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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기독교인은 예수를 믿지 않을까?
김진 지음 / 위즈덤로드(위즈덤하우스) / 2010년 1월
평점 :
절판


기독교라는 종교를 믿으면서 가장 위험한 것은 습관화되면서 본질을 잃어버리는 것이 아닐까? 지난 주 김 진 목사<왜 기독교인은 예수를 믿지 않을까?>라는 책을 읽으면서 무릎을 탁 쳤다. '맞아! 교회에서 말하는 대로, 제시해 주는 대로 수동적으로 신앙생활을 했지, 신앙의 본질을 고민해 본 적이 있었던가?'

달리 보면 기독교인들이 뻔하게 알고 있고 믿고 있는 내용이지만, 잘 생각해보면 오해하고 있는 것들이 있다. 빨간 줄을 쳐가면서 책을 읽다가 기독교인들이 흔히 오해하는 것들을 10가지 정도로 정리해 보았다.

이러한 오해들이 우리의 고민이 되고, 자신의 신앙에 대한 철저한 의심을 통해 본질에 충실한 그리스도인이 되도록 날마다 자신의 심장에 칼날을 들이대 보는 것은 어떨까?

 1. 기독교인이라고 다 예수를 믿는 것은 아니다?

기독교인과 그리스도인이라는 용어는 구별해서 생각해야 한다. 성경을 보면,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고 따르는 사람들이라는 뜻에서 안디옥에서 처음으로 그리스도인이라고 불렸다. 기독교라는 종교가 생기기 훨씬 전의 일이다. 그 별칭에는 긍정적인 의미가 담겨 있었고, 예수님을 따르던 사람들에게는 명예로운 별명이었다. 그런데 2000년이 지난 지금, 그리스도인이라는 말은 기독교인이라는 이름과 상당히 다른 느낌을 주고 있다. 기독교인이라고 하면 예수님을 어떻게 믿고 따르느냐에 상관없이 기독교라는 종교에 귀의한 사람, 종교적인 행위를 하는 사람, 교회에 다니는 사람이라는 일반적인 의미가 강하다. 이런 뜻에서 보면 기독교인들 가운데에도 예수를 안 믿는 사람이 얼마든지 있을 수 있다. 즉 형식적인 기독교인이라면 예수 안 믿는 것과 큰 차이가 없을 수 있다는 뜻이다. 붕어빵에는 붕어가 없듯이, 기독교인에게 있어서 예수 믿음의 진정성이 없다면 붕어빵처럼 겉보기에는 비슷하지만, 실상은 실제와 다를 수 있다는 것이다.

 2. 예수는 기독교인이다?

물론 기독교가 먼저 있고, 예수가 나타난 것은 아니다. 기독교는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고 신앙하는 공동체에서 출발했으며, 둘은 밀접한 관련이 있다. 그런데 기독교와 예수와의 관계를 당연시하면서 기독교를 믿는 것과 예수 믿는 것을 구분하지 않는 경향이 많다. 입버릇처럼 ‘기독교를 믿는다’라고 말한다. 즉 생각 속에서 기독교와 예수를 일치시키기 때문에 이렇게 말할 수도 있다. 기독교를 믿는다는 것은 종교적인 조직이나 시스템 또는 문화를 믿는 것이 아니라 기독교의 핵심을 믿는다는 것은 익히 알고 있는 사실이다. 그리고 기독교는 다만 하나의 종교로서 인간이 만든 사회적, 문화적 실체일 뿐이다. 또한 종교라는 것은 시대와 상황에 따라 계속 변하기 마련이다. 그런데 종교로서의 기독교를 신뢰하고 믿는 것과 예수라는 존재를 믿는 것을 동일시하게 되면 기독교를 좇아가다가 예수 신앙을 잃어버릴 수도 있다. 또 반대로 기독교를 절대화시킬 수 있는 위험이 있으며, 기독교를 모욕하는 것을 두고 마치 하나님을 모욕하는 것으로 착각할 수도 있다. 더 나아가 예수를 한 사람의 기독교인으로 만들어 버리거나 예수를 기독교나 기독교인의 범주에 무리하게 집어넣기도 한다. 그렇게 되면서 성경 속 예수의 모습과는 전혀 다른 ‘예수 이미지’가 만들어질 수도 있다.

