시키는 아이에게 오히려 선생님이 숙제를 해주겠다며 공책을 가로채고, 멀리 전학 가기 싫어서 교장선생님 집에 살게 해달라고 부탁하는 아이에게도 기발한 제안을 합니다. 눈 오는 날에는 아이들과 눈싸움을 한 뒤 지독한 감기에 걸려 앓아눕기도 합니다.

코로나 시국의 거리 두기가 아니더라도 교장 선생님은 아이들이 거리감을 느끼는 일이 많지요. 딸아이가 다니고 있는 학교에서 지난해 오랫동안 학기 중에도 화장실 공사를 했어요. 어느 날 교장 선생님이 먼지가 나니까 화장실 앞으로 지나다니지 말라고 하셨다고 말했어요. 아무래도 공사중에는 먼지도 많고, 위험할 수도 있지, 설명해 줬더니 "엄마, 그게 아니고, 우리가 먼지를 날리니까 지나다니지 말래. 거기가 교장실 앞이거든." 공사중인 화장실 앞 복도를 지나가야 도서관이 있어요. 방과후수업이나 돌봄교실에 가려면 그쪽으로 갈 수밖에 없는 아이들도 많다는 게 떠오르며 씁쓸했던 일이 기억났어요.

배달룡 선생님 같은 분이 '짱'이라면 아이들이 교장실에 가고싶어 할 것 같아요. 물론 밖에서도 교장 선생님을 만나는 일을 기대할 듯합니다. 아이들은 새 화장실보다 따뜻한 말 한마디, 관심어린 눈길 한번에 마음이 말랑말랑 녹아요. 반대로 어른들의 무신경한 말 한마디와 무관심한 태도에 쉽게 상처받기도 하잖아요. 전국의 초등학교에 배달룡 선생님처럼 유쾌하고 긍정적인 짱이 딱 한 분씩 계셨으면 얼마나 좋을까요.

학교생활에서도 일상이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흘러가던 때가 언제였는지 아득해요. 코로나 때문에 마스크를 처음 쓰고 다녔던 겨울이 딸아이 2학년 끝무렵이었는데, 지금 5학년이 됐어요. 학사 일정은 코로나 이전과 같이 정상 수업으로 복귀했지만 마스크는 못 벗었어요.

이럴 때일수록 담담하게 우리가 속한 곳에서 일상을 유지해야 하는데, 그러러면 마음이 단단해야 해요. 이 책에 나오는 아이들처럼 모든 아이들이 공감받고 웃으며 어울리는 즐거움이 있는 일상을 만들어갔으면 해요. 선생님과 친구들에게 이해받고 있다는 마음, 작고 재미있는 일이 많이 일어나는 학교 생활이 더욱 소중하게 느껴지는 때입니다. 건강하고 신 나게 학교 다니는 아이를 볼 수 있다면 엄마 마음도 날마다 봄날일 것만 같아요. 배달룡 선생님과 포근한 봄빛 가득한 햇살 초등학교로 놀러가 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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훌훌 - 제12회 문학동네청소년문학상 대상 수상작 문학동네 청소년 57
문경민 지음 / 문학동네 / 202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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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기록할 책은 제12회 문학동네청소년문학상 대상수상작, 문경민 작가의 《훌훌》입니다.

고등학교 2학년인 유리와 담임선생님의 상담시간. 유리가 쓴 자기소개서를 보며 선생님과 이야기를 나누는 장면이 잔잔하게 지나갑니다. 유리에게는 할아버지와 단 둘이 사는 사정이 있지만 친한 친구들과 어울리는 모습을 보니 밝고 재미있는 아이들과 학교생활도 무난하게 하고 있는 것 같았어요.

그런데 엄마가 죽었다는 할아버지의 전화를 받고 유리는 혼란스러운 감정에 휩싸입니다. 유리를 입양했던 사람, 고작 3년만 함께 살다가 떠난 엄마 서정희씨가 이제 이 세상 사람도 아니라고 합니다.

장례식이 끝나고 연우라는 열한 살짜리 남자아이가 왔습니다. 유리처럼 아빠를 모르지만 연우는 유리와 다르게 엄마 서정희 씨가 낳은 아이입니다. 유리는 어렸을 때 갓난아기였던 연우를 본 기억이 있습니다. 그 아기를 귀찮아하며 거칠게 대하던 엄마를 본 게 마지막 기억이기도 했습니다.

정체를 알 수 없는 감정이 혼자 잠든 내 방에 불쑥 들어와 온몸을 사정없이 난도질하고 떠날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괜한 소외감과 괜한 억울함, 괜한 서러움이 마음속 각기 다른 그릇에 담겨 찰랑거렸다. 찰랑거리던 그것들이 조금이라도 넘쳐 주르륵 흘러내리는 날이면 나는 잠깐 돌아버렸다. (본문 19쪽)

유리의 기억에 남아있는, 그 시절 감당하기 어려웠을 감정들이 느껴지는 부분입니다. 사려깊은 담임선생님과 무슨 이야기를 해도 다 들어줄 것 같은 친한 친구들에게도 선뜻 털어놓지 못 하는 유리의 마음들을 읽는 입장에서는 자세히 알게 될 수밖에 없습니다.

