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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밤 내가 죽인 소녀 부크크오리지널 4
장은영 지음 / 부크크오리지널 / 202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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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요즘 추리 소설을 참 많이 읽는 것 같다. 사실 소설을 즐겨 읽는 편은 아닌데... 어쩌다 보니 최근에 읽은 소설이 다 추리 소설이었다. 얼마 전에 테라피스트도 읽었고 그전에 읽은 소설도 추리소설이었다. 최근 읽은 추리 소설 중에서 당연코 "그날 밤 내가 죽인 소녀"가 가장 흥미진진했다.

이 책의 내용은 복수극 같은 복수극 아닌 복수극 같은 이야기이다. 한 소녀가 죽었고 그 소녀의 죽음과 연관이 있는 일곱이 납치 감금되어 범인 찾기를 하는 이야기다. 줄거리 소개는 여기까지. 진짜 재미있는 책이다. 강력 추천!!

나의 리뷰가 늘 그러했으니 오늘도 여기까지만 쓰고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나 하련다.

이제부터 리뷰 시작!! 

(여기서부터는 스포가 있을 수 있으니 주의 바랍니다.)

이 책이 재미있는 것은 감금도 납치도 아니다. O라는 인물이 소설을 쓰고 그 소설의 내용이 현실에서 발생한다는 것이다. 

난 이 지점이 읽는 동안 너무 좋았다. 아니, 이것이 핵심이라 생각했다. 소설이 있기에 사건이 발생한 것일까? 아니면 O가 현실에서 이야기를 구현하기 위해 소설을 쓴 것일까? 그렇다. 난 처음부터 O를 의심했다. 사실 너무나 당연한 의심 이리라. 그렇지 않다면 작가님이 O의 소설을 소개할 이유가 없으니깐. 그렇지만 마지막 반전으로 작가님께 뒤통수 빡!! 아파라.... 너무 즐거웠다. 이 책은 아휴 그냥 뒤통수를... 뒤통수가 아주 너덜너덜 해졌다. 감사합니다. 작가님.

그럼 다시 돌아와서 언어가 현실을 만드는 것일까? 현실이 언어로 표현되는 것일까? 왜 O는 자신의 사건을 소설로 쓴 것일까? 난 이것이 가장 재미있는 함정이라 생각한다. 언어는 과연 현실 혹은 리얼일까? 

라깡은 상상계, 상징계, 현실계 이 세 가지 계로 세계를 구분한다. 여기서는 상징계를 중심으로 이야기해보자. 상징계는 언어의 세계이다. 언어의 세계인 상징계는 현실계가 아니다. 그러나 우리는 상징계가 리얼이라고 생각한다. 그렇기에 현실계는 잠시 나타났다가 사라진다. 왜냐하면 이 현실계도 곧 상징, 즉 언어에 포섭되기 때문이다. 

소설의 초반(프롤로그)에서 O의 소설을 등장인물들이 분석하고 평가하는 장면이 나온다. 그들은 언어로 구현된 세계가 자신들의 현실이 될 것을 모르고 이러쿵저러쿵 비평한다. 그러나 그들은 곧 자신들이 비평했던 현실 속에 빨려 들어간다. 즉 그들은 자신들이 비평하고 평가질 했던 그 언어의 세계에서 최후를 맞이한다. 그들은 상징계에서 나와 현실계로 나아가지 못하고 자신들의 생을 상징계에서 마무리한다. 

