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과 증언 - 소설로 읽는 분단의 역사 더 생각 인문학 시리즈 10
이병수 외 지음, 통일인문학연구단 기획 / 씽크스마트 / 202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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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단과 남남갈등…분단의 역사로 기억하고 증언

[서평] 『기억과 증언』(통일인문학연구단 기획, 이병수, 윤여환 외 2명 저, 씽크스마트, 2020. 03.25.)


전쟁의 피해와 상처는 어디까지 침투했고 어디까지 뻗어갔나. 『기억과 증언』)은 독자로 하여금 문학 작품들을 통해 분단의 역사를 살펴보게 한다. 문학은 작가의 상상력으로 만들어진 허구의 세계이지만, 그것을 통하여 사람들의 참모습과 인생의 의미를 깨닫게 해준다는 차원에서 진실성을 갖는다. 역사를 박제된 과거의 사건이 아니라 사람들이 살아온 삶의 이야기로 되살아나게 하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분단의 역사는 영토의 분단에서 국가의 분단, 민족의 분단, 그리고 남남갈등으로 확산되는 과정으로서 분단시대의 역사로 바라볼 필요가 생긴다. 현재까지도 지속되고 재생산되는 분단 트라우마와 분단을 악용하여 명분을 만들어내는 폭력의 문제를 외면할 수 없다는 취지에서 책은 기획되었다.  




불완전한 해방이라는 잘못된 첫 단추


첫 단추가 잘못 끼인 후 수많은 사건과 편견은 시작되었다. 첫 단추는 과오의 역사가 만들어진 요인이기도 하다. 때문에 우리는 이를 파악하는 동시에 그것이 오늘날 우리에게 남아있지는 않는가를 반성해야 한다. 그래야 제발 방지를 위한 사회적 장치를 마련할 수 있다. 


가장 먼저 나온 주제는 빨치산이다. 사회주의 이념과 무관하게 농사를 지으며 살던 농민들이 빨치산이 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과연 무엇이었나. 조정래 작가의 『태백산맥』은 이러한 역사를 설명하고 있었다. 이 작품은 단순히 문학적 형상화를 넘어 해방 후의 역사에 대한 총체적 이해에 커다란 영향을 미치고 있다. 여순 사건이 일어나 진압된 1948년 10월부터 한국전쟁이 끝난 1953년 7월까지 5년간을 다룬다. 농지개혁이 예정된 상황에서 많은 지주가 농지개혁을 피하기 위해 토지를 빼돌린 사건이 있었다. 과정에서 지주를 편드는 경찰의 행위는 농민들에게 불신과 불만을 증폭시켰다.


이러한 소작농들은 사회주의 이념을 제대로 알고서 빨치산에 매료된 것이 아니다. 그것들의 이념 방향이 농지개혁에 대한 자신들의 열망과 같았을 뿐이었다. 해방 정국의 빨치산 투쟁은 갑오년 동학농민혁명이나 일제강점기의 각종 소작쟁의처럼, 모순된 토기소유 관계로 생존이 위협받는 상황에서 농민들의 응어리진 한이 밖으로 분출된 것이었다. 책은 빨치산을 우파와 전혀 다른 이념을 지닌 집단으로 획일적으로 재단하는 것이 얼마나 잘못된 일인지를 잘 보여주고 있었다. 


배고픈 자들에게 빵이 아닌 칼을 빼어든 정부


전명선 작가의 『방아쇠』는 1945년 해방 이후 대구 10월 사건이 발발하게 된 요인을 노동자 현술의 시선을 따라가며 조망한 작품이다. 어느 나라에서든 빵을 요구하는 국민들의 행위가 사회주의나 공산주의로 해석되어서는 안 된다. 그런데 우리 정부는 국민의 가장 기본적 욕구조차 충족시키지 못하였고 오히려 이를 혼내기에 바빴다. 오늘날 대구 10월 사건은 ‘대구 10.1 폭동’, ‘10.1 소요’ 등으로 불리며 그 역사적 과정이나 의미가 제대로 알려지지 않은 채 공산주의자들의 폭동으로 거론된다. 


현기영 작가의 『순이 삼촌』은 제주 4.3 사건을 다룬다. 당시 제주도는 인구의 70%가 좌익단체에 동조한 사람이거나 관련이 있는 좌익분자의 거점이라는 명목으로 빨갱이의 섬으로 낙인찍혔다. 피해자들이 제주 4.3을 누구에게도 털어놓지 못했고 그저 ‘그땐 다 그렇게 생각했다’고만 말했다. 삶이 멈출 때까지 계속되는 그 폭력의 공포는 자신들을 학살하는 데 앞장선 사람들을 가족으로 받아들여서라도 목숨을 부지하게 만든다는 점에서 매우 안타까움을 자아낸다.


양영제 작가의 『여수역』은 여순 사건을 다룬다. 여수의 70년 전은 살육과 방화가 가득한 광기의 밤바다였다. 반공논리로 분단 체제를 유지해온 이전 정부에서는 이 사건을 여순 반란으로 정명하였고, 이를 역사 교육과 언론을 통해 국민들에게 주입해왔다. 이데올로기를 덧씌워 동족상잔을 일으키면서 반공 국가의 위상을 세우려는 고도의 전략이었다. 어쩌면 한반도 전역의 모든 사람은 계기만 있으면 여수사람들처럼 됐을 처지였다. 여순 사건은 국민들의 배고픔을 해결해주지 못하는 무능한 국가가 공식적으로 행한 최초의 양민학살이었고 국가폭력이었다. 


화해와 상생으로 나아가는 길이란


단지 살아남기 위해 마을주민들끼리 고자질하는 모습, 복수심으로 상대를 빨갱이라고 손가락질 한 이웃. 뭣도 모르고 보도연맹에 가입하게 된 소작농들. 간첩이라는 단어를 지니고 살아야 했던 수복지구 사람들. 지목된 사람들은 죄가 없음에도 죄인으로 사는 것을 숙명으로 받아들이고 침묵해야 했다. 지난 시간 동안 빨갱이라는 단어는 사상이 의심되는 사람을 지칭하는 것으로 시작해서 접촉해서는 안 될 바이러스처럼 인식되기에 이르렀을 정도로 확대되었다.  


남은 ‘자유민주주의’를, 북은 ‘사회주의’를 중심에 놓고 그와 다른 정치적 입장을 가진 자들을 내부의 적으로 구분 지었다. 민족이 아닌 사상이 특정 공간에서 사람을 선별하는 조건이 되었다. 여전히 많은 사건들이 나름의 동기와 의미를 잃은 채 오로지 사회주의 세력에 의한 폭동으로 해석되고 있다. ‘빨갱이’. 이 어휘는 일련의 사건을 만든 가장 무서운 말이자 정부로 하여금 반공에 정당성을 제공하는 역사적 경험이자 사상의 불온함을 이유로 상대를 제거하는 죽음의 정치에 더욱 힘을 실어주는 어휘였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지 70여 년이 흘렀는데도 유대인 학살에 가담했던 나치는 지금까지도 법정에 선 채 처벌받고 있다. 오늘날을 사는 우리는 과거로부터 축적된 사회적 유산을 누리며 산다. 유산을 사옥 받고자 할 때는 그 빚도 함께 상속받기 마련이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누리는 사회적 유산의 축적 과정에서 발생한 역사적 책임도 짊어져야 한다. 과거사를 단지 과거의 일로 묻어두고는 풍요로운 미래와 국민통합을 이루지 못한다. 아직도 모든 역사적 진실이 밝혀지지 않았다. 수많은 골짜기에는 죽은 이들이 비탄 속에 여전히 잠들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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