​고등학교만 졸업하면 좀처럼 곁을 내어 주지 않는 할아버지의 집을 떠나 멀리 떨어진 대학교에 다니며 독립적으로 살고 싶어서 학원에는 못 다녀도 인강에 의지하며 혼자 공부하는 아이, 유리는 이제 겨우 고2였어요.

​그런 유리 앞에 닥친 일들은 유일한 인생 계획마저 흔들어버렸고, 일상도 고단하고 복잡하게 돌아가게 만들었어요. 몇 주에 한번씩 여행을 떠나는 할아버지, 그럴 때마다 혼자 돌봐야 했던 연우라는 낯선 아이까지. 유리는 한숨이 나오는 상황 앞에서도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할 일은 해야 했다. 설거지 같은 일이었다. 식탁에 밥 한 공기 더 올리면 되는, 딱 그 정도의 일이었다." 고 말입니다. 실제로 연우에게 밥을 해먹이는 것도 유리의 일이었는데, 그게 보통 일이 아닌 걸 아니까 얼마나 답답하고 안타깝던지요. 그나마 연우와 유리가 조금씩 가까워지고, 설거지 정도는 연우가 맡아서 하기는 했지만요.

​유리가 내면이 단단하다는 게 느껴지고 담담하게 표현을 하니까 이 아이들보다 더 슬퍼하지 말자, 이 아이들을 힘들게 자라게 만든 어른들의 처지 또한 다 알지도 못 하면서 함부로 비난하지 말자고 다짐하며 읽어야 했습니다.

​유리는 친엄마가 누군지 알지 못 하고, 입양해준 엄마도 곁을 떠나 외롭게 자라왔어요. 또, 연우는 친엄마와 살면서 지속적인 방임과 학대 피해를 당한 걸로 보이고요. 게다가 그 엄마가 목숨을 버리는 순간까지 목격하고, 사인 규명 절차를 빌미로 소년보호재판에 가야 했어요.

아이들이 뜻밖의 상황에 놓일 때나 중요한 결정을 내려야 할 때 할아버지의 부재는 더 큰 난관이 되었어요. 그런데 할아버지에게도 사정이 있었어요. 유리는 이미 할아버지가 여행을 다니시는 게 아니고 병원에 계시다 나온다는 걸 눈치채고 있었거든요.

​어른의 보호를 충분히 받지 못 하는 아이들과 편찮으신 할아버지가 한집에 사는 게 얼마나 불행하고 막막한 일일까 내 감정을 앞세워 판단하는 게 짧은 생각이었다는 걸 유리는 사람에게 거리를 두는 게 아닌 다가서는 방식으로 보여줍니다.

​중반 이후의 일들까지 늘어놓는 것은 읽는 즐거움을 반감시킬 뿐이니 자세히 기록하거나 인용하지 않을 생각이지만 유리의 방식은 확실히 선을 긋는 게 아니라 선을 약간 넘어가 궁금한 것을 묻고, 문제를 풀어가는 쪽으로 잡혀갑니다. 그 방식은 할아버지와 연우 사이에서도, 저마다 고민과 비밀이 있었던 친구들과의 관계 속에서도 잘 맞는 열쇠가 되곤 했습니다.

​알고보면 할아버지도 연우도 친구들도 유리도 멘탈갑 선생님 역시 겉으로는 단단해 보이지만 깨지기 쉬운 존재였다는 데 생각이 닿습니다. 반대로 깨지기 쉽지만 보기보다 단단한 유리같은 존재였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아무리 오붓한 가족이어도, 죽고 못 사는 친구여도 적당한 거리를 두는 것이 건강한 관계를 길게 유지하는 법이라는 오랜 믿음에 조금 변화가 생긴 것 같습니다. 적정선에서 거리를 좁히는 용기도 낼 줄 알아야 한다는 걸 유리에게 배웠습니다. 한발 다가서야 손이 닿을 테니까요.

​유리가 훌훌 털고 떠나고 싶었던 건 유리를 대하는 표정이나 말투나 모든 게 단단한 할아버지와 그 집이었어요. 과거와 단절된 채 혼자 사는 게 꿈이었지요. 그런데 과거를 직면하고, 입 밖으로 털어놨을 때, 나의 아픔을 이해받고, 한편 다른 사람의 슬픔을 이해했을 때 무거운 마음을 조금씩 덜어낼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됐어요. 책을 덮고나서 '훌훌'이라는 제목의 가벼움이 더 좋아진 건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

감추는 일은 반복할 때마다 익숙해졌다. 어느 지점에서 입술을 얇게 다물어야 하는지, 어디에서 시선을 돌리거나 화제를 바꿔야 할지 자연스레 터득했다. 문제는 알 수 없는 수치심이었다. 내 처지에 대한 원망과 분노, 배신감 같은 감정이 일렁일 때면 항상 수치심도 함께 움찔거렸다.