그러나 진범(밝힐 수 없다. 그대도 뒤통수의 아픔을 맞보길 바라기에)은 상징계와 현실계를 오가며 존재한다. 에필로그에서 나오는 이야기를 작가님께 물어보고 싶을 지경이다. 진범이 한 말"문장도 그렇고, 제가 쓰던 문체랑은 너무 다른데."라는 표현이 진범의 글이 아니라 O의 글이라는 뜻인지를. 난 에필로그에 나오는 그 글은 진범이 아닌 O의 글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야 진범이 진정한 진범이 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상징의 세계를 넘어선 존재, 현실계와 상징계를 넘나들 수 있는 존재라면 그는 자신의 사건을 언어로 남겨 상징계에 예속시키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삶을 산다. 그러나 우리의 삶은 라캉의 통찰에 따르면 상징계이다. 우린 이것을 벗어나지 못한다. 그렇기에 우리의 욕망은 타자의 욕망이다. 작중의 인물들도 그러하다. 그들은 자신의 욕망에 따라 사과에게 어떤 행동을 했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의 욕망이 아닌 진범의 욕망에 따라 행동했다. 상징계에 머무는 그들에게 현실계를 넘나드는 어떤 존재는 일종의 대타자가 된다. 그렇기에 그런 존재는 있어서는 안 된다. 그러나 우린 그런 존재를 일상에서 품고 누군가를 죽이며 살아간다. 언어는 일종의 법칙을 만든다. 우린 언어의 논리 구조로 사유하고 판단한다. 그렇기에 언어는 일종의 구조와 같다.

우리는 이 언어가 지시하는 욕망으로 살아간다. 마치 작중 인물들이 진범의 명령에 따라 욕망하고 행동하듯. 그것을 구체적으로 무엇이라 딱 잘라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가장 그러한 것에 가까운 것은 아마도 자본의 명령이 아닐까 싶다. 착취의 구조에 눈감고 누군가를 죽이면서 우린 살아간다. 나는 동의하지 않았다고 나는 직접 누군가를 착취하지 않았다고 생각할지 모른다. 그러나 자본의 구조에서 우리의 역할은 바로 그것을 인지하지 못하는 것이리라. 그렇게 구조는 우리에게서 현실을 빼앗아 간다. 우린 스펙터클의 세계를 통해 보이는 것을 보며 그것이 현실이라 믿고 나의 욕망이 나의 것이라 믿고 살아간다. 그러나 라캉의 통찰에 따르면 이건 허무한 맹신이다. 나의 삶이 아닌 타자의 욕망을 실현하는 삶, 소설로 치환한다면 진범에게 조종당하며 진범이 그리고자 한 세계 혹은 이야기 혹은 상징계의 구현을 위해 이용당하게 된다. 그렇게 소설 속의 진범은 자신의 세계를 완성하고 작중 인물들은 이용당한다. 마치 우리가 현실이라 믿는 이 상징계를 살고 있는 우리들처럼. 이 책은 내게 묻는 듯하다. 넌 너의 삶을 살고 있느냐고.


