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이름은 복돌··· 아니지, 김복현이야. 나이는 열세 살, 먹을 만큼 먹었단 말씀이지. 김, 만 자 석 자 쓰시는
아버지랑 이씨 부인인 어머니랑 살고 있어. 우리는 한 달쯤 전에 여기 경상도 단성현 성내리로 이사를 왔어. 내 고향은 원래 금봉리라는
촌구석인데, 사정이 있어서 이리로 이사 오게 되었어. 그 바람에 불안친구 자근노미랑 갓동이랑도 헤어지게 되고 예쁜 큰년이까지 못 보게 되어
버렸지 뭐야. 아무튼 아는 사람 없는 이곳으로 이사 오는 것이 너무 싫었지만, 아버지께서 이사해야 한다고 하니까 별수
없었어.(본문 8쪽)
복돌이, 가 아니라 복현이의 이야기로 시작되는 이 책의 첫 문단입니다. 청어람주니어의 '숨 쉬는 역사' 시리즈의 열
번째 책인 《소년 검돌이, 조선을 깨우다》는 낯선 곳으로 이사하자마자 새로운 서당에서 훈장님과 학동들을 만나게 되는 복현이의 시선에서 이야기가
시작됩니다.
서당에서 다른 양반 학동들 사이에서 더벅머리에 키가 훌쩍 크고 비쩍 마른 검돌이가 눈에 띕니다. 검돌이는 서당에서 허드렛일을 하며
공부를 하는 소년이었어요. 《천자문》을 대충 중간쯤 배운 복현이와 다르게 검돌이는 한참 전에 《천자문》을 다 떼고 훨씬 어려운 《중용》을 외고
있었습니다. 성격도 대범하면서 장난기가 있고, 기지도 있으며 왠지 형 같기도 해서 척 봐도 여간내기가 아니란 걸 알 수
있지요.
"날도 좋은데, 잠시 나가서 바람을 쐬는 것은 어떻습니까?"
주위가 조용해지며 다들 나를 쳐다보았어.
"글을 읽는 것도 좋지만, 가끔은 자연과 벗하며 호연지기를 기르는 것도 군자의
덕목이 아닙니까?"
"훈장님께서 안 계신다고 게으름 피우잔 말이냐?"
터줏대감이 찡그린 얼굴로 말했어.
"아니, 사형들께서 절구라도 한 수 지으시면 훈장님께서도 좋아하실
것입니다."
어때, 호연지기니 절구니 읊어 대서 깜짝 놀랐지?(···)
(본문 47쪽)
한편, 아이들의 장난과 텃세에 고단해하던 복현이는 학동들에게 먹을거리를 돌리고 분위기가 좋아지니 마음이 느긋해졌습니다. 제법
호기롭게 밖에 나가 놀자는 제안도 해보고요. 물가에서 학동들과 어울려 놀며 금새 가까워지는가 싶었는데, 훈장님께 드리려고 따로 놔둔 음식들이
망가지는 사건이 일어납니다.
이때도 검돌이의 활약은 눈부셨지요. 학동들의 진술과 알리바이를 재구성하며 수사(?)에 착수하고, 실제로 모든 일을
꿰뚫어보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습니다. 작가는 경찰학을 공부하고 추리소설로 상을 받기도 한 필력을 바탕으로 이 책 곳곳에 미스터리한 사건의 실마리를
숨겨놓았습니다. 그 실마리를 잡는 건 역시 영리한 검돌입니다.
시간이 흐르며 복현이는 동네에 완전히 적응을 하고, 검돌이를 비롯해 학동들과 서당
생활도 마음 편히 할 수 있게 되었어요. 어느 날 갑자기 검돌이가 서당에서 보이지 않게 되기 전까지는 말입니다. 검돌이가 왜 서당에 나오지
않는지 아직 알아낼 수는 없었지만 복현이는 이때 관아에서 나눠 준다는, 쌀보다 쌀겨와 돌멩이가 더 많은 형편없는 환곡미를 높은 이자로 갚아야
하는 문제에 대해 처음 전해듣습니다. 날이 갈수록 궁금증과 걱정이 더해가던 중에 검돌이와 마주친 복현이는 검돌이의 집에 큰일이 생긴 것도 알게
됩니다.
"네가 나설 일도 아니고, 나선다고 될 일도 아니다."(본문
108쪽)
검돌이를 돕고 싶은 마음에 도움을 청하던 복현이는 아버지께 크게 혼났습니다. 훈장님 역시 세상을 바꿀 힘을 키우지 못 한 채
섣불리 나섰다가는 검돌이에게 도움도 줄 수 없고 괜히 일만 키우게 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부당한 일을 고발하려다가 고초를 겪게 된 검돌이의
아버지를 어떻게 도울 수 있을지 복현이는 큰 고민에 빠집니다.
"그럼, 아무것도 하지 않고 손 놓고 앉아 탄식만 해야 한단 말씀입니까?"
절로 눈이 부릅떠졌어.
