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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때 구름이었다 ㅣ 시인수첩 시인선 26
방수진 지음 / 문학수첩 / 2019년 8월
평점 :
당신의 어깨가 아니라 그 틈에 기대고 싶다
[서평] 『한때 구름이었다 (시인수첩 시인선 026)』(방수진 시인, 문학수첩, 2019.08.16.)
나는 한때 시인을 꿈꿨던 적이 있었다. 습작도 해보고, 내 시를 시인에게 보여주기도 했다. 시인의 집에서 소주 한 잔 기울인 적도 있다. 그러나 나는 결국 시인이 되지 못했다. 시인의 감수성으로 밥을 벌어먹고 살기엔 내 깜냥이 부족했던 것이다. 가을을 맞아 반가운 시집 한 권을 읽고 있다. 바로 방수진 시인의 『한때 구름이었다』이다. 우리는 한때 구름이었다가 비였다가 사라진다.
첫 시인 <雨연히>부터 비에 대한 얘기가 나온다. 지금 밖에는 가을비가 내린다. 태풍의 영향이긴 하다. 어릴 적 동네 친구들과 우산 쓰고 그 안에 폭 들어가 있던 날들이 생각난다. 가난하지만 행복했던 시절. “교집합은 아름답다”(14쪽)는 시인의 말이 성큼 다가온다. 비를 유난히 좋아하는 ‘우산장수’ 아이디를 가진 친구가 떠오른다. 비는 감성을 자극한다.
10년 전에 등단하고, 이제야 첫 시집을 낸 방수진 시인은 중국에서 대학원을 다녔다. 방 시인은 중국의 변방인 티베트나 광시 등을 많아 다녔다고 한다. 그래서 『한때 구름이었다』에는 실크로드나 중국 변방의 한 거리가 등장하기도 한다. 허 희 문학평론가는 “방수진은 관념의 형이상학자와는 거리가 멀다. 그녀는 육체의 현상학자다. 허황된 말을 남용하지 않는다는 의미다.”(127쪽)라고 적었다.
![](https://image.aladin.co.kr/Community/paper/2019/0922/pimg_7576941242304292.jpg)
형이상학보단 현상학에 가까운 시들
방수진 시인의 시들은 조금 어둡고, 그런 과거를 지닌 듯하다. 상처들이 시인 주위를 맴돌고 있는 듯한 인상을 받는다. 누군들 그러지 않겠느냐마는. <ㄱ의 감정>이란 시에선 둥글지 못한 자신의 생을 반추하는 듯하다.
“직선이 제 팔을 꺾어 곡선이 될 때 수만 개의 관절이 부서지고 뒤틀린다. 차마 둥글어지지 못한 것들은 각이란 허공을 가지지.”(19쪽)
방 시인은 심지어 <무인반납기>에서 “왜 슬픔은 먹어도 먹어도 허기지는가”(21쪽)라고 푸념을 늘어놓는다. 결국, 우리 인생은 타인을 위해 존재하는 건 아닌가라는 생각까지 미친다. “왜 미소는 타인을 위해서만 존재하는지 깨닫곤 했었다”(20쪽)
『한때 구름이었다』에는 가을에 걸맞은 고독과 애수를 드러내는 시들이 많다. 아래에선 직접 각 시들과 인상 깊었던 시구들을 옮겨본다.
<자라나는 소년들>
“돌아올 수 없는 사람을 바람이라 부릅니다.”(42쪽)
<자라나는 소년들 2>
“풀은 우리보다 빨리 자라고
웃음은 자작나무보다 빨리 떨어져요.“(44-45쪽)
<아마존 일기>
“울지 말고 날아가라 기대를 저버리는 순간
어른이 되는 거야
살들아 살들아 침 흘리는 치욕들아“(55쪽)
<어떤 불시착>
“뒹굴뒹굴 두 생애가 서로를 위로하고 있다”(61쪽)
(임신한 한 여성과 곧 태어날 아기를 비유)
<낙엽을 버티는 힘>
“가랑비 몇 방울에도 못 이기는 척
떨어지는 잎사귀가 있다
잎맥 끝자락부터 몸을 뉘어 놓는, 허나
누군가의 어깨 위로 제 몸을 던지는 것이 아니라
낙엽과 낙엽 사이 그 허공의 힘으로 눕는다“(71쪽)
<보도블록, 미완성 3악장>
“너와 내가 걷는 이 보도블록, 그 위로
많은 어깨들이 부딪히고 떠났다
서로의 틈새를 메워 가는 일
이 겨울
안방과 건넛방 사이의 거리가 서서히 좁아지고 있다“(85쪽)
<그날들>
“감기약도 제 캡슐을 벗고 싶을 때 있었을까
나의 여름이 아버지의 겨울을 이기고 싶었던 것처럼“(89쪽)
<가로등>
“진실로 외로워 본 자들은 알지
어둠이 어둡지 않다는 걸
너무나 밝고 환해서
한 번의 마주침으로도
시력을 잃기도 한다는 걸“(102쪽)
<무너지는 진화>
“자신의 피를 맛본 사람만이 어둠을 견딜 수 있다”(120쪽)
허 희 문학평론가는 방수진 시인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그녀의 시에 깊이·넓이·입체가 존재함”(137쪽), “방수진의 구름에서 반짝거리는 걸 살펴보라는 조언”(138쪽). 오랜만에 좋은 시집을 만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