당신의 욕망은 과연 당신의 것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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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9년 은일당 사건 기록 - 사라진 페도라의 행방 부크크오리지널 3
무경 지음 / 부크크오리지널 / 202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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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자의 욕망이 충돌한다. 숨기려는 자, 밝히려는 자 그리고 살아남으려는 자. 이들을 통해 펼쳐지는 흥미진진한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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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9년 은일당 사건 기록 - 사라진 페도라의 행방 부크크오리지널 3
무경 지음 / 부크크오리지널 / 202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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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나 자신을 위해 혹은 자신을 지키기 위해 어떠한 행동을 한다. "1929년 은일당 사건기록"에 등장하는 인물들도 자신을 지키기 위하여 행동한다.
그러나 이러한 자기 보호의 행위가 언제나 보편적 윤리의 측면에서 인정되는 것은 아니다.
이 책의 배경은 일제강점기 시대의 조선이다. 희망과 좌절이 공존하는 시대, 그리고 그러한 시대적 상황을 잘 보여주는 인물들이 등장한다. 그리고 이 각 인물들은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혹은 그 시대에서 살아남기 위해 각자의 방법으로 생을 살아가고 사건을 발생시킨다.
이 이상의 이야기는 쉽지 않을 듯 하다. 이 책은 추리소설이기에 스토리를 이야기하는 것은 좀 무리가 있을 듯 하다. 다만, 이 책을 읽으실 때, 시대적 상황을 고려하면서 읽는다면 그 즐거움이 가중 될 것이라고 추천드리고 싶다.
책을 읽는 방법에는 다양한 방법이 있지만, 작중의 한 인물을 중심으로 주변을 읽는 것도 한가지 방법이리라.
나는 이 책을 읽을 때, 주인공 보다는 미나미라는 인물을 중심으로 읽어보시길 추천 드립니다. 그 이유는.... 밝힐 수 없지만....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그리고 미나미를 중심으로 읽으면서 한나 아렌트의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이 떠올랐다. 아렌트는 아이히만의 재판과정을 기록하면서그녀의 철학적 통찰을 통해 인간에 대해 이야기 한다. 일명 악의 평범성.
그러나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은 철학서가 아니라 일종의 재판 보고서이기에 보다 구체적인 철학적 논의로는 발전되지 않는다. 난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을 읽은 후 아도르노와 호르크하이머의 "계몽의 변증법"을 읽어보길 추천 드린다. 악의 평범성이라는 것이 단순이 누구나 악인이 될 수 있다는 내용이 아니라 체제의 틀이 어떻게 인간을 집어 삼키는 지를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아렌트는 아이히만이 명령에 대해 스스로 가치 판단을 하지 않았다고 이야기 한다. 그러나 난 그것이 불가능에 가까운 것이라고 이야기 하고 싶다. 그리고 그 이유는 "계몽의 변증법"에서 발견될 수 있다.
분명 미나미와 아이히만은 다르다. 그러나 유사해 보였다. 그리고 미나미를 보면 인간이 체제에서 벗어나 오롯히 올바르게 살아가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가를 보여준다. 미나미는 분명 좋은 사람이다. 그런데 그가 속한 시대와 공간이 그를 이중적으로 만든다. 그는 분명 무엇이 올바른지 알고 있지만 동시에 어떻게 해야 살아남는지도 알고 있다. 그는 계몽의 변증법이 이야기하듯 체제 속에서 이성을 사용하는 법을 잘 알고 이를 통해 자기 업적을 이루어 나갔으리라. 그러나 미나미는 한 번도 자기 이성을 체제를 재구축하는 것에 사용하진 않는다. 그저 체제 안에서 체제를 위해 합리적으로 그리고 효율적으로 이성을 사용할 뿐. 다만, 자신이 처한 혹은 속한 집단의 체제의 가면에서 벗어나면 그는 또다른 인물이 된다.
난 인간의 이러한 모습을 이 책 "1929년 은일당 사건기록"이 잘 보여주고 있다고 생각한다.
추리소설을 좋아하시는 분께 추천드리며 리뷰를 마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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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에서 내려온 전화 부크크오리지널 2
글지마 지음 / 부크크오리지널 / 202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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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무엇으로 생의 의지를 소유할 수 있는 것일까? 아니, 인간은 왜 죽음 충동에 사로잡히는 것일까?