3. 로마의 기독교 공인 이후로 기독교가 부흥했다?

초기 기독교공동체는 그리스, 로마, 소아시아 지역으로 전파되었지만, 많은 고난과 배척을 받았다. 기독교역사가들은 그런 기독교 공동체들이 AD 313년에 콘스탄티누스 대체의 종교적 체험과 회심을 계기로 로마의 공인을 받게 되었다고 말한다. 이후 381년에 로마가 기독교를 국교로 삼게 되면서 로마를 통해 기독교가 전 세계로 전파되었다고 한다. 하지만 기독교 공인 이후에 생긴 가장 큰 변화는 그때부터 기독교가 로마의 국가 정책에 의해 철저히 통제를 받게 되었다는 것이다. 교회는 새로운 체계와 문화에 적응해 나갔고, 또 변해 갔다. 구체적인 예로, 공인된 이후 성직자들은 세금이나 모든 공공근로에서 면제되었는데, 교회에 일종의 특혜가 주어진 것이다. 그런데 이 정책 때문에 부작용이 일어나게 되는데, 부자들이 이 제도를 악용해 교회 사역자로 등록하게 된다. 세금을 포탈할 목적이었다. 그리고 이때부터 교회가 국가로부터 돈을 받게 되어 점점 부자가 되었다. 중세시대에는 유럽 기독교 국가들의 땅의 40퍼센트가 교회의 소유였다. 또한 교회 감독이 교회 법정뿐 아니라 세속 법정에서도 영향력을 발휘하게 되고, 점차 세속 권력까지 쥐게 되었다. 이런 가운데 기독교와 교회에서는 예수의 정신이 급속도로 사라지고 신앙의 내용과 색깔도 변하게 되었고, 이렇게 로마의 공인과 국교화로 시작한 기독교는 ‘예수의 종교(the religion of Jesus)’에서 ‘예수에 관한 종교(a religion about Jesus)’로 바뀌게 되었다.

4. 성경을 문자 그대로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는다? 

기독교인들은 종종 “나는 성경을 문자 그대로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는다”라고 말한다. 실제 통계 자료에 의하면, 한국 개신교인의 86퍼센트와 가톨릭교인의 58퍼센트가 성경을 문자 그대로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는다고 응답했다. 성경을 문자적으로 읽을 때 가장 큰 문제는, 문자 너머에 말씀이 담고 있는 깊은 뜻과 더 큰 진리를 보지 못한다는 것이다. 문자는 뜻을 담고 있는 하나의 형식이며, 문자만 읽고 그 뜻을 읽어내지 못한다면 그 말씀을 기록하신 하나님의 뜻을 지나치는 것과 마찬가지다. 더욱이 성경을 문자적으로 읽는 사람들은 대부분 하나님의 말씀이 성경에 문자로만 기록되어 있다고 믿는다. 그래서 모든 자연과 우주에 충만한 하나님의 말씀과 지금도 우리의 삶 속에서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못한다. 성경 역사를 6천 년으로 보는 세대주의의 경우가 그렇다. 성경에 쓰인 문자대로 구약은 4천 년의 역사이고, 신약은 2천 년의 역사로 보는 것이다.

5. 구원은 예수 믿고 천국에 가는 것이다?

만약 누군가가 기독교인에게 기독교가 말하는 구원이 뭐냐고 물어 보면 대부분의 기독교인들은 ‘예수님을 믿고 죽어서 천국 가는 것’이라고 말한다. 즉, 기독교의 구원은 현실보다는 내세, 지금보다는 미래의 어떤 시공간에서 이뤄지는 것이라고 생각하게 된다. 일면 틀린 표현은 아니다. 그러나 죽어서 천당 가는 것을 믿게 하기 위해 예수님이 그런 고난에 찬 삶을 사셨을까? 예수님은 하나님을 믿고 그분을 따르며 사는 모습이 과연 무엇인지를 3년 동안 보여 주시고자 부단하게 노력하셨다. 그것은 구원 받은 자의 삶의 모델이다. 예수님은 우선 구원을 아주 구체적인 삶의 변화로 말씀하셨다. 이는 속사람이 변화되는 것으로, ‘새롭게 태어남’이라고 표현했다. 그리고 예수님은 총체적인 구원을 보여주셨다. 개인 구원이나 영혼 구원 또는 내세 구원 등 한쪽에 치우친 구원이 아니라 인간과 인간, 인간과 자연, 인간과 하나님의 관계가 궁극적으로 회복되는 삶의 총체적인 구원을 말씀하셨다. 그리고 이 구원은 어느 한 시점에서 한 번 구원 받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 계속 이루어가는 현재진행형 사건이라고 하신 것이다. 즉, 기독교인의 삶에서의 구원은 실제로 온전한 삶으로 드러나는 것인데, 일부 기독교에서는 구원을 죽어서 가는 천국이 전부인 양 ‘천국 이데올로기’로 축소시켜 버렸다.

