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나는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의 경비원입니다 - 경이로운 세계 속으로 숨어버린 한 남자의 이야기
패트릭 브링리 지음, 김희정.조현주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23년 11월
평점 :
품절
다른 사람도 그런지 모르겠지만 적어도 나에게 책은 운명처럼 다가온다.
지난 달에 읽었던 정여울 작가의
'오직 나를 위한 미술관' 에 이어
미술관을 소재로 한 또 다른 책
'나는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의 경비원입니다'
를 읽었다.
그림을 보며 치유를 받고 다시 나아갈 힘을
얻는다는 정여울 작가의 이야기와 비슷하면서도
뭔가 또 다를 것 같은 궁금증이 이 책을
집어들게 했다.
'나는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의 경비원입니다'
(패트릭 브링리 지음, 김희정, 조현주 옮김,
웅진지식하우스 펴냄)는 전직 <뉴요커>기자였던
저자가 10년간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의 경비원으로
생활하면서 미술관에서, 예술 작품에서, 때로는
관람객들을 보며, 그리고 동료 경비원들과
함께한 시간을 통해 슬픔을 잊고 다시 삶을
시작하게 된 이야기를 적은 에세이이다.
작가는 암투병 끝에 세상을 떠난 형을 보내고,
어머니와 친척 집을 방문했다가 미술관에
가게 된다. 어릴 때부터 형, 어머니와 미술관을
자주 방문했던 그는 그곳에서 마음을 대변해주는
그림을 마주한다. 그리고 어머니 역시 그녀의
마음 같은 '통곡'의 그림 앞에서 눈물을 흘린다.
위대한 그림은 거대한 바위처럼
보일 때가 있다.
말로 표현하기에는 너무 냉혹하고,
직접적이며 가슴을 저미는
바위 같은 현실 말이다.
<나는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의 경비원입니다> 페트릭 브링리, 웅진지식하우스
무대에서 연기를 하는 배우나
노래하는 사람들을 볼 때면
나도 모르게 눈물 샘솟을 때가 있다.
그들의 표정과 노래, 선율, 몸짓이
마음 속 깊이 꾹꾹 눌러놓았던
감정들을 일으켜 파도 치게하고,
산산이 부서뜨려 다시 눈물로 돌아가게 한다.
그런데 그림 역시 다르면서도 같은 힘을
가지고 있는 것 같다. 가만히 들여다보면
수많은 이야기를 던지고,
많은 것을 느끼게 한다는 점이 그렇다.
형을 보내고 어머니와 함께 방문했던
필라델피아 미술관에서 마주한
그림 '경배'와 '통곡'은
그가 처한 바위 같은 현실을 변하게 했다.
꾸역꾸역 앞으로 나아가기만을 위해 애를 쓰는
삶이 아닌 오로지 아름답기만 한 세상에서
시간을 보낼 수 있는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의
경비원이 되기로 했기 때문이다.
예술 작품은 말로 단번에 요약하기에
너무 거대한 동시에 아주 내밀한 것들을
다루는 경우가 많고,
오히려 침묵을 지킴으로써
그런 것들에 관해 이야기 한다.
<나는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의 경비원입니다> 페트릭 브링리, 웅진지식하우스
책을 읽으면서 종종 정여울 작가가
떠오르기도 했다. 마음이 우울하고,
힘들 때면 미술관을 찾아가 한참 동안
그림을 마주하는 정여울 작가와
이 책의 저자 페트릭 브링리의 모습이
너무도 닮아 있었기 때문이다.
과연 그림들은, 고대의 유물들은,
화가의 손끝에서 피어난 조각상은
나에게 어떤 이야기를 들려줄까?
미술관에 꼭 방문해야할
이유가 분명해졌다.
곽희의 '수색평원도'를 묘사하는
그의 글은 눈 앞에서 마치
고요한 풍경들이 살아 움직이는 것
같기도 했고, 내가 그 그림 안에 들어가
있는 듯한 상상을 불러 일으키기도 했다.
또 미국의 거대한 미술관에 동양화가
걸려 있으리라곤 상상조차 해본 적이
없는데 예상하지 못한 공간에서
마주하는 동양화의 느낌이란 어떤 것일지
궁금해지기도 했다.