반복되는 너절하고 복잡한 기분이 싫었다. 내 과거를 끊어 내고 싶었다. 없던 시절로 치워 버리고 싶었고 뒤도 돌아보고 싶지 않았다. 한동안 그러고 잘 살았다. 서정희 씨의 죽음이 아니었다면 입양으로 시작되는 내 과거 따위 없는 셈 치고 잘 살아갔을 터였다. (본문 20쪽)

나는 팔짱을 끼고 연우를 내려다보았다. 연우의 옆얼굴에서 또 엄마 서정희 씨가 보였고 속에서 독한 감정이 한 줄기 피어올랐다. 엄마 서정희 씨가 싫었다. 아무리 그래도 내가 장난감은 아니잖아? 몇 년 키우고 관둘 거면 입양은 왜 했어? 이제까지 그런 생각을 수도 없이 되풀이했다. 연우를 볼 때마다 엄마 서정희 씨를 떠올리게 될 것 같았다.

"밥 차려 놓을 테니까 배고프면 먹어."

연우는 대꾸하지 않았다. 그러거나 말거나 상관없었다. 나는 집 안으로 들어왔다. 어쩐지 지치는 기분이 들었다.

거실 창문 너머 마당의 연우를 쳐다보았다. 금방 들어올 분위기는 아니었다. 어딘지 모르게 할아버지 분위기가 나는 것 같기도 했다. 그렇다면 문제는 간단했다. 할아버지와 지내던 것처럼 지내면 됐다. 거리를 두면 됐다. 연우 때문에 기분 상할 이유도 없었다. 아빠를 찾는 대로 곧 떠나게 될 아이였다. (본문 24~25쪽)

나를 버리고 가붓하게 떠났으면 최소한 잘 살기는 해야 하는 거 아닌가. 자기 몸으로 낳은 자식이면 살갑게 대해 주고 사랑해 주고 아껴 줬어야 하는 거 아닌가. 죽음을 맞으면서 그녀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마지막으로 무엇을 보았을까. 그녀가 들었을 소리는, 그녀가 느꼈을 감촉은 무엇이었을까 나는 생각했다. 아들의 손에 밀렸든, 혹은 사고였든, 그토록 어처구니없는 죽음으로 생을 마감한 건 서정희 씨가 어떤 사람이었느냐와 무관하게 그래서는 안 되는 거였다. (본문 80~81쪽)

수업을 마치고 연우네 학교로 향했다. 보도와 차도 사이에 바람에 쓸린 연분홍색 꽃잎들이 고여 있었다. 까만 정수리가 내려다보이는 아이들이 알록달록한 가방을 메고 무리 지어 내 옆을 지나갔다. 따듯하고 맑은 날씨였다. 바람도 선선했다. 학교 옆 근린공원에서 헬륨가스를 채운 풍선을 든 아이들이 꺅꺅거리며 뛰놀았다. 개를 데리고 산책 나온 아주머니, 할아버지들이 보였고 한가로운 얼굴로 고개를 젖혀 분홍 꽃비를 맞는 연인들도 보였다. 엄마 서정희 씨는 이제는 이 풍경을 누리지 못하겠구나, 잠깐 생각했다. (본문 11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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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양호에 핀 꽃 사거리의 거북이 16
김춘옥 지음 / 청어람주니어 / 202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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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어람주니어에서 새해 첫 책으로 《소양호에 핀 꽃》을 펴냈습니다. 사거리 거북이 시리즈 열여섯 번째 작품입니다. 지난해 소개했던 《길족 이야기 1, 2》을 쓴 김춘옥 작가님의 장편소설입니다.

​전작은 속도감 있는 판타지 동화 속에서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 세계와 연결되는 지점들을 발견하는 재미가 있었어요.

​이번 작품은 우리의 아픈 역사가 후대가 살아가는 현재로 어떻게 흘러왔는지 서정적으로 그리고 있습니다. 사계절이 모두 아름다웠으나 지금은 볼 수 없는 38선 마을에 살았던 많은 사람들의 가슴아픈 역사와 한국 근현대사의 일부분이 겹치는 장면들을 짚어 보며 초등 고학년 이상 청소년기 아이들과 이야기를 나누면 좋을 것 같아요.



글_김춘옥​

강원도 인제의 산골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을 보냈어요. 단국대학교 대학원 문예창작학과에서 아동 문학을 공부했으며 한국일보 신춘문예에 동화 <박물관 가는 길>이 당선되면서 글을 쓰기 시작했어요.

그동안 쓴 책으로 《길족 이야기 1, 2》 《가가의 아주 특별한 집》 《작은 나라》 《둥글둥글 지구촌 신화 이야기》 《우리 신화 이야기》 《야호! 난장판이다》 《울산에 없는 울산바위》 《서천꽃밭 한락궁이》 《꼭두랑 꽃상여랑》 《삼신 할망과 수복이》 등이 있어요.





