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어의 온도」를 읽고
최정성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은 신발 가계의 신발 종류만큼 많은 종류의 것들이 있다. 그러나 그 신발들도 범주화 시켜서 부츠, 운동화, 구두 등으로 단순화 시킬 수 있듯 관점도 그러하다. 내가 부츠를 신지 않듯 ‘이기주 작가’의 「언어의 온도」는 내가 사물을 관찰하는 관점과는 전혀 다른 관점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그는 그것을 ‘온도’라 표현한 듯하다.
그가 이 책을 언어의 온도라고 작했을 시에는 분명 기대한 효과가 있을 것이다. 그것은 따뜻하고 온화한 온도를 의미하는 것이리라. 그러나 나에게 이러한 관점과 목적성은 분명 불편한 그것이다. 저자는 현상을 언어로 표현하면서 그러한 것에 의미를 과잉하여 독자로 하여금 긍정 혹은 윤리적 긍정성을 강요한다.
우리는 슬픈 이야기와 신파를 구분할 수 있다. 언어의 온도는 나에게 신파와 같았다.

“감동을 받아라. 넌 감동을 받아야 한다.
이세상은 아름답다.
나의 저작은 너에게 감동을 줄 것이니 넌 감동을 받아라”

고 강요한다. 감정적 피로감을 준다. 이러한 관점은 의미를 과잉시키며 이 의미의 과잉은 로캉테의 메스꺼움을 나에게 전이 시킨다.
그러나 놀라운 점은 이 책이 8주 연속 베스트셀러였다는 사실이다. 즉 이 책에 대한 나의 주관적 급진을 후퇴시키는 실증이 주어진 것이다. 왜 우리는 의미의 과잉에 열광했던 것인가? 그것은 우리의 삶의 현상이 의미를 과잉 시켜야 만족할 만큼 의미의 부제에 놓여 있는 것은 아닌가? 이러한 의문에 내재적 심도에 침착되었을 때에 대중이 만들어 준 명성과 작가의 의도가 이해가 되었다. 그러나 논리실증주의자들의 그 명제적 진술처럼 사실 명제가 강력하더라도 그것은 미학적이지 않다. 결국 우리는 당위의 논쟁에선 줄다리기에 들어가야 할 것이라. 열광적인 것이 ‘좋음’이 될 당위는 없다. ‘좋음’의 이데아는 ‘좋음’의 당위에 있는 것이지, 인기에 있지 않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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