멋진 신세계를 읽고


어떠한 지식의 전달을 위한 서적이나 강연을 들을 때 우리는 그것을 객관적인 진실 혹은 정보라고 인식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어떤 언어적 전달도 실상은 객관적일 수 없다. 언어라는 것, 글이라는 그것은 이미 사용하고 있는 주체의 자기표현의 도구이므로 주체의 자기 인식적 판단이 결여 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러한 주장은 후기 구조주의 철학자들이 언어 연구에 집중하는 이유의 근거가 된다. 더 나아가 발터 벤야민은 우리가 무심코 지나치는 사물의 배치들에서도 주관성-벤야민이 주장한 사물 배치의 주관성은 주체의 자발적 주관성이 아닌 체제에 의한 효율성의 구조적 지배 장치이다-이 있음을 발견했다. 영화 ‘이퀼리브리언(EQUILIBRIUM)’에서 주인공이 자신의 주관성으로 사물을 배치하고 일방적인 사물의 배치에 의문을 가질 때 파쇼적 집단은 그것을 통제하려하는 장면이 묘사된다. 이처럼 우리 책상 위의 사물 배치 하나까지도 주체의 주관성이 발현되는 것이다. 하물며 언어 혹은 자신의 저서는 오죽하겠는가?
이러한 비판적 인식에서 이 책 ‘멋진 신세계’를 읽을 필요성이 있다. 이 책의 제목은 ‘멋진 신세계’이다. 우리가 ‘멋진 신세계’라는 제목을 듣는 순간 –개별의 지식의 양적 차이가 존재하므로-어떤 이는 기의(記意) 그대로 ‘멋지고 화려한 새로운 세상에 대한 이야기이겠구나.’ 하고 짐작 할 것이다. 또 다른 이는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를 떠올리며, 디스토피아적인 관점의 미래 시대에 대한 생각을 하게 될 것이다. 이 책의 저자는 이 두 가지 모두를 염두해 두고 이 제목을 붙인 듯하다. 저자의 목적은 이 제목에서 그 표상 실체를 보여준다.
저자의 목적은 단순하다. ‘당신이 디스토피아를 떠올렸다면 내가 이 책을 통해 문자 그대로 멋진 신세계가 올 것이라는 것을 증명, 혹은 설득 해 보이겠다.’는 것이다. 이제 이 책의 목적성이 밝혀졌다. 이 책의 목적은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으로 소거하며, 동시에 긍정적 가능성을 부각하여 디스토피아적 관점을 바꾸는 것이다.
이 책은 어쩌면 우리가 다 알고 있는 것들을 몇 가지 범주의 형식으로 나누고 나열한다. 그러나 이러한 나열에도 주관성이 강하게 들어있다. 인류가 미래 사회에 대한 불안 중 그 첫 번째는 인공지능과 로봇이다. 저자는 이러한 것을 잘 아는 학자이다. 즉 이 부분을 먼저 해소하고 나야 자신이 꿈꾸는 멋진 신세계를 독자에게 설득할 수 있게 된다. 그는 인공지능을 첫 번째 범주에 넣고 그것을 설명하며 자신의 의견을 피력한다.
그는 자신의 저서에서 이렇게 표현한다. 인간의 교육을 다루는 교사와 교수는 인공지능으로 바뀌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인공지능의 선생은 누가 될까? 각종 분야의 다양한 지식을 인공지능에게 학습시키는 직업이, 비즈니스가 탄생할 것이다. 이러한 그의 주장은 너무나 무서운 주장이다. 그는 자신이 새로운 산업 분야를 발견한 듯 말하지만, 결론적으로 말한다면, 이것은 지식의 독점에 불과하다. 이것이야 말로 참다운 디스토피아가 아니고 무엇인가? 기계는 어떠한 가치 판단을 내리지 않는다. 즉 입력된 부분만을 산출할 뿐이다. 기계에게 전수할 지식은 누가 정하게 되는 것인가? 결국 그것은 전문가 집단 즉 소수 엘리트 계층에 의해 지배되어 버리는 구조로 전략된다. 이것은 절대적으로 파쇼적 상상력이다. 즉 저자에게는 엘리트 계층을 제외한 다른 계급의 생존은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는 어떠한 사태가 일어날 때 그것이 동반할 사건에 대한 분석으로 통해 부정적 사건을 대비해야 한다. 그러나 저자는 이러한 부분을 생략한다. 그는 그저 지금의 시대적 상황을 받아들이라고 강요한다. 그에게는 이미 미래는 결정되어 있다. 이것은 흔히 과학자라고 칭하는 인간들이 저지르는 하나의 우상이다. 그들의 신은 기술이며, 그러한 기술의 발전이 진보인 것이다. 변화에서 발생되는 사회적 지불에 대해서는 어쩔 수 없는 것으로 치부된다. 이것은 철저한 비인간화이다. 그들의 세계관은 철저한 기계론적 발전사관이기 때문이다.