강원도 인제군 남면 부평리 11반, 자연부락명은 구만리.
지금은 우리나라 지도상에서 찾아볼 수 없는 곳입니다. 하지만 소양댐이 만들어지기 전에는 사람들이 살았던 마을이지요. (머리글 중)

이 소년의 이야기는 광복이 되던 때부터 한국 전쟁이 터지던 해까지를 중심으로 하고 있습니다. 바로 제 어머니가 살았던 소양강 마을, 구만리가 배경입니다. (머리글 중)


증조할아버지가 살아 있었다.

한국 전쟁 때 가족과 소식이 끊겼던 증조할아버지가 아들을 찾는다는 연락을 받은 시점에서 이야기가 시작됩니다. 나(가람)의 할아버지가 50년 넘게 헤어졌던 아버지의 소식을 듣게 된 거였어요. 할아버지와 가람이의 부모님, 그리고 바다누나와 가람이까지 다섯 가족이 증조할아버지를 만나러 갈 날이 다가오고, 가람이는 증조할아버지께 선물할 가계도를 만들기 시작했어요.




사진 한 장 남아 있지 않은 증조할머니와 할머니에 대한 가람의 궁금증과 할아버지의 회한이 밀려들면서 이야기는 과거 할아버지의 어린 시절로 넘어갑니다.

할아버지의 옛날 이야기는 밤마다 이어지고 가람은 할아버지가 어린 시절에 통과해야 했던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의 비극에 대해 듣게 됩니다. 나루터에서 친구 '난이'의 아버지이기도 했던 사공이 모는 배를 타고 하나밖에 없는 학교에 다녔던 이야기부터 가람의 할아버지, 어린 '준태'가 등장합니다.

준태의 아버지는 오래 전 집을 떠나 독립운동을 하는 분이었어요. 준태는 어머니와 단둘이 살면서 나물죽도 배부르게 먹지 못할 정도로 어렵게 살고 있었어요. 숨겨두었던 얼마 되지 않는 쌀도 친일파 무리에 빼앗기기 일쑤였지요.

반면에 같은 반에는 친일파 아버지를 둔 '승우'라는 아이가 있어서 준태와 다툼이 일어나기도 했고요. 어른들도 말 한마디라도 친일파의 비위를 거스르면 주재소로 끌려가 피투성이가 될 때까지 맞기도 하던 때였어요.

척박하게 살아가는 어린 준태의 마음을 달래주는 건 아름다운 마을 풍경과 친구 난이였어요.

산에는 떡갈나무, 신갈나무, 물참나무가 하늘을 향해 쭉쭉 뻗어 있었다. 올려다보면 잎사귀 사이로 열매가 올망졸망 매달려 있었다. 아래로는 칡넝쿨이며 풀이 잘 자랐고 꽃들이 어울려 피었다. 이러한 산 속 풍경이 준태의 기분을 풀어 주었다. (49쪽)

시간이 흘러 일제강점기가 끝나고 광복을 맞이한 마을에서 친일파였던 승우 가족은 비참하게 쫓겨납니다. 준태의 집으로는 드디어 아버지가 돌아왔어요. 준태 아버지가 더 큰 분풀이를 막아준 덕분에 승우네는 목숨을 부지하고 떠날 수 있었지요.

"우리는 하나입니다. 같은 피를 나눈 동포란 말입니다. 서로 싸우고 시기하는 동안에 우리나라는 침략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나라를 빼앗겼습니다. 36년 동안 우리가 받은 고초를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가 하나로 뭉쳐 힘이 있었다면 나라를 빼앗기기는 쉬워도 찾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알았습니다. 이제부터라도 우린 뭉쳐야 합니다. 한마음으로 모아서 일어서야 합니다." (60쪽)

준태는 집으로 돌아온 아버지와 농사일도 하고, 낚시도 하고, 함께 시간을 보내며 오랫동안 나누지 못 했던 가족의 정도 쌓았어요. 산 속 동굴로 거처를 옮긴 승우를 다시 만나 그간의 오해도 풀고 난이까지 셋이 자주 어울리게 되었고요.

그러나 잔잔한 강물처럼 평온하게 흐르던 시간은 그리 길지 않았어요. 승우는 더 멀리 떠나게 됐고, 준태의 아버지도 '더 옳은 일'을 하기 위해 다시 집을 떠나게 됩니다. 곧 일을 끝내고 돌아오겠다는 약속과 어머니를 부탁한다는 당부를 남긴 채 집을 나선 아버지를 다시 만나게 된 게 50년도 훌쩍 지나 어린 준태가 할아버지가 되고, 손주 가람이가 자라고 있는, 지금입니다.(이 책은 2004년 《내일로 흐르는 강》으로 출판되었고, 2022년 《소양호에 핀 꽃》으로 새로 나왔다고 합니다.)

증조할아버지가 떠난 뒤에 할아버지가 겪어야 했던 많은 일들은 열대여섯 살에 불과했던 준태가 감당하기엔 힘든 경험들이었어요. 친구 난이 가족과 승우, 어머니와 얽힌 일들은 간단하게 줄여서 쉽게 써내려가기가 어려워요.