6. 예수천당 불신지옥? 

성경에서 예수님의 삶과 말씀을 보면 예수님의 관심사는 줄기차게 하나님나라에 있었지, 죽어서 가는 천당에 있지 않았다. 또 예수님은 죽어서 가는 지옥을 주제로 말씀하신 적도 없다. 예수님께서 지옥을 언급한 곳은 유사한 구절을 다 모아도 일곱 번 정도에 불과하다. 그리고 그 때 지옥이라는 용어는 본래 헬라어인 ‘게헨나’의 우리말 번역인데, 이때 말씀하신 게헨나는 기독교인들이 이해하는 것처럼 예수 안 믿으면 죽어서 가는 지옥을 의미하지 않는다. 게헨나는 구약에서 언급한 ‘힌놈의 골짜기’라는 지명이다. 이 힌놈의 골짜기는 이방신앙인들이 사당을 짓고 심지어 자녀를 불사르는 이교적 제사를 지내던 곳이었다. 즉 이스라엘 사람들에게는 가고 싶지도 않고, 가서도 안 되는 최악의 장소였다. 그리고 예수님은 믿음의 여부에 따라 가고 안 가고 하는 지옥보다 가식하는 사람이나 위선자들이 가는 지옥에 대해 말씀하셨다. 물론 죽어서 가는 지옥이 없다는 것이 아니다. 중요한 것은 예수님의 복음을 전도할 때 엄포용으로 사용하는 것은 오히려 예수님을 욕 되게 하는 행위다.

7. 예수 믿는 것은 쉽다?

지금 기독교는 점점 더 사람들의 요구에 맞는 ‘쉬운 기독교easy Christianity'를 선전하고 있다. 이 기독교는 ‘이미 한 번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고백했기 때문에 어떻게 살고 행동하든 관계없이 무조건 천국에 간다’고 선전하면서 예수 제자로서의 삶은 외면해 버린다. 사실 이런 예수님의 말씀을 전하면 사람들이 싫어할 뿐 아니라 교회에 나오지도 않기 때문이다. 이것은 기독교가 예수님의 말씀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의 입맛을 좇아가는 것이다. 성경에 기록된 예수님의 말씀을 보거나 사도들이 한 말씀을 보면 예수님을 믿는 길은 참으로 힘겨운 고난의 길이다. 그 길은 예수님을 믿기 전의 삶에서 돌아서지 않으면 따를 수 없는 길이다. 그런데 기독교가 기독교인을 늘린다는 목적으로 그 길을 감추거나 간략화 시킨 채, 그저 예수님을 믿는 길이 아주 편하고 쉬운 길처럼 환상을 심어 주고 있다. 이렇게 현실 기독교가 예수님의 복음에 충실하기보다는 교인들의 입맛에 따라 움직이고, 그들의 가벼운 요구에 따라 변화하기 때문에 기독교의 본래 모습이 변질되고 있는 것이다. 또 그런 쉬운 기독교나 가벼운 기독교가 예수님의 은혜와 구원을 값싸게 취급하는 것이 더 큰 문제다.

8. 예수 믿으면 복 받는다?

