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도지침 걷는사람 희곡집 3
오세혁 지음 / 걷는사람 / 2019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보도지침지상 최후의 농담의 독백과 죽음

[서평] 보도지침(오세혁, 걷는사람, 2019.9.30.)

 

다섯 가지 희곡이 실린 보도지침(오세혁, 걷는사람, 2019.9.30.)에서 단연 돋보이는 희곡은 보도지침이다. 희곡집에 실린 작품들은 우리가 겪어 왔던 시대의 사건을 재구성하고 있었다. 무게 있는 희곡부터 풍자와 웃음을 주는 희곡까지 다양한 장르가 섞여 있었다.

 

보도지침의 무대는 죄를 가르는 법정이자, 말을 주고받는 광장이자, 마음을 고백하는 극장이다. 한때 연극동아리의 동기이자 선후배였던 자들이 법정에서 다시 만나 마치 연극과 같은 썰전을 벌이는 모습과 연극판으로 되돌아가는 형식이 반복된다.

 

연극 동아리에서 이들 모두는 한 때 세상을 이롭게 하겠다는 신념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면서 말로 드러나지 못하고 있는 사회 속 어두운 진실을 자신들이 폭로하겠다고 호언장담하곤 했다. 그러나 시간이 흘러 이들 중 일부는 말로 드러내지 못할 부류가 되어 살게 되었는데, 가장 총명했던 연극부 창시자 선배 역시 그러한 인물 중 하나였다.

 

희극의 대사는 변해버린 동기와 여전히 신념을 지키는 동기간 갈등을 주고받는 형식으로 전개됐다. ‘평범한 국민이 국가의 거대한 작동원리를 이해할 수 있을까요.’ 이에 대해 상대는 국민들이 알지 않아도 되는 국가의 작동원리라는 게 있을까요?’라고 되묻는 주고받기 식이었다

.

코미디언 심철호 씨 중국 방문. 이건 왜 기밀입니까.”, “중국은 공산주의 국가니까요. 자유민주주의 국가의 코미디언이 공산주의 국가에 웃기러 가다니! 이런 웃기는 일이 어딨습니까!”-15p

 


 

웃음 속에 담긴 배우들의 울음

 

연극을 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빨개지는 법이지. 왜냐, 우리 아들이 말한 것처럼 연극은 인간의 영혼을 비추는 거울이니까. 인간의 영혼을 맑게 비추려면 인간이 사는 사회를 먼저 맑게 만들어야 하지 않겠어? 근데 우리나라 좀 이상해. 인간을 얘기하면 따뜻하게 보는데 사회를 얘기하면 빨갛게 봐.”-21

 

위의 말은 암시와도 같았다. 인간의 영혼을 파악하려 애써온 연극부 단원들은 어느덧 하나 둘 사회 속 빨간색이 되어버렸고, 끝까지 버텼던 이들도 고문 가운데 결국 입을 다물어버린다. 호기로 가득했던 이들이 빨간색으로 물든 주요 원인 중 하나는 보도지침이라는 소재를 통해 깊이 있게 드러났다. 그러면서 국제 관계 속에서 우리나라의 이익과 안전보장을 해칠 수도 있기에 국가의 말을 전적으로 믿고 따라야만 한다.’고 주장하는, 변해버린 단원들의 말과 함께 갈등은 점차 심화됐다.

 

대학생들이 종로3가에서 시위하고 나서 청소를 하는 모습이 상당히 성실하게 보일 수 있으므로 청소하는 사진 절대 싣지 말 것. 전두환의 사진은 최대한 활짝 웃는 얼굴로, 김대중 김영삼의 얼굴은 최대한 인상 쓰는 얼굴로 실을 것. 너무 웃기지 않나요?”-40p

 

이야기는 독백을 하는 연극부원들의 모습을 특히 조망했다. 독백이란 힘이 없는 혼잣말에 불과할 수 있다. 하지만 말 안하면 죽을 것 같아서 해야 하는 말이기도 하다. 인물들은 처음 연극부에 들어가자마자 독백하는 법을 배웠다. 선배의 말에 따라 술을 마시면서 무의식을 쏟아냈다. 그리고 그들은 독백에 담긴 인간미와 외침을 알아갔다.

 

나의 독백은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요. 내 안에서 스스로 흘러나오는 것일까요. 아니면 지금, 이 순간에도 어디선가 상처받고 차별받고 사라지고 있는 수많은 이들의 외침에서 나오는 것일까요.”-69

 

미국 대통령 토머스 제퍼슨은 신문 없는 정부와 정부 없는 신문을 택하라고 한다면 정부 없는 신문을 택하겠다.’고 말했다. 과연 우리는 국가에 종속되어 사는 이 시점을 안전하다고 생각하며 사는 걸까. 독백으로 무의식의 억울함을 말하며 살아갈 자유를 지니고 있다고 여기기는 하는 걸까. 많은 생각을 하게 하는 희극이었다.


신문 없는 정부 VS 정부 없는 신문

 

또 다른 희극 지상 최후의 농담은 십 분 단위로 처형장에 끌려가는 동료를 보아야 하는 어느 포로들의 이야기가 담겼다. 죽음 속에서 노인과 아이가 죽음을 미루고, 사람들은 살아 있음을 느끼기 위해 웃고 또 울었다. 어떤 이는 농담과 웃음을 만들면서 영광스럽게 죽었다. 그래서인지 희극에 나온 죽음이라는 소재가 결코 무겁게 다가오지 않았다.

 

생과 사의 갈림길에서 깨달아버렸어! 난 어차피 죽으니까 죽기 살기로 싸웠어! 이 자식은 살 수도 있고 죽을 수도 있으니까 살기 살기로 싸웠어! 죽기 살기가 살기 살기를 이겨버린 거야! 살기 살기로는 운명을 바꿀 수 없어! 하지만 죽기 살기로는 운명을 바꿀 수 있어! 난 죽기 살기로 싸웠어! 그리고 바꿨어! 내 운명을! 이거야! 바로 이거야! 절망 속에서 희망이! 죽음 속에서 삶이!”-104p

 

이외 또 다른 희극 세 편들도 각기 다른 개성으로 생각거리를 제공했다. 책으로 보는 것 이상으로 멋진 연출로서 무대에 세워질 경우 감동을 받을 수 있는 희극들이었다. 이미 그러한 작품들이기도 했다. 다만 현재의 모습을 말로서 적나라하게 드러내기보다 약간 우회적인 표현으로서 관객들이 숨은 의미를 파악하도록 대사를 다듬어본다면 더 좋을 것이라 생각이 든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