일제강점기를 지나 동족상잔의 비극 안에서 흩어지고 무너진 가족이 얼마나 많았을까요. 강원도 인제가 고향이라고 적혀 있는 작가의 소개글과 머리글을 보면 소설의 배경이 된 38선마을이 지금은 소양댐 수몰 지구로 사라졌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요. 고향 마을이 사라지고, 세월이 흘러 마을 사람들도 세상을 떠나가고, 남아있는 사람들의 기억에서도 사라지기 전에 한 권을 책으로 그 곳의 역사를 남긴 일이 묵직한 감동으로 다가왔어요.

이 책에 나오는 이야기처럼 가족이 생이별을 하고, 다시는 만날 수 없었다는 사연도 셀 수 없이 많겠지요. 역사를 멀리 거슬러 올라가지 않아도 돌아가신 조부모님들은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을 겪으셨고, 제 부모님도 한국전쟁 중에 태어나셨어요. 특히 아버지는 유복자로 세상에 나와 평생 외로움을 견디는 삶을 살아오셨고요. 

이제는 제 아버지가 칠순이 지난 할아버지가 되었는데, 여전히 친할아버지의 생사나 소식은 전혀 알 수 없습니다. 

어릴 때부터 친할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들을 조금씩 들을 수 있었지만 자세한 가족사도 알지 못 해요. 친할머니도 너무 젊었을 때 급작스럽게 헤어지게 되셨고, 아버지는 태어나기도 전이었으니까요. 친할머니가 돌아가신지도 30년이 다 되어가니 가슴아픈 젊은 시절 이야기를 전해들을 기회도 없었지요.

이 책을 읽으면서 과거의 준태와 현재의 가람이를 통해 제 아버지가 안고 살아야 했던 오래 묵은, 또 깊은 상처일 수밖에 없는 일들을 생각해 봤습니다. 아버지가 친할아버지를 만날 수 있었다면 얼마나 가슴 벅차하셨을지.

한국전쟁이 끝난지 이제 70년이 되어가고, 아직 우리나라는 분단국가로 휴전 중입니다. 세상이 지금처럼 발전하고 변화하기에 충분히 긴 세월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아직 많은 어르신들은 한국전쟁을 어제 일처럼 기억하며 저마다 가슴 아픈 역사를 안고 살고 계십니다. 

끊임없는 강물의 흐름처럼 눈부신 기억들과 함께 아픈 역사도 우리의 삶 속에서 숨을 쉬듯 지나가겠지요. 봄이 오면 어김없이 꽃이 피는 것처럼 기나긴 휴전도 끝나고 진정한 평화가 찾아오길 바라는 마음이 커지는 겨울입니다. (*)

준태는 마루 끝에 앉아서 비가 내리는 것을 바라보았다. 빗방울이 바닥에 떨어지면서 골을 팠다. 그 골을 따라 빗물이 낮은 곳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신기하지? 빗물이 제 갈 곳을 찾아가는 게 말이야."

아버지가 옆에 와서 앉으며 말했다.

"빗물이 어디로 가는 건데요?"

준태는 여전히 앞을 보며 물었다.

"소양강으로 가겠지. 그러고는 결국 바다로 흘러들지. 바다로 간 물은 하늘로 올라가서 다시 비가 되고, 그렇게 순환하는 거야. 사람들은 때때로 앞에 보이는 것만 바라보지. 저 빗방울처럼 말이야. 그 다른 면까지 본다면 서로를 더욱 이해하게 될 텐데."
(64-65쪽)

​《소양호에 핀 꽃》을 구매하시면 메모지를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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굿바이, 미쓰비시 사거리의 거북이 15
안선모 지음 / 청어람주니어 / 202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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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어람주니어 '사거리의 거북이' 열다섯 번째 책 《굿바이, 미쓰비시》가 출간되었습니다. 지난해 이맘때 읽었던 《꼬마 난민 도야》를 쓴 안선모 작가의 신작입니다.

얼마 전 10월 25일이 '독도의 날(대한제국칙령 제41호를 기념하고, 독도 수호 의지 표명 및 독도가 대한민국 영토임을 천명하기 위하여 제정한 날)'이었기 때문에 '미쓰비시'라는 일본 전범기업 이름이 적힌 제목을 눈여겨 봤답니다.

아이도 학교에서 10월 내내 독도 플래시몹 연습을 하고 이제 막 촬영을 마쳤을 때라 일제강점기, 세상에 눈 떠 가는 열세 살 소년 인수의 성장기에 더욱 관심이 갔습니다.




글_안선모

느릿느릿 걸으며 기웃기웃 다른 세상 엿보기를 좋아해요. 사라져 가는 것들, 새롭게 등장한 것들을 보면 호기심이 발동해 오랫동안 관찰하여 이야기를 만들어 내려고 노력하지요. 꽃밭 가꾸기, 동물 돌보기, 사찰 음식 만들기를 좋아하며 역사에도 관심이 많아요. 그동안 《꼬마 난민 도야》 《엄마는 게임 중독》 《조용한 마을의 공유경제 소동》 등 많은 창작 동화와 다양한 분야의 어린이 책을 펴냈으며 지금도 꾸준히 쓰고 있어요. 해강아동문학상, 한국아동문학상, 방정환문학상을 수상했으며 현재 경기도 포천 산골에서 부엉이도서관을 운영하고 있어요.