기독교인들 가운데에는 ‘~를 위해 예수님을 믿는다’는 신앙 패러다임에 익숙해져 있는 경우가 많다. 만약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 목적이 지극히 개인의 욕망의 성취나 이기적인 자기만족에 있다면, 그것은 올바른 신앙 태도가 아니다. 더욱이 자기 자신의 욕망과 욕구를 ‘하나님의 축복’이라는 기대 속에 숨겨 놓아서도 안 된다. 하지만 요새 기독교인들은 용감하게도 세상적으로 성공하는 것을 하나님 축복의 전부인 양 말하고 있다. 그러면서 하나님께 물질의 축복을 받게 해달라고 숨김없이 당당하게 드러내고 기도한다. 그리고 이런 신앙의 모습이 하나도 이상하지 않게 여겨지는 분위기가 되어 버렸다. 축복을 바라는 것 자체로 잘못되었다고 할 수는 없지만, 많은 기독교인들이 예수님을 믿고 기도하면 모든 것이 가능해지고 언제나 행복하고 심지어 예수님이 우리를 부자로 만들어 줄 것이라는 확신을 갖고 있다. 이런 사람들에게 있어서 예수님은 마치 당첨 가능성이 높은 로또복권 같다. 이 ‘예수 로또복권’을 붙들고 믿음으로 바라면 언젠가는 자신이 바라는 대로 당첨되리라 믿는 것이다. 목회자들은 한 술 더 떠서 그런 복이 당첨되지 않는 것은 당연히 믿음이 부족해서 그런 것이지 예수 로또의 책임이 아니라는 듯 말한다. 물론 하나님께 복을 비는 기복 자체가 잘못은 아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이름을 이용하고 활용해서 결국 자신의 복을 채우려는 욕망이 깔려 있다면 결국 삶의 실패와 아픔을 겪게 될 때 수용할 수 없어서 하나님을 원망하고 예수님 신앙을 버리는 결과를 가져올 수도 있다.

9. 돈이 없으면 믿음도 없어 보인다?

기독교 보수신학에서도 돈을 신으로 경배하는 맘몬주의에 대해 경계하라고 많이 가르쳐 왔다. 하지만 오늘날 자본주의와 그 문화 속에 살다보니 교회와 자본주의 사회 사이의 문턱이 매우 낮아졌다. 기독교 목사들도 물신주의를 비판하고 맘몬을 주의하라고 말한다. 그러나 실제로는 많은 기독교인들이 일반 사람들 못지않게 돈을 사랑하고 섬긴다. 교회문화를 보아도 알 수 있고, 교회 활동을 할 때에도 실제로는 돈이 모든 결정의 중심 자리를 잡고 있다. 신앙의 차원에서도 돈이 있으면 믿음이 있고, 돈이 없으면 믿음도 없어 보이는 시대가 되었다. 그래서 믿음이 좋아도 돈이 없는 가난한 사람은 교회에서 맥을 못 춘다. 즉 믿음이 좋으면 돈도 많고, 돈이 많으면 믿음도 좋다는 논리다. 그래서 사업하던 교인이 사업이 망하면 창피하다고 교회를 못 나간다. 이것은 자본주의 논리다. 게다가 부자 교회에는 부자만 다니고, 가난한 교회에는 가난한 사람만 다니는 양극화 현상도 심화되고 있다. 통계조사에서도 ‘개신교회에 가난한 사람이 마음 편히 다닐 수 있는가’라는 질문을 했는데, 50퍼센트 정도가 ‘마음이 불편하다’고 응답했다고 한다. 교회에 있어서도 교회나 목회의 성공을 헌금의 많고 적음, 교회 규모의 크고 작음에 따라 판단하기 때문에 교회들 사이에서도 빈익빈 부익부 현상이 그대로 펼쳐지고 있다. 그럴수록 교인들은 돈이 있고 여러 가지 편의시설과 문화 프로그램이 있는 큰 교회로 쏠려 간다. 이제는 교회 신문에 교회를 사고파는 광고도 공공연히 볼 수 있다. 교인 수, 건물 크기, 한 주의 헌금액수, 주변 조건 등 투자 조건을 내세워 교회를 사고파는 것을 볼 때 자본주의에 물든 기독교의 모습이라고 할 수 있다.

10. 하나님은 우리가 세상에서 성공하기를 원하신다?