다만 이러한 작자들이 주체를 걱정할 경우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다만 그들이 걱정하는 주체는 우리 모두가 아닐 뿐이다. 저자는 빅데이터에 대한 진술을 전개하면서 빅브라더를 연결시킨다. 그러나 그 빅브라더가 자신들이 속한 이익 집단에 대한 공격의 가능성만을 염려할 뿐이라는 것은 우리는 싶게 간파할 수 있다.
이처럼 주체에 대한 이해와 연민 그리고 애착이 없는 지식층은 결국 하부구조에 대한 어떠한 염려도 없이 자신들의 세상을 그리며, ‘멋진 신세계’가 올 것 이라고 망상적 긍정주의에 빠져들게 된다.
특히 저자의 주체에 대한 이해는 너무나 신자유주의적인 그것이라 주체를 물화시키고 자본의 물신적 관점을 강하게 내포하고 있다. 즉 주체의 가치를 생산의 도구로 판단함으로 노동을 주체의 외부적 가치로 환원한다. 인간의 노동은 생산력 그 자체의 것이 아니다. 노동이라는 것은 주체가 가치를 창출하는 일이다. 그러나 저자는 인간의 노동의 본래성을 부정한다. 인간은 본질적으로 노동을 싫어한다고 간주하고 있다. 이는 호머 루덴스적 인식과 정면으로 배치되는 것으로 유산계급의 그것이며 신자유주의의 그것이다.
특히 노동을 출산의 고통과 연결하여 노동을 고통의 것으로 만드는 저자의 논리 진행은 경악스럽기 그지없다. 출산의 고통은 탄생의 기쁨을 수반한다. 노동 또한 그러하다. 노동은 인고의 시간을 요청하지만 동시에 창조의 기쁨을 전수한다. 저자는 원에만 집착한 나머지 결의 본질을 놓치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과정적 논리 오류로 전체의 개념을 형성시켜 노동 가치를 단순한 비용적 가치로 전락시킨다.
노동에서의 해방은 다른 말로 하면 노동 계급의 붕괴를 의미한다. 앞서 논의한 바와 같이 저자에게 중요한 것은 인간의 노동력의 한계를 뛰어 넘는 기계의 노동적 창출이며, 이것은 또 하나의 우상을 만드는 성장 신화에 매몰되어 있는 것이다.
더 나아가 저자는 노동의 보람과 즐거움을 완전히 파괴시켜버린다. 노동 주체의 자기 소외 현상으로 역전시켜 버린다. 저자에게 노동은 그저 돈을 벌기 위한 하나의 수단인 것이다. 이것은 인간에 대한 물화를 정당화하는 인간 소외의 극단이다. 그러면서 마르크스를 기술하며 레드 콤플렉스가 강한 우리 공동체에 왜곡된 가치 판단을 강요하고 있다.
결국 저자는 로봇의 생산력을 긍정하기 위해 인간의 노동 주체성을 왜곡시키고 말살함으로 자신의 주장으로 전개하는 것이다. 이는 너무나도 수구스럽고 역겨운 발상이며, 공동체를 파괴하는 행위이다. 영화 ‘헝거 게임(THE HUNGER GAMES)’의 국가 장치의 억압 기제와 동일한 발상인 것이다.
이 책은 기술에 대한 소개인 듯 보이나 자신의 목적으로 위한 허구적 퇴폐에 지나지 않는다. 어찌 퇴폐를 읽고 역하지 않을 수 있는가? 어찌 공동체의 파괴를 주장하는 인간을 긍정할 수 있는가? 어찌 인간의 물화를 정당화하는 반주체적 주장에 분노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지식의 습득이 중요한가? 아니다. 나는 이 책을 읽고 주체에 대한 애정과 이해 없는 지식은 파괴적이며, 주체를 물화시킨다는 것을 다시금 알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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