"아니지, 네가 더 높은 벼슬아치가 되어 탐관오리들을 쓸어 내고 바로잡으면
되는 것이지. 네가 정말 이 세상을 바꿔야겠다고 생각한다면 무작정 덤비다가 쓰러질 것이 아니라 준비를 해야 한다. 학문에 정진해서 세상을
올바르게 바꿀 방법을 배우고, 백성을 아끼는 방법을 배우고, 큰 세상에 나가 네 뜻을 펼칠 기회를 얻어야 하는 법이다. 그런데 너는 세상을
차근차근 제대로 바꿀 생각은 하지 않고 어리석은 힘으로 계란으로 바위 치기를 하려고만 하는구나."(본문
111쪽)
생각이 많아지고 마음이 답답했던 복현이가 맞닥뜨린 건 더 힘든 일이었습니다. 더이상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검돌이는 비참하고 억울한 처지가
되었으니까요. 검돌이는 안간힘을 쓰며 이치에 맞는 말과 행동으로 맞서보지만 오히려 곤욕을 치를 상황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복현이가 염려하는
마음과 다르게 상황은 더 안 좋은 쪽으로 흐르고, 검돌이를 만나기 어려워지게 됩니다.
어수선한 세상에서 복현이는 마음을 잡고 열심히 책만
읽습니다. 복현이는 모르는 것도 아는 척 읊어대며 놀기 좋아하던 철부지가아니었습니다. 훈장님 말씀대로 큰 세상에 나가 뜻을 펼치려면 공부를 해야
한다는 마음으로 책을 들었겠지요.
"태어나기를 양반으로 태어났든, 돈을 주고 양반을 샀든, 그게 무슨 상관이야? 난 정말로 양반 피를 받은 사람하고 상논
피를 받은 사람이 근본적으로 다르다고 생각해? 난 그렇게 생각 안 해. 그건 그냥 운이고 모든 건 자기 할 탓인 거야. 이 조선이 양반, 상놈
가리지만 않았어도 더 잘 살 수 있었을 텐데. 조선에서 사람 구실하고 살려면 양반으로 태어나든, 돈이라도 많아서 양반을 사든 해야
하잖아.(···)"(본문 138쪽)
검돌이가 어디론가 떠나기 전에 남긴 이 말이 복현이의 마음에도 불편하게 자리를 잡았을 것 같습니다.
검돌이는 아버지가 겪은 고초에서 비롯된 억울한 마음을 떨쳐낼 수 있을까요?
머지않아 읍내에 난리가 났을 때도 복현이는 예전의 검돌이처럼 서당에서
늘 책만 보고 있을 즈음이었습니다. 시위를 주동하는 사람들은 집집마다 집회에 모이라며 문을 두드리고 다녔어요. 곧 수백 명의 사람들이 긴 행렬을
이루어 의기양양한 기세로 관아로 향합니다. 과연 사람들이 외치는 "새 세상!"이 열릴까요?
조선 후기, 단단한 신분제도와 부패한 벼슬아치들은 결국 평범한 백성들을 거리로 뛰쳐
나오게 했어요. 소수의 특권층만 살기 좋은 세상이 아닌 이름 없는 만백성들도 각자의 꿈을 꾸고, 세상의 주인이 되기를 바랐습니다.
비뚤어진
세상을 바로세우기 위해 애썼던 복현이나 검돌이같은 소년들의 외침은 지금, 여기, 우리와 연결되어 있다는 걸 느낄 수 있었어요. 조선시대와
시간상으로는 상당히 멀어진 21세기를 살고 있는 우리지만 보이지 않는 권력과 압박에서 완전히 벗어났다고 할 수 있을까요?
작가의 말에서 볼 수
있듯이 복현이나 검돌이는 역사책에 이름이 오른 실제 인물이 아닙니다. 하지만 그 당시 백성들의 분노가 들불이 번지듯 곳곳에서 농민 봉기로
이어지며 수많은 복현이나 검돌이같은 소년들도 새로운 세상을 꿈꿀 수 있었을 것입니다.
작가의 상상 속에서 안간힘을 쓰며 더 나은 세상을 향해 진격했던 소년들은
그 이야기 속에서 살아숨쉬고 있어요. 그러니 마음을 다해 소년들의 아픔과 성장을 다독여 주고 싶었습니다. 조선 후기 당시에도 양반 세력의 반대로
세상을 완전히 바꾸지는 못했지만 그때부터 평범한 사람들이 주체적으로 새 역사를 써내려가며 불평등에 분노하고 저항했던 사회의식은 잃지 않아야
겠습니다.
시대 배경을 떠올려보게 하는 그림도 이야기와 잘 어울리고, 어려운 낱말은
해당 페이지 하단에 찾아보기 쉽게 풀이가 되어 있는 점이 좋았습니다. 또한 책의 이해를 돕는 이미지, 문헌 자료 등이 적절하게 들어가 있어서
초등학교 고학년 아이들과 함께 읽기를 권하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