현재 기독교가 가장 심각하게 빠져 있는 문제 가운데 하나는 성공 이데올로기에 사로잡힌 기독교인들이 예수님을 성공이라는 이미지로 덧씌우는 것이다. 그러면서 좁은 길이 아닌 넓은 길로 가고, 남을 섬기기보다 높은 자리에 오르고, 가난한 자보다 부자가 되라는 말이 서슴없이 나온다. 그리고 그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라는 명목으로 포장된다. 그러다보니 실패한 사람과 가난한 사람은 믿음이 부족하다는 증거일 뿐이다. 『긍정의 힘』『시크릿』『네 안에 잠든 거인을 깨워라』『목적이 이끄는 삶』 등의 책들은 성공이라는 목표를 추구하라고 말하고 있으며, 교회에서도 공공연히 추천도서로 권하고 있다. 목회자들 가운데에서도 대형 교회를 일구어 목회를 성공하지 못했다고 좌절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러나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많은 사람들은 예수님을 성공 모델로 삼고자 하지만, 요즘 시대의 기준으로 볼 때 예수님의 삶은 철저히 실패한 사람이었다. 그분의 삶은 성공이나 출세와 거리가 멀었을 뿐만 아니라 굳이 성공했다고 한다면 그것은 참 인간과 참 하나님의 온전한 모습을 보여주셨다는 것이다. 사회에서 성공하지 말라는 것이 아니다. 중요한 것은 성공한 사람만이 사회에서 좋은 영향력을 끼칠 수 있다는 것이 아니라 좋은 영향력을 끼치는 사람이 성공한 사람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즉 사회에서의 좋은 위치와 신분, 부유함 등에 상관없이 하나님께 헌신한 사람, 곧 종의 마음을 품는 사람은 사회에 크고 좋은 영향을 끼칠 수 있을 것이다.

(이 글은 제 개인 블로그에 있는 글을 그대로 전재한 것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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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나라 2014-08-16 23: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더욱 밝아지는 그리스도의 진리

구약성경⇨신약성경⇨섭리 성경


내가 보니 하늘 천사가 땅에 있는 모든 족속에게 영원한 복음을 전하더라. (계시록14:6)


1935년 미국 시카고에 하늘 천사가 70명의 신학자들에게 영원한 복음을 알리는 예수님의 36년 일생과 말씀 전체를 계시로 전달했다.

더 자세한 내용

http://cafe.daum.net/yes7770/QTjv/24

이 천사는 예수 시절 사도 안드레의 수호천사로서 지금은 천국에서 12계시 위원으로 일하고 있다고 한다.

이 천사는 하나님의 뜻에 따라 2,000년 전 예수님의 순수한 가르침이 무엇인지 알리면서, 주님의 재림에 대비하여 성도들이 어떤 준비를 해야 하는지 구체적으로 밝히고, 더 아나가 이 땅에 하늘나라를 세우는 사업에 그리스도의 진리로 20세기 인류를 계몽하고자 한다고 했다.

이 계시가 1955년 책으로 출판되자 베스트셀러가 되었고, 이 계시가 전한 진실에 전 미국교회가 큰 충격과 흥분에 휩싸였다.

왜냐하면 지난 2,000년 전 복음서는 예수님의 모든 행적과 말씀을 다 기록할 수 없어(요한 21:25) “천지는 없어져도 내 말은 없어지지 않으리라”(마태 24:35)는 예수님의 말씀 중에서 아주 일부, 그것도 묵시적으로 기록되었기 때문이다.

이러다 보니 그동안 주님의 말씀에 대하여 다양한 해석으로 많은 신학적 오류가 생길 수밖에 없었고, 이것이 많은 영적 혼란을 일으켜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가 여러 교파로 분열되고, 또한 이단, 사이비 종파도 함께 출현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바울은 “지금은 (예수님에 대하여) 부분적으로 아나 언젠가 온전히 알리라” 라고 예언함으로 먼 훗날 온전한 계시가 내려 올 것임을 예언했다.(고전 13:12)

성경에 “온전한 것이 오면 부분적으로 알든 것이 폐하리라.”(고전 13:10)는 말씀에 따라 이 계시는 어떻게 인간이 구원받고 천국 가는지, 또 예수님이 언제 어떻게 이 세상에 재림 하시는지 등, 그동안 부분적으로 알았든 모든 것을 온전히 알 수 있어 이제 더 이상 영적 혼란 없이 바른 신앙으로 교회가 하나 되어 이 땅에 하늘나라를 세우는 길이 열렸다.

