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스듬히 - 시인의 사물이 있는 정현종 시선집
정현종 지음 / 문학판 / 2020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나무 껍질에 싸여 있는 깊은 밤과 천둥…정현종 시인

[서평] 『비스듬히 (시인의 사물이 있는 정현종 시선집)』(정현종, 문학판, 2020.04.13)


시집의 제목이 강렬하다. 비스듬히. 우리는 기대어 살 수밖에 없음을 우회적으로 나타나는 제목이다. 편집인의 말을 보면 시인은 순례자와 같다. ‘사물에 바치는 노래’에서 편집인 민병일 씨는 “시인은 알려진 세계를 넘어서 미지를 동경하는 존재”라며 “시인의 사물은 시간의 흔적만 남아 보잘것없을지 모릅니다”라고 적었다. 사물을 꿈꾸는 시인. 사물은 고통의 언어로 지은 우주와 같다는 게 편집인의 해석이다. 


첫 시는 <철면피한 물질>이다. 정현종 시인은 물질이 능청스럽고 철면피하다고 노래한다. 나를 어지럽히는 미로와 같이 아무것도 그리워하지 않는 물질이라니. 물질은 아무것도 그리워하지 않는 걸까? 따지고 보면 그리움과 기다림이란 인간에게만 존재하는 감정이다. 우리는 언젠가 떠난다. 그래서 더욱 외롭다. 


두 번째 시인 <불쌍하도다>에선 시를 발표하는 게 참 불쌍하다고 말한다. 시인이 자신의 작품을 드러내는 일은 참으로 불쌍한 일이다. 정현종 시인은 “숨어도 가난한 옷자락 보이도다”라고 적었다. 숨겨도 숨어도 보이는 옷자락처럼 시인의 시들은 부끄러움에서 탄생했다. 갑자기 윤동주 시인이 떠오른다. 


『비스듬히』에는 정현종 시인이 예전부터 노트해온 기록들이 사진으로 담겨 있다. 약간은 고풍스러운 낱말들이 시인의 고심을 알려준다. 정현종 시인은 이전부터 ‘사물의 꿈’을 적었다. <상품은 물신이며 아편>이란 시에선 허전함과 불안감, 고독을 상품으로 대신하는 현대인들을 비판하는 듯하다. 




사물로부터 정신을 이끌어내는 시인


<자기기만>은 자기반성인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다. 다음 구절들을 보자. 

“자기기만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 자기기만은 얼마나 착한가 / 자기기만은 얼마나 참된가 / 자기기만은 얼마나 영원한가” 자기를 스스로 속이는 일은 인간이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잘한 일도, 못한 일도 스스로를 위안하는 게 바로 인간이다. 스스로를 높게 칭송하는 일만이 인간에게 주어진 유일한 안식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인간은 자기기만에만 빠지지 않는다. 인간은 천둥소리를 듣고 잠에서 깬다. 정현종 시인은 <천둥을 기리는 노래>에서 천둥소리의 탯줄이 우리 모두를 신생아로 싱글거리게 할 만큼 번쩍이게 한다고 노래한다. 시인은 말한다. “가난한 번뇌 입이 찢어지게 우르릉거리는 열반이여”라고 말이다. 


시인은 분명 다른 이들이 보지 못하는 것을 정겹게 노래한다. 정현종 시인은 심지어 ‘나무 껍질’을 기리기도 한다. 그냥 서 있는 나무 껍질들을 보면 만져보고 싶다고 적었다. 그러면 자신의 몸에도 수액이 흐르는 것 같다는 시인. 마치 이승우 작가의 ‘식물들의 사생활’이 떠오른다. 나무의 껍질엔 따뜻함도, 깊은 밤도, 천둥과 별빛마저 휩싸여 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