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의 이름은 - 이제야 기억합니다, 여성 독립운동가
북핀 편집부 지음 / 북핀 / 201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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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일투쟁이 여성투쟁남자의 덧붙이 아니다

[서평] 그녀의 이름은 (이제야 기억합니다, 여성 독립운동가)(편집부 저, 북핀, 2019. 06.28.)

 

지금의 대한민국은 남녀노소 모두가 힘써 이룬 국가다. 우리가 학창시절 배운 독립운동가나 예술가는 주로 남성이다. 또한 여성 독립운동가 또는 3.1운동이라 하면 유관순 열사 한 분만을 떠올려 왔다. 하지만 여성 독립운동가와 3.1운동에 참여했던 사람은 수없이 많다. 대한 독립이라는 목표를 이루기 위해 나이, 학력, 신구의 제한 없이 수많은 항일운동단체를 조직하여 활동한 여성들도 무수하다. 그녀의 이름은은 그런 여성들의 활동을 간략히 소개하며 기리는 듯한 얇은 인명사전이다.

 

책을 읽으며 기억에 남는 인물이 몇 있다.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고공 농성을 벌인 노동운동가 강주룡 지사는, 일본의 불합리한 임금삭감, 노동 착취를 고발하기 위해 시위를 벌인 여성항일노동운동가다. 파업 도중 일본경찰에 의해 공장에서 쫓겨나게 되자 강주룡 지사는 늦은 밤 자그마치 높이 12m의 을밀대 지붕 위로 올라가 여성해방과 노동해방을 외쳤다.

 

훌륭한 위인의 곁에는 훌륭한 조력자가 있기 마련이다. 그는 배우자일 수도 친구일 수도 부모일 수도 있다. 백범 김구 선생의 조력자 뒤에는 그의 어머니인 곽낙원 지사가 계셨다. 권기옥 지사는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비행사다. 상해 망명 후 항공 학교를 입학하고자 했지만 여자라는 이유로 번번이 거절당했지만 운남육군항공학교 제1기생 중 유일한 여학생으로 입학할 수 있었다. 졸업 후 중국 공군에서 10여 년 동안 일본군과 맞서 싸우며 약 7000시간의 비행기록을 세웠으며, 상해사변에서 공을 세워 훈장을 받기도 했다.

 

 

독립 운동과 여성 해방을 동시에 외치다

 

당시 많은 여성 독립운동가들은 항일투쟁의 길이 여성해방의 지름길이라는 생각을 지니고 있었다. 광복창간호에 지복영 지사도 이중 삼중의 압박에 눌리어 신음하던 자매들! 어서 빨리 일어나서 이 민족해방 운동의 뜨거운 용로 속으로 뛰어오라. 과거의 비인간적 생활은 여기서 불살라 버리고 앞날의 참된 삶을 맞이하자.”는 글을 기고했다. 차미리사 지사는 남자의 덧붙이가 되지 말라는 말을 했다.

 

살되, 네 생명을 살아라/ 생각하되, 네 생각으로 하여라/ 알되, 네가 깨달아 알아라.

 

최은희 지사는 경성여고보 3.1운동, 배천 3.1운동의 주도자이며 일제강점기에 왕성한 활동을 펼쳤던 여성기자다. 그녀는 신문 지면에 가정란을 만들어 부인들이 알아야 할 상식, 여성의 위치, 여권을 높이는 길에 관한 기사를 썼으며 남자들조차 꺼렸던 아편굴, 매음굴과 같은 사회의 그늘진 곳을 취재하여 사회상을 드러내는데 힘썼다. 1984년부터 매년 헌신적인 취재와 보도 활동을 하는 여성 기자들에게 최은희 여기자상을 수상하고 있다.

 

영화 <암살>의 여성저격수 안옥윤역할의 모티프가 된 남자현 지사는 48세의 나이에 독립운동에 투신하고자 만주로 망명해 연락책, 무기 운반, 무장투쟁 등 독립을 위해 어떤 일이든지 가리지 않고 선봉에 서서 활약했다. 박차정 지사는 남경조선부녀회 선언문에 민족해방과 여성해방이 동시에 이루어져야 한다는 글을 썼다. 의열단 활동을 하면서 여생도의 교육을 담당하며 많은 여성 독립운동가를 양성했고, 조선의용대 부녀복무단장으로서 여성대원들을 이끌고 항일부장투쟁의 선봉에 서기도 했다.


한국광복군 기간지 광복창간호에 오광심 지사의 글 한국 여성동지들에게 인언을 드림이 기고되었다. “광복군은 삼천만 국민의 군대이며 그 가운데 반은 여성이기에 광복군은 남성의 전유물이 아니며 여성의 것도 된다.”는 이야기다. 여성의 존귀한 존재성을 강조하면서 여성의 독립운동 참여를 호소한 분이다. 이병희 지사는 이육사 시인의 친척이자 동지였으며 일제로부터 그의 시신과 유고시를 인도받아 유족에게 전해준 사람이었다.

 

정칠성 지사 역시, 가정과 사회에서 무시당하고 열등한 인간 취급을 받던 여성들에게 깨어나라는 외침을 한 자이다. ‘금죽이란 기명으로 살아가던 그녀의 삶은 191931일 이후로 180도 달라졌다. 민족대표 33인이 태화관에서 독립선언서를 발표할 때 그곳에서 일하던 그녀도 동참하면서 이전까지의 삶과 작별을 고했다. 좌우합작여성항일단체 근우회의 집행위원으로 활동했으며, 민족해방과 여성해방을 부르짖으며 순회강연을 다니고 글을 써서 신문과 잡지에 기고하기도 했다.

 

직책과 나이가 무슨 상관인가

 

똑같은 글이나 그림을 여러 장 찍어내는 수동식 인쇄기인 등사기가 있다. 1919331, 김현경 지사와 동료 교사, 학생들은 경성에서 가져온 독립선언서를 바탕으로 독립사상을 고취시키는 선언서를 작성한 후 1,000장을 등사했다. 그리고 41, 공주시장에서 선언서와 태극기를 군중들에게 나누어 주고 만세운동을 전개했다. 김현경 지사는 유관순 열사가 옥중 순국하자 유해를 인수하여 장례를 치러주기도 했다.

 

윤봉길 의사의 도시락폭탄 의거, 이봉창 의사의 일왕 암상 시도 의거에는 여성 조력자가 있었다. 이화림 지사는 윤봉길 의사와 일본인 부부로 가장한 후 현장답사하며 사건을 계획했으며, 이봉창 의사에게 폭탄을 숨길 바짓가랑이 주머니를 만들어 주고, 나물 장사, 수놓기 등으로 돈을 벌어 임시정부에 경비를 지원하기도 했다.

 

조신성 지사는 대한독립청년단의 총참모이면서 48세임에도 불구하도 무수한 일을 해냈다. 일본 관공서 파괴, 일본에 부역했던 관공리 처단, 일본경찰서와 군청에 사형선고서. 협박장 발송, 무기 탈취, 호랑이굴 안에서 인쇄기 3대와 12000자의 활자로 선전물을 제작했다. 또한 지역 소학교, 이화학당을 거쳐 도산 안창호 선생이 설립한 진명여학교의 교장을 지내는 등 교육활동에 힘썼다. 우리는 이러한 여성들의 이름을 한 번씩 보고 그들이 살았던 시대 속에서 행했던 노력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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