현재 이 계시서가 16개 국어로 출판되었고, 한국에서는 “섭리 성경”으로 출판되어 많은 사람들에게 보급되고 있다.

발 행 처 : 하늘나라 사람들 1,540쪽 전국 서점과 인터넷 서점에서 보급

그리고 이 계시 전문을 무료로 공개 합니다

다음을 클릭 하세요(클릭이 안 되면 복사하여 주소 창에 이동)

http://cafe.daum.net/yes7770

하늘나라 사람들(다음 카페)


그동안 기독교는 정말로 이 세상에 크게 봉사했지만, 이제 가장 필요한 분은 예수님이다. 염려 말라! 그동안 기독교는 막강했다! 이제 새로운 계시를 통하여 주님의 본래 가르침으로 돌아간다면 섭리 시대로 넘어 가겠고, 마침내 예수의 종교는 세상을 정복할 것이다. (섭리성경 본문 중에서)
 
하나님의 손길을 경험하는 마음학교
윤종현 지음 / 위즈덤로드(위즈덤하우스) / 2008년 8월
평점 :
절판



평범한 제목의 책이라 그다지 끌리는 책은 아니지만,

부제를 보고 호기심이 생겼다.

“예수 믿어도 나는 왜 행복하지 않을까?”

사실 예수 믿고 복음을 경험하게 되면

정말 행복해지는 것 같고 기쁨이 있는 것은 분명하다고 생각한다.

나도 예수 믿고나서 하늘을 둥둥 떠다니는 공중부양을 경험했으니까.


헌데 한동안 누렸던 그 기쁨은 그리 오래 가지 못했다.

그러면 다시 성령 충만해야 한다고, 또 기쁨을 잃지 않으려고

말씀 보고 기도하고 찬양하면서 은혜를 쥐어짜보려고 노력했다.

때때로 그런 나 자신을 보면서 믿음이 부족한가, 하나님께 부족한 사람인가,

내가 무슨 죄를 저질렀거나 마음에 떨치지 못하고 회개하지 않은 죄가 있나?

내 속에 정말 성령님이 내주해 계신 걸까?

아니면 내가 너무 강퍅해서 은혜를 경험하지 못하는 것일까?

별별 의심과 회의가 많았다.

구원에 확신에 대한 책도 이것 저것 읽어보고,

내적 치유와 영적 침체에 대한 책도 읽어보았다.

물론 좋은 책들이고, 도움이 되는 귀한 책들이었고, 내 신앙을 지탱해준 재료였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불충분했다.


늘 내 마음속에 자리잡고 있는 불편한 무엇인가가 있는데,

아마도 치유에 대한 책을 읽으면서 나는 그것을 ‘쓴뿌리’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가끔씩 우울하게 만들고, 남들이 나를 인정해주지 않으면 화가 나고,

다른 사람들이 나를 존중할 수 있도록 ‘만들기’ 위해 애쓰고,

그러면서 다른 사람의 칭찬을 받을 때면 겸손한 척 “에이, 뭘요”라고 하지만

정작 나 자신은 그 칭찬에 목말라하고 있었음을 알게 되었다.

그 쓴뿌리가 무엇인지, 그리고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지 서툴렀기에

책을 읽고 기도하고 ... 고치려고 노력해보고 ... 기도하고 계속 반복하지만

그때 분이고 여전히 마음의 고통과 쓰라림은 사라지지 않았다.


하지만 <마음학교>를 보면서 마음속으로 “맞아, 맞아!”를 외치면서 읽었다.

이 책은 두루뭉술하게 말씀 앞에 고백하고 기도하고 결단하라고만 말하지 않기 때문이다.

내면의 쓴뿌리가 왜 생겼는지, 감정의 밑바닥에는 생각이 어떻게 도사리고 있는지를

생명나무와 육체나무를 통해 쉽게 이해시켜 주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인정 받으려 하고, 무언가 열심히 성취를 통해 자신을 합리화시키고

정체성을 찾으려는 시도가 마음의 목마름 때문이며, 육체의 뿌리 때문임을 깨닫게 해주었다.

이 책이 단지 영적인 관점에서만 쓰였다면 그저 그럴 수도 있었겠지만,

전반에 걸쳐 심리학적인 관점에서 상처와 마음의 쓴뿌리를 다루고 있다.