일제강점기에 일본인 선생에게 일본어를 배워야 했지만 인수는 학교를 좋아했고, 공부도 열심히 했어요. 그런데 일본인 선생 눈밖에 나게 되면서 학교생활을 더이상 할 수 없게 됐지요. 너무 거리가 멀어서 한참 걸어다녀야 했어도 좋아했던 학교였는데요.

부모님이 안 계신 인수는 길용 아재 집에 얹혀 사는 형편이었기 때문에 학교에 계속 다닐 수 있게 해달라고 조르거나 누군가에게 의지할 수도 없었어요. 학교에 가지 않아도 길용 아저씨 댁에는 일이 많기도 했어요. 새벽부터 물을 길어 오고 땔감도 주워 오고, 잔심부름도 도맡아 해야 했으니까요.

길용 아재 집에는 김화댁 아주머니와 인수 또래 영팔이, 영순 누나, 영삼 형까지 식구들이 많았어요. 김화댁 아주머니는 기차역 부근 정미소에서 일을 했어요. 영팔이는 인수와 다르게 학교를 싫어하지만 마지못해 다니고 있었어요. 영순 누나는 똑똑하지만 정신대에 가지 않기 위해 학교를 그만두고 이제 막 조병창 의무과에 취직을 했고요. 집에 있거나 학교에 다니는 여자아이들은 정신대에 가야 된다고 해서 서둘러 구한 일자리였어요. 영삼 형은 미쓰비시 군수 공장에 다녔어요. 영삼 형처럼 작업복을 입고 조병창에서 일하는 게 인수의 꿈이었지요.

일제강점기에 부모를 잃고 남의 집 더부살이를 하는 인수같은 아이도 있었지만 토막집에서 썩은 나무뿌리와 진달래 뿌리를 캐다가 피(볏과의 한해살이 풀)와 섞어서 죽을 끓여먹고 사는 아이들도 많았어요. 토막집은 산기슭에 기둥을 얼기설기 세우고 짚을 얹어서 만든 움집이라고 해요.

인수가 사는 길용 아재 집은 미쓰비시 줄사택이었어요. 아이들은 집이 줄줄이 붙어 있다고 줄집이라고 불렀어요.

날이 더워서 그런지 줄집 밖에 사람들이 바글바글 모여 있다. 얼마 전까지 히로나까 공장에 다니는 노동자들이 사는 곳이라고 해서 히로나까 줄사택이라고 불렸지만 이제는 미쓰비시 줄사택으로 바뀌었다. 공장이 미쓰비시로 넘어갔기 때문이었다. 아이들은 집이 줄줄이 붙어 있다고 해서 줄집이라고 불렀다. 줄집에 사는 노동자들은 이곳 너른들이 고향인 사람도 있지만 대부분 다른 고장에서 강제 동원되어 온 사람들이라고 한다. 일본이 벌이고 있는 전쟁터로 끌려갈까 봐 그것을 피해서 온 사람도 있다고 한다. 어쨌든 영삼 형이 재작년부터 미쓰비시 군수 공장에 다니면서 그 덕에 온 식구가 줄집에 살게 되었다. (본문 33쪽)


인수도 김화댁 아주머니가 소개해준 땔감 가게에서 일을 시작했어요. 먹여 주고 재워 주는 조건으로 월급은 못 준다고 했지만 인수는 낮에는 배달과 잔심부름 일을 하고, 밤에는 가게에 붙어 있는 단칸방을 혼자 쓰며 더이상 발칫잠을 잘 필요가 없어져서 만족스러웠어요. 저녁에는 자유 시간을 이용해 예전에 다녔던 서당에서 여는 야학 수업에 나갈 계획도 세웠어요.

인수는 머리가 좋고, 일본말도 꽤 잘했는데, 어떤 환경에서 지내게 되어도 한결같이 공부에 관심이 많아 보였어요. 그런 인수의 영민함은 정작 학교 다닐 땐 걸림돌이 되었어요. 일본 아이들은 일본 말을 잘하는 인수를 아니꼽게 생각했고, 조선 아이들은 고깝게 봤어요. 일본인 선생은 고분고분하지 않은 인수를 눈엣가시처럼 여겨서 체벌을 가하곤 했고요. 서당의 훈장님만은 인수가 고분고분하지 않아서 싹수가 있다고 했어요.

