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 한 장 남아 있지 않은 증조할머니와 할머니에 대한 가람의 궁금증과 할아버지의 회한이 밀려들면서 이야기는 과거 할아버지의 어린 시절로 넘어갑니다.
할아버지의 옛날 이야기는 밤마다 이어지고 가람은 할아버지가 어린 시절에 통과해야 했던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의 비극에 대해 듣게 됩니다. 나루터에서 친구 '난이'의 아버지이기도 했던 사공이 모는 배를 타고 하나밖에 없는 학교에 다녔던 이야기부터 가람의 할아버지, 어린 '준태'가 등장합니다.
준태의 아버지는 오래 전 집을 떠나 독립운동을 하는 분이었어요. 준태는 어머니와 단둘이 살면서 나물죽도 배부르게 먹지 못할 정도로 어렵게 살고 있었어요. 숨겨두었던 얼마 되지 않는 쌀도 친일파 무리에 빼앗기기 일쑤였지요.
반면에 같은 반에는 친일파 아버지를 둔 '승우'라는 아이가 있어서 준태와 다툼이 일어나기도 했고요. 어른들도 말 한마디라도 친일파의 비위를 거스르면 주재소로 끌려가 피투성이가 될 때까지 맞기도 하던 때였어요.
척박하게 살아가는 어린 준태의 마음을 달래주는 건 아름다운 마을 풍경과 친구 난이였어요.
산에는 떡갈나무, 신갈나무, 물참나무가 하늘을 향해 쭉쭉 뻗어 있었다. 올려다보면 잎사귀 사이로 열매가 올망졸망 매달려 있었다. 아래로는 칡넝쿨이며 풀이 잘 자랐고 꽃들이 어울려 피었다. 이러한 산 속 풍경이 준태의 기분을 풀어 주었다. (49쪽)
시간이 흘러 일제강점기가 끝나고 광복을 맞이한 마을에서 친일파였던 승우 가족은 비참하게 쫓겨납니다. 준태의 집으로는 드디어 아버지가 돌아왔어요. 준태 아버지가 더 큰 분풀이를 막아준 덕분에 승우네는 목숨을 부지하고 떠날 수 있었지요.
"우리는 하나입니다. 같은 피를 나눈 동포란 말입니다. 서로 싸우고 시기하는 동안에 우리나라는 침략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나라를 빼앗겼습니다. 36년 동안 우리가 받은 고초를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가 하나로 뭉쳐 힘이 있었다면 나라를 빼앗기기는 쉬워도 찾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알았습니다. 이제부터라도 우린 뭉쳐야 합니다. 한마음으로 모아서 일어서야 합니다." (60쪽)
준태는 집으로 돌아온 아버지와 농사일도 하고, 낚시도 하고, 함께 시간을 보내며 오랫동안 나누지 못 했던 가족의 정도 쌓았어요. 산 속 동굴로 거처를 옮긴 승우를 다시 만나 그간의 오해도 풀고 난이까지 셋이 자주 어울리게 되었고요.
그러나 잔잔한 강물처럼 평온하게 흐르던 시간은 그리 길지 않았어요. 승우는 더 멀리 떠나게 됐고, 준태의 아버지도 '더 옳은 일'을 하기 위해 다시 집을 떠나게 됩니다. 곧 일을 끝내고 돌아오겠다는 약속과 어머니를 부탁한다는 당부를 남긴 채 집을 나선 아버지를 다시 만나게 된 게 50년도 훌쩍 지나 어린 준태가 할아버지가 되고, 손주 가람이가 자라고 있는, 지금입니다.(이 책은 2004년 《내일로 흐르는 강》으로 출판되었고, 2022년 《소양호에 핀 꽃》으로 새로 나왔다고 합니다.)
증조할아버지가 떠난 뒤에 할아버지가 겪어야 했던 많은 일들은 열대여섯 살에 불과했던 준태가 감당하기엔 힘든 경험들이었어요. 친구 난이 가족과 승우, 어머니와 얽힌 일들은 간단하게 줄여서 쉽게 써내려가기가 어려워요.
일제강점기를 지나 동족상잔의 비극 안에서 흩어지고 무너진 가족이 얼마나 많았을까요. 강원도 인제가 고향이라고 적혀 있는 작가의 소개글과 머리글을 보면 소설의 배경이 된 38선마을이 지금은 소양댐 수몰 지구로 사라졌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요. 고향 마을이 사라지고, 세월이 흘러 마을 사람들도 세상을 떠나가고, 남아있는 사람들의 기억에서도 사라지기 전에 한 권을 책으로 그 곳의 역사를 남긴 일이 묵직한 감동으로 다가왔어요.
이 책에 나오는 이야기처럼 가족이 생이별을 하고, 다시는 만날 수 없었다는 사연도 셀 수 없이 많겠지요. 역사를 멀리 거슬러 올라가지 않아도 돌아가신 조부모님들은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을 겪으셨고, 제 부모님도 한국전쟁 중에 태어나셨어요. 특히 아버지는 유복자로 세상에 나와 평생 외로움을 견디는 삶을 살아오셨고요.
이제는 제 아버지가 칠순이 지난 할아버지가 되었는데, 여전히 친할아버지의 생사나 소식은 전혀 알 수 없습니다.
어릴 때부터 친할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들을 조금씩 들을 수 있었지만 자세한 가족사도 알지 못 해요. 친할머니도 너무 젊었을 때 급작스럽게 헤어지게 되셨고, 아버지는 태어나기도 전이었으니까요. 친할머니가 돌아가신지도 30년이 다 되어가니 가슴아픈 젊은 시절 이야기를 전해들을 기회도 없었지요.
이 책을 읽으면서 과거의 준태와 현재의 가람이를 통해 제 아버지가 안고 살아야 했던 오래 묵은, 또 깊은 상처일 수밖에 없는 일들을 생각해 봤습니다. 아버지가 친할아버지를 만날 수 있었다면 얼마나 가슴 벅차하셨을지.
한국전쟁이 끝난지 이제 70년이 되어가고, 아직 우리나라는 분단국가로 휴전 중입니다. 세상이 지금처럼 발전하고 변화하기에 충분히 긴 세월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아직 많은 어르신들은 한국전쟁을 어제 일처럼 기억하며 저마다 가슴 아픈 역사를 안고 살고 계십니다.
끊임없는 강물의 흐름처럼 눈부신 기억들과 함께 아픈 역사도 우리의 삶 속에서 숨을 쉬듯 지나가겠지요. 봄이 오면 어김없이 꽃이 피는 것처럼 기나긴 휴전도 끝나고 진정한 평화가 찾아오길 바라는 마음이 커지는 겨울입니다. (*)
준태는 마루 끝에 앉아서 비가 내리는 것을 바라보았다. 빗방울이 바닥에 떨어지면서 골을 팠다. 그 골을 따라 빗물이 낮은 곳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신기하지? 빗물이 제 갈 곳을 찾아가는 게 말이야."
아버지가 옆에 와서 앉으며 말했다.
"빗물이 어디로 가는 건데요?"
준태는 여전히 앞을 보며 물었다.
"소양강으로 가겠지. 그러고는 결국 바다로 흘러들지. 바다로 간 물은 하늘로 올라가서 다시 비가 되고, 그렇게 순환하는 거야. 사람들은 때때로 앞에 보이는 것만 바라보지. 저 빗방울처럼 말이야. 그 다른 면까지 본다면 서로를 더욱 이해하게 될 텐데." (64-6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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