이해하는 것만으로도 치유가 되는 것 같은 느낌이 들 정도로 시원하고 명쾌했다.

결국 문제는 잘못된 내 생각에서 비롯되었고, 그 생각이 감정과 상처를 낳게 된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지속적으로 생각을 치유하는 두 가지 방법인

진리 차트와 생명나무 치유는 실제적으로 아주 유용한 방법인 것 같다.

저자가 알려준 대로 매일 노트에 진리 차트와 생명나무 치유대로

내 마음을 써내려가고 있다. 마음 속 쓴뿌리들을 하나하나 꺼내어...


지금까지 여러 치유 책과 치유 세미나에 실망한 독자들이라면,

예수 믿으면 달라질 것 같았는데 여전히 변화가 없는 삶 때문에 좌절하고 있다면

이 책을 꼭 읽어볼 것을 권하고 싶다.

신앙생활 경험이 많지 않은 독자들에게도 쉽게, 그리고 낯설지 않게 읽을 수 있는 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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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손길을 경험하는 마음학교
윤종현 지음 / 위즈덤로드(위즈덤하우스) / 2008년 8월
평점 :
절판


이 책 너무너무 좋아요. 기독교인이라면 필독 강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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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울메이트를 위한 사랑 큐티 - 하나님과 동행하는 부부의 40일 비타민
송길원 지음 / 위즈덤로드(위즈덤하우스) / 2009년 4월
품절


관계를 지속시킬 수 있는 것은 감정이 아니라 기술이어야 합니다. 이 때문에 사랑의 감정이 사라지기 전에 사랑하는 법을 익혀야 합니다.-12쪽

부부의 행복은 그냥 얻어지는 것이 아닙니다.상대방을 행복하게 해주기 위해 늘 생각하고 행동하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마음만으로는 사랑이 다 표현되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특별한 날을 위해 평상시에 조금씩 준비한다면 기다리는 시간 또한 하나의 행복으로 느낄 수 있을 것입니다.-56쪽

세울이 비록 우리를 힘들게 하고 육체를 갉아먹어도 둘의 사랑을 갉아먹지는 못하게 해야 합니다. 어떤 어려운 환경도 두 사람을 갈라놓지 못하게 해야 합니다. 그래서 진정한 연합은 배우자에게 100% 헌신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서로의 단점은 있는 그대로 용납하고 보완하여 완전을 향해 나아가게 되는 것입니다.-11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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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울메이트를 위한 사랑 큐티 - 하나님과 동행하는 부부의 40일 비타민
송길원 지음 / 위즈덤로드(위즈덤하우스) / 2009년 4월
평점 :
품절


사실 저도 그렇지만 대부분 크리스천 부부들은 겉으로는 잘 살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속속들이 들여다보면 속상하고 곪아 있는 게 많지요.
한국 사람들이 그렇지만 단지 참고 사는 경우도 있고,
교회 사람들의 이목도 있고 크리스천이라서 또 더욱 참게 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게다가 신앙이 좋다고 해서 부부관계도 딱히 좋은 것 같지도 않구요.

이 책을 선물 받고 처음 펴들었을 때도 내가 읽어야 할 책이라는 느낌은 없었는데...
첫 페이지부터 공감을 불러일으키네요.
"사랑은 내가 아니라 뇌가 한다"
사실 결혼한 지 10년 정도 되다보니 이제 사랑의 감정 그런 것보다는
자녀들 키우기에 둘 다 바쁜 것 같아요. 그러면서 자연스레 대화가 줄고
친밀하기보다는 그저 동거인 같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는데,
이 책은 어떻게 사랑해야 하는지, 실제적으로 어떻게 사랑을 표현해야 하는지,
그리고 크리스천으로서 어떤 생각으로 부부 관계를 바라봐야 하는지를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진정한 부부 사랑은 연애할 때나 신혼 때의 뜨거운 사랑을 되찾는 게 아니라
친구처럼 편한, 영혼의 친구가 되어 함께 한 하나님을 바라보는 영적 삼각관계가 되는 것임을
깊이 깨닫게 해주었습니다.
저처럼 부부 문제 이상 없다고 외치지만, 들여다보면 무심하게 살고 있는
크리스천 부부들에게 권하고 싶은 책이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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