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너를 기다리고 있었다
알레산드로 다베니아 지음, 이승수 옮김 / 소소의책 / 201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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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이 죽음 이상을 보여주는 때 ‘돈 피노’ 신부

[리뷰] 『나는 너를 기다리고 있었다』(알레산드로 다베니아 저, 이승수 역, 소소의책, 2018.01)

 

두 화자(프란체스코, 돈 피노 신부)의 목소리가 번갈아 작품에 나오는 책이 있다. 두 화자가 나온다는 건 하나의 사건에 대해 다른 두 시각을 제공하거나, 두 화자가 대립되는 인물일 경우가 많다. 그러나 『나는 너를 기다리고 있었다』(알레산드로 다베니아 저, 이승수 역, 소소의책, 2018)는 대립되는 화자가 아니다. 같은 목적으로 움직이는 화자들이다. 그런데도 화자가 둘인 것은 한 화자가 죽은 뒤 이야기를 이어갈 또 다른 화자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작품의 주요 배경은 난민촌과 같은 브란카치오이며, 사건은 브란카치오에 중학교를 세워 아이들의 꿈을 지켜주려는 신부의 노력으로 시작된다. 소설은 실화를 바탕으로 하였다. 화자인 소년은 영국 옥스퍼드로 어학연수를 떠나려던 때 신부의 권유로 잠깐 브란카치오에 들렀다가 자신이 속한 사회와 다른 현실을 만나게 된다. 소년은 브란카치오에서 일어나는 지옥과도 같은 일상들을 보면서, 내가 사는 도시에서 일어나는 일도 모르면서 다른 나라, 다른 도시의 언어와 문화를 배우는 게 무슨 의미가 있는지 회의를 느끼게 된다.

 

브란카치오는 소년의 바로 옆 동네다. 그러나 하수 시설, 중학교, 공원이 없어 아이들은 성폭력, 절도, 강간, 살인 등의 위험에 노출된 채로 자라나고 있었다. 자신의 동네에서 평범히 얻을 것들이 옆 동네에서는 사치였다. 신부 역시 그러한 생각을 한다. 신부는 종종 소년 또는 옆 동네 아이들을 만나 현실을 직시하게끔 만든다.

 

신부는 “만일 지옥에서 태어났다면 지옥이 아닌 것의 한 조각을 봐야 해. 그래야 다른 세상이 존재한다는 걸 알게 되지……. 거리가 아이들을 먹어치우기 전에, 아이들의 마음속에 딱딱한 껍질이 생기기 전에 아이들을 데려와야 해. 그래서 유치원과 중학교가 필요한 거야. 힘은 필요 없어.”라고 말하며 자신이 살아 행동하는 이유와 목적을 밝힌다.

지옥 같은 브란카치오 … 대체 무슨 일이?

 

신부는 ‘지옥’이라는 단어를 자주 사용했다. “지옥은 연약한 몸, 즉 아이들에게 더 효과적으로 작용한다는 걸 안다. 누군가가 아이들의 영혼을 없애기 전에 보호해야 한다.”와 같이 아이들이 꿈을 꿀 수 없는 장소 자체를 지옥이라 표현하였다. 브란카치오에선 너무 많은 아이들이 어둠 속 씨앗과 같아, 싹을 틔우지 못하고 있었다.

 

화자인 소년 역시 다른 운명을 타고났더라면 옆 동네 아이들과 별 다를 것 없는 삶을 살고 있었을지도 몰랐다. 신부는 지옥과 같은 브란카치오를 변화시키려면 마피아에 맞서 전쟁을 벌이는 게 아니라 무지와 가난에 맞서 끈질기게 인내심을 갖고 저항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래서 아이들을 위해 여름에는 재밋거리를 준비하고, 연극을 하게하고, 바다로 데려가 별을 보여주고 싶어 했다.

 

신부의 노력 덕분에 마침내 브란카치오에 중학교가 세워지게 된다. ‘돈 주세페 풀리시’라는 이름으로 2000년 1월 13일에 개교를 하지만 정작 신부는 그 모습을 보지 못한다. 그 전에 암살되었기 때문이다. 신부의 죽음에 대해서는 책 속에 많은 암시로 나타났다. “시간이 많지 않다. 시간은 없는데, 밭에 뿌려진 씨앗 같은 아이가 너무 많다. 가시나무가 씨앗을 덮으려 하고, 배고픈 까마귀들이 먹어치우려 한다.”는 신부의 독백 부분이나 신부가 같은 건물 위층에 사는 경찰관 밈모로 인해 경호를 받는 느낌을 가지는 부분이 그렇다.

 

신부의 죽음과 제목의 의미

 

신부의 죽음 부분에서 나는 마침내 책 제목 『나는 너를 기다리고 있었다』의 의미를 알게 되었다. 묘사에 따르면 신부는 죽음을 기다리고 있었다. 오랜만에 멀리서 돌아오는 아들을 마중하러 달려 나가는 아버지처럼 미소를 지으며 죽음을 기다리고 있었다. 책 제목은 신부의 심정을 대표하는 문장이었다. 신부의 죽음은 전혀 슬프거나 안타깝게 그려지지 않고 오히려 음악처럼 아름답게 묘사되었다. 돈 피노 신부가 자신의 운명을 애석해하지 않은 이유는 그가 아이들과 삶을 사랑하면서 모든 것을 가졌기 때문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죽음의 순간에 다섯 가지를 애석해한다. 나의 성향에 따라 산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의 기대감에 갇혀 살았다는 점. 경쟁이나 결과물 때문에 혹은 결코 오지 않았던 어떤 것을 좇아서 여러 가지 관계를 무시하고 너무 열심히 일했다는 점. ‘사랑해’, ‘네가 자랑스럽다’, ‘미안해’라고 말하지 못한 점. 사랑하는 사람과 더 많은 시간을 함께 보내지 못한 점. 더 행복하지 못했던 점 들을 말이다. 신부의 삶은 이 모두가 만족스러웠다. 그래서 죽음의 문턱을 넘어가는 순간에도 미소를 지을 수 있었던 것이다.

 

신부라는 화자가 죽고 남은 화자인 소년은 죽음 이후의 사람들의 행동 변화들을 묘사해 나갔다. 아이들과 마을 사람 모두가 신부의 죽음을 애통해하고, 심지어 살인을 저지른 남자마저 자신의 행동을 뉘우친다. 신부는 하늘에서 지옥의 씨앗들에 단비를 뿌리는 존재가 되었고 마침내 중학교가 건설되고 아이들은 꿈의 씨앗을 싹틔울 수 있게 되었다.

 

신부는 자신의 죽음이 브란카치오 아이들을 살리는 마지막 절차임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너를 기다리고 있었다』는 읽는 내내 희극을 읽는 듯 그리고 동화를 읽는 듯 아름다웠다. 치열한 전쟁터와 같은 지옥의 한 장면들과 죽음 모두가 아름답게 그려진 것은 신부와 소년이 품고 보았던 브란카치오에 대한 삶의 가능성 덕분이라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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