이러한 물음에 많은 답들이 늘어지게 나올 것이다.
어떤 이들은 인간의 생의 의지를 그저 동물적 감각이라 생각한다. 또 어떤 이들은 멋진 이유를 붙여 설명하기도 한다. 여기서 하나의 의문이 든다. 그렇다면 생의 의지란 무엇일까? 이 물음에 답을 찾기 위해선 먼저 생이 무엇인지 논해야 할 것이다.
셀리 케이건은 생이란 인간의 생물학적 수명과 연결된다. 그렇다면 생물학적으로 살아있다면 살아 있는 것일까? 그리고 생물학적 삶을 유지하기 위한 욕망이 생의 의지일까? 아도르노에 따르면 꼭 그런 것은 아닌 듯 하다. 또한 하이데거의 진술을 따른다고 해도 마찬가지일 듯 하다. 존재 생기란 생물학 있음이 아니기에 그러하다.
"달에서 내려온 전화"는 생에 대해 말한다. (책의 줄거리는 출판사의 도서 소개가 다 했다. 나는 줄거리가 아닌 내 생각을 끄적이고 싶다) 사실 이 책의 주요 사건은 죽음이다. 그러나 이 죽음의 사건은 역설적으로 생이 무엇인지를 드러낸다.
"달에서 내려온 전화"는 특정한 장소와 조건을 통해 개별자가 스스로 자기 죽음을 선택할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은 자살이라는 자기 살인의 방식과는 그 방법론에서 차이가 있다. 이는 일종의 안락사와 유사하다.
이 책에서 나타나는 저승 개입 안락사들의 사례 하나를 간략하게 소개하고 싶다. 그리고 이 사례를 통해 생의 의지와 죽음 충동에 대해 이야기 해보고 싶다.
마흔 쯤에 결혼한 한 여인이 있다. 이제 60대가 된 그녀는 남편을 먼저 보냈다. 슬프게도 그녀에게 슬하의 아이가 없었다. 대신 강아지 두 마리를 자식과 같이 키웠다. 강아지들도 장수를 한다. 정말 정성스럽게 키웠던 것 같다. 그렇게 강아지도 모두 생을 마쳤다. 그리고 그녀는 저승 개입 안락사를 신청한다. 그리고 그녀는 묘한 단정함과 예의바름으로 죽음을 맞이한다.
자, 다시 나의 이야기를 끄적거려 보고자 한다. 그녀는 자기 삶에 충실했다. 힘들고 춥고 배고픈 시간도 그녀는 사랑하는 이와 함께 이겨내었다. 자신이 책임져야 하는 생명에 대해 책임감을 가졌으며 그들이 생을 마칠 때 까지 충실히 자신의 사랑을 실천했다. 그리고 자기가 해야할 일을 모두 마친 후, 그녀는 죽음을 선택했다.
나는 그녀가 진정한 생을 살았다고 생각한다. 그녀는 자신의 의무, 혹은 주체의 의무인 사랑을 충실히 실행했다. 그녀는 자신의 의무를 충실히 실행했기에 충만하게 죽음을 맞이 한다. 비롯 두렵고 떨리는 죽음이지만 그녀는 이 죽음 앞에 굴종하지 않았다. 그렇기에 그녀의 죽음 충동은 생의 의지가 다 했기에 발생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생의 의지로 전환된다. 그녀는 여전히 사랑하는 남편에 대한 사랑이 충만했다.
하이데거가 말한 바와 같이 생은 그저 살아있기에 아름다운 것이 아니라 존재의 생기를 통해 진정한 삶이 되는 것이 아닐까? 그리고 죽음 역시 이 생의 충만감을 통해 또 다른 삶의 영역으로 나아감이 아닐까?
나는 글지마 작가의 의도는 모른다. 다만, 작품의 주인공인 저승차사 한봄의 마지막 선택(이건 스포라 구체적 기술은 생략한다)을 통해 생의 본질이 살아 있음이 아니라 누군가를 사랑하고 누군가에 대한 의무를 짊어지고 그것을 충실히 이루며 사랑의 생기로 숨쉬는 것이 진정한 삶이라고 말하고 있는 듯 하다.
우리는 살아있다. 그렇지만 때로는 죽어있다. 이를 아도르노는 주체성을 상실한 불구이자 눈을 뜬 시체로 묘사한다. 우리의 주체성이란 무엇인가? 내 마음대로 살아가는 것? 그것이 인간의 주체성이라면 인간은 금수와 무엇이 다를까? 인간의 주체성은 레비나스에 따르면 타자성에 있다. 즉 타자의 얼굴을 통해 발견되는 것이 주체의 본질이기에 인간의 본질은 타자성이다. 그렇기에 키에르케고어가 진술한 것과 같이 인간은 사랑해야 한다.
이 책 역시 나에겐 그렇게 소리치는 것으로 들린다. 그저 살아가던 저승차사가 진짜 생을 살아가는 전환은 바로 사람과 의무였다. 그저 업무에 매달려 체제 유지의 도구로 살아가는 것이 아닌, 한 아이를 사랑하고 그 아이를 지키기 위한 생의 의지와 의무가 진정한 삶이라고 이 책은 말하고 있다.
이 책은 분명 판타지이다. 그러나 이 책은 실존적 리얼리티이기도 하다.
이 책은 우리에게 묻는다.
"당신은 진정으로 삶을 살고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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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에서 내려온 전화 부크크오리지널 2
글지마 지음 / 부크크오리지널 / 202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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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과 사, 산 자와 죽음 자가 소통할 수 있으며 또한 그것이 양자의 선택이라는 것은 참으로 재미있는 설정이다. 그러나 설정보다 이 책은 보다 현실적인 것 혹은 본질적인 것을 이야기 한다. 이 책의 묘미는 생이 무엇인지를 말하기 위해 죽음을 사용한다는 점이다. 재미있으면서 진중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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