어느 예술과의 만남에서든
첫 단계에는 아무것도
하지 않아야 한다.
그저 지켜봐야 한다.
자신의 눈에게 작품의 모든 것을
흡수할 기회를 주는 것이다.
(중략)
이상적으로는 처음 1분 동안은
아무런 생각도 해선 안된다.
예술이 우리에게
힘을 발휘하기까지는
시간이 필요하다.
<나는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의 경비원입니다> 페트릭 브링리, 웅진지식하우스
작품들을 오래 마주하면서
작가는 자신만의 작품을 감상하는
방법을 터득하게 됐다. 그리고
아직 미술 작품을 제대로 감상할 줄 모르는
나는 그의 방식을 따라해볼까 한다.
가장 아름다운 곳에서 가장 단순한 일을
하며 작품을 감상하고, 삶의 의미를 발견하던 작가는
점차 관람객, 그리고 함께 일하는 동료와의
소통을 통해 인생을 새롭게 깨달아간다.
경비원이라면 누구라도
어두운 푸른색 근무복 아래
슬쩍 숨겨둔 비밀스러운 자아 하나쯤은
갖고 있기 마련이다.
<나는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의 경비원입니다> 페트릭 브링리, 웅진지식하우스
이 문장을 읽으며 경비원 말고도
우리 주변의 수많은 사람들 역시
각자의 사회적 역할 뒤에
드러내지 않는 자아 하나쯤은
갖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그렇기에 그 누구도 함부로 대하거나
가볍게 생각해서는 안될 것이다.
예술과 씨름하고, 나의 다양한 측면을
모두 동원해서 그 예술이 던지는 질문에
부딪쳐보면 어떨까?
예술을 경험하기 위해 사고하는 두뇌를
잠시 멈춰뒀다면 다시 두뇌의 스위치를
켜고 자아를 찾아보는 것도 좋지 않을까?
그렇게 하면 더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지 않을까?
<나는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의 경비원입니다> 패트릭 브링리, 웅진지식하우스
미술관을 방문하면 도슨트와 함께
작품을 감상하는 기회를 가질 수 있다.
이를 통해서는
작품의 배경, 작가의 삶, 작품에 대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다.
아이들을 데리고 방학을 맞아
미술관을 방문할 때 도슨트 프로그램을
이용했던 경험이 있다. 그런데
미술에 대한 책들을 여러권 접하고 나니
내가 아이들에게 미술관을 지식의 장으로만
접하게 하는 실수를 저질렀음을 깨닫게 됐다.
사실 작품의 시대, 작가의 삶도 중요하지만
그 보다 더 중요한 것은
작품이 나에게 하는 이야기,
그리고 내가 그 작품을 통해 느끼고, 깨닫고,
변화하게 되는 계기, 그게 진정한 예술의
가치임을 뒤늦게 알아간다.
혹시 다음에 아이들과
미술관을 방문하게 된다면
나도 작가의 어머니처럼 미술관 곳곳에
흩어져 각자에게 말을 걸어오는 작품을
마주하고, 작품을 통해 나를 새롭게
알 수 있는 시간을 줘봐야겠다는 다짐도 해봤다.
여러분은 예술이 제기하는
가장 거대한 문제들에 대해
의견을 피력할 자격이 있습니다.
그러니 아무도 자기 생각을
들을 수 없다는 사실에 기대어
용감한 생각, 탐색하는 생각, 고통스러운 생각,
혹은 바보같을 수도 있는 생각들을 해보십시오.
그것은 맞는 답을 얻기 위함이 아니라
우리가 늘 사용하는 인간의 정신과
마음을 더 잘 이해하기 위함입니다.
<나는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의 경비원입니다> 패트릭 브링리, 웅진지식하우스
우리가 예술을 감상하는 것은
답을 맞추기 위함도 아니고,
답을 얻기 위함도 아닌
인간의 마음과 정신, 우리가 살아가는
세계를 더 잘 이해하기 위함이라고
말하는 그의 글을 통해
삶에서 예술의 중요성에 대해
다시 생각해볼 수도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