가게에서도 똑똑한 인수의 말과 행동이 일본인 손님들의 비위를 거스르거나 주인 부부를 난처하게 만들기도 했어요. 주인 부부는 일본인을 상대로 가게를 하려면 일본인들이 말도 안 되는 횡포를 부리거나 아무리 생트집을 잡아도 "귀머거리, 장님, 벙어리가 되는 것뿐 아니라 간, 쓸개도 모두 내놓아야 한다."고 한숨을 쉬며 나무라곤 했어요. 배달꾼으로 일하면서 인수는 고된 세상살이를 조금씩 알아 갔어요. 그러면서 남의 나라 사람들이 우리나라에 처들어와 주인 행세를 해도 왜 꼼짝없이 당하면서 살아야 하는지, 조선은 왜 식민지가 되었는지 처음으로 궁금해졌어요.

여러 어려움이 있었지만 인수는 자기가 일하는 화력신탄상회를 좋아했어요. 주인 부부의 아들 깍두기 형이 좋았거든요. 인수가 '갑득이'라는 형 이름을 잘못 들어서 '깍두기'냐고 물었는데, 형은 예명으로 써야겠다고 재미있어 했어요. 서울에서 공부하면서 양복에 빨간 넥타이를 하고, 중절모를 쓰고 다니는 깍두기 형은 인수가 동경하는 '모던뽀이'이기도 했어요. 가게 주인 아주머니는 인수에게 깍두기 형을 '도련님'으로 모시며 수발 들어주길 바랐지만 형은 인수를 동생처럼 대해줬어요.


"꼬맹이, 아무리 힘들어도 꿈은 가져야 돼."

깍두기 형이 어쩐 일인지 심각한 얼굴로 말했다.

"우리 조선이 다시 일어나려면 힘이 있어야 해. 힘은 꿈이 있어야 생기는 거고."

무슨 말인지 도대체 종잡을 수 없었다. 인수가 노래진 얼굴로 말했다.

"형, 나도 꿈은 있어."

"무슨 꿈?"

"조병창에 취직하는 꿈."

그 말을 듣자, 형의 얼굴이 먹구름보다 더 어둡게 변했다. 곧 비가 쏟아질 것 같은 그런 느낌이었다. (본문 59~60쪽)


어느 날, 인수는 한 일본인 집에 배달을 갔다가 아야코라는 여자아이를 만났어요. 아야코는 인수가 지금까지 봤던 일본 아이들과 다르게 친절하고 착한 친구였어요. 아야코는 인수와 아무렇지도 않게 대화를 나누는데, 오히려 같은 조선인인 아야코의 유모는 인수를 거지같은 조선 아이라며 구박했어요.

인수는 야학에서 공부를 계속하고 깍두기 형과 어울리며 한번도 깊게 생각해 본 적이 없었던 식민지 조선에 대해 조금씩 다른 눈으로 보게 되었어요. 인수는 철도와 기차, 공장, 수도 등 일본에게 받은 게 많다고 생각했는데, 깍두기 형은 가장 중요한 것들을 빼앗겼다고 이야기했어요. 그러고보니 한문과 예절을 가르치던 서당에도 지금은 일본 말을 반드시 가르쳐야 한다는 지시가 내려왔다고 했어요.

인수는 오랜만에 줄집에 가서 영팔이의 공부를 도와주고, 한밤중에 우연히 서당 사랑채에서 들려오는 말소리에 걸음을 멈췄어요. 인수가 살펴보니 훈장님, 깍두기형, 영삼 형이 모여 있었어요.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한 모임이었다. 전혀 어울리지 않는 조합이었다. 한 사람은 고리타분한 사고방식을 가진 훈장님, 훈장님은 군수 공장을 엄청 싫어한다. 그리고 또 한 사람, 영삼 형은 군수 공장에 다니는 노동자다. 마지막 한 사람은 경성을 오르내리며 멋 내고 돈 쓰는 걸 좋아하는 부잣집 도련님이다. 세 사람에게서는 공통점을 찾기보다 다른 점을 찾는 게 훨씬 쉬웠다. 공통점이라야 영삼 형과 깍두기 형의 나이가 같다는 것 한 가지뿐. (본문 89쪽)


인수는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건지 궁금했지만 날도 덥고 일이 바빠 깊게 고민할 여력은 없었어요. 더위가 절정에 이르렀지만 수영 한번 하러 갈 시간도 없었으니까요. 그날도 인수는 일본인 아이들이 다니는 학교로 숯을 배달하러 갔다가 아야코를 다시 만났어요. 그날 두 아이는 인상깊은 대화를 나누고 혜어지던 길에 갑자기 비가 쏟아지고 너른들에 물이 불어나며 아야코가 휩쓸려서 빠지고 말았어요. 인수는 목숨을 걸고 아야코를 구해냈지요.

아야코를 살려준 답례로 인수는 아야코 아버지의 초대를 받아 그 집에 갔어요. 아야코의 집에서 인수는 맛있는 간식도 대접받고, 아야코의 아버지는 조병창을 구경하고 싶다는 청도 들어주었어요. 이 일을 계기로 아야코의 아버지는 인수에게 일거리를 주기도 했어요.

그런데 인수가 조병창에 가보기 전에 영순 누나와 영삼 형은 뜻밖의 이야기를 들려줬어요.


