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냥 보고 있으면 안 되는”데도 도무지 눈을 뗄 수 없었던 장면처럼, “눈을 감고 있어도” “눈꺼풀에 남아” 있는 잔상(「잔상」 中)처럼 아이는 그렇게 남아 있을 것이다. 화자는 아이의 눈과 머리카락, 표정과 같은 그 모든 것에 대해 “말하지 못하고” “묻지 못한다”고 말한다. 죽음의 육중한 공백 앞에서 말과 소리란 얼마나 가벼운 것인지 시인은 잘 알고 있는 것 같다. 대신 시 속에서 화자는 이렇게 말한다. “복통을 느끼면서 이미 쓴 이 글을 또 쓰고/몇 년 뒤에 꼭 같은 글을 쓸 뿐”이라고. 그렇게 쓰인 글이 바로 이 시일 텐데, 시인은 이것이 되풀이된 글이며 언젠가 또다시 되풀이될 글이라고 말하는 듯하다. “2월 18일 오전 9시 53분”이 내년이면 또 어김없이 돌아오는 것처럼 말이다.
이 시에서 화자가 건네받은 시적 순간은 어디쯤에 있을까. 있다면 그것은 “2월 18일 오전 9시 53분”과 관련이 있지 않을까. 아이라는 공백 주위에 좌표처럼 박힌 숫자들. 적어도 우리에게 시계가 있고 달력이 있고 문명이 잔존하는 동안이라면 아이에 대한 그 기억은 침묵의 온갖 틈새에 숨어있다 해마다, 때마다 우리를 찾아올 것이다. 누군가는 이미 쓴 글을 또 쓰고, 어디인가에선 아이가 썼던 시를 되뇔 것이며, 또 어느 누군가는 까만 빛이 도드라지는 눈동자와 머리카락을 흰 스케치북 위에 그리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이 장면들은 아이에 대해 이야기하고 발산하는 일과 상관이 없다. 이 고요하고 가만한 다정함의 회로는 아이를 귀 기울여 듣는 일, 바로 그것이다.
누군가 낭독을 시작할 때 “그의 목소리가 너무 작아서 다들 더 조용히”(「경청」 中) 하는 것처럼, 너무 작아지다 못해 이제는 ‘없는’ 존재를 듣기 위해 우리 모두가 숨죽일 때, 그는 비로소 우리에게 말 걸어올 수 있지 않을까. 세계가 끝나갈 때조차 우리에게 마지막으로 남는 힘이 있다면 바로 이 ‘경청’의 힘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