"군수 공장에 다니면 다 무기를 만드는 것으로 생각하는데 그렇지 않아. 조병창 안에는 철저히 계급이 나뉘어져 있어. 조선 사람과 일본 사람으로. 조선 사람은 가장 기초적인 것만 만들고, 세세하고 중요한 일은 모두 일본 사람이 해. 일본 사람은 무기 만드는 방법을 조선 사람에게 절대로 알려주지 않아." (본문 125쪽)


실제로 둘러보게 된 조병창에서 인수도 생각과 다른 광경에 놀랐어요. 공장에서 일하는 조선인들은 일본 군복과 똑같은 작업복을 입고 열악한 환경에서 잘려져 나온 철판을 재단하는 일을 하고 있었어요. 완성된 무기 역시 볼 수 없었어요. 공장을 안내하는 일본인은 아야코에게는 쩔쩔매고, 조선인 인수에게는 빈정대듯 얕보는 태도로 일관했어요. 자유롭게 공장 안을 돌아다니며 마음껏 구경할 수도 없었습니다.

의무실에서 일하는 영순 누나를 만나러 갔을 땐 생각지도 못했던 일이 눈앞에서 벌어져서 아이들이 깜짝 놀라기도 했어요. 공장에서 일하는 조선인 노동자들이 어떤 대우를 받고 있는지 여실히 보여주는 일이었어요.

인수는 그 뒤에도 아야코 아버지의 심부름을 다니는 길에 노예보다 못한 취급을 받는 조선 노동자들을 보게 되었어요. 그 노동자들의 고통은 가까이에서는 영삼 형의 얼굴에서도 알 수 있었지요.

한편 깍두기 형에게도 무슨 큰일이 생긴 건지 신탄상회에 난리가 났습니다. 인수 앞에도 선택해야 할 일이 몇 가지 놓이게 되었어요. 그것은 조병창에 취직하고 싶었던 인수의 꿈과는 다른 길을 가야만 하는 일들이었지요.

서당 사랑채에서 목격했던 훈장님과 형들의 알 수 없는 모임과 아야코 아버지의 심부름 사이에 무슨 연관성이 있는지 인수는 답을 찾아야 했어요. 또 과거 아버지가 했던 일과 지금 인수가 해야 하는 일이 어떻게 연결이 되어 미래를 그릴 수 있을지 역시 인수 스스로 알아가야만 해요.

작가는 어린 시절 실제로 '미쓰비시 줄사택'에서 살았던 적이 있었다고 해요. 작가의 말에 나오는 것처럼 "일본이 대륙 병참 기지화의 발판을 삼기 위해 부평에 조병창을 만들어 무기를 만들었고, 조병창 건너편(지금의 부평 공원)에 자리한 미쓰비시 군수 공장은 조병창을 돕기 위해 철판을 만들어 냈어요."

다양한 역사 자료를 조사하던 과정에서 작가가 그랬듯이 많은 사람들이 의외로 조병창과 미쓰비시 줄사택에 대해 잘 모르고, 관심도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고 해요.


일본은 일제 강점기의 강제 노역 피해자와 그 유족들이 낸 손해 배상 소송에서 위자료를 지급하라는 판결에 불복하고 있는데도 우리의 관심이 너무 부족하다는 생각에 8년의 세월을 거쳐 이 책을 구상하고 집필했다고 합니다.

덕분에 저 또한 그동안 모르고 있었던 조병창과 미쓰비시 군수 공장의 참담했던 실태와 미쓰비시 줄사택과 그 주변에 살았던 사람들의 삶에 대해 처음 알게 되었어요. 관련 기사를 찾아보니 지금도 부평에 가면 미쓰비시 줄사택의 흔적을 볼 수 있다고 해요. 다음에 기회가 된다면 부평역사박물관에서 일제 강점기 시대상을 좀더 자세히 살펴보고 싶어졌어요.

마지막 책장을 덮으며 앞에서 읽었던 작가의 말이 다시 떠올랐어요. 열세 살 인수가 꿋꿋하게 성장해서 일본의 만행에 끝까지 맞섰을 거라는 생각도 들었고요. 그러나 인수가 원하던 '나중에 올 좋은 세상'을 우리가 이어 가고 있는지 확신을 못 하겠어요. 잘못을 인정하지 않고, 사과하지 않는 일본의 행태를 방관하고 있는 건 아닌지...인수가 넘었을 산과 바다를 헤치고 나아가야 하는 몫이 지금의 우리에게도 주어져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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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후 활동지는 청어람주니어 블로그에서도 다운로드할 수 있어요!

재미있게 읽은 책에 대해 아이들이 스스로 기록하고, 기억에 남기는 적극적인 독후활동을 돕는 좋은 자료들이니 꼭 한번 살펴보세요.



+

위와 같은 내용은 청어람주니어 블로그에서 가져왔습니다. 아래 링크는 더 자세한 내용을 확인할 수 있는 출간 이벤트 페이지입니다. ^^

https://m.blog.naver.com/juniorbook/2225502005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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