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망 대신 욕망 - 욕망은 왜 평등해야 하는가
김원영 지음 / 푸른숲 / 201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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귤 두 봉지로 장애인 편견을 없애는 방법

[서평] 『희망 대신 욕망』(김원영 저, 푸른숲, 2019. 04.20)

 

아침부터 눈에 띄는 기사가 있었다. <펜스 너머 잔디밭에 안내판....“휠체어 앉아 어떻게 보나요”> 안내판 각도가 너무 경사지고, 글자가 작고 빽빽하고, 보도와 분리된 잔디밭에 세워져 있어 휠체어에 앉아 보기가 힘들다는 내용이었다. 며칠 전만 해도 그냥 지나쳤을 만한 기사였다. 하지만『희망 대신 욕망』이라는 책을 읽은 뒤라 장애인 문제를 그냥 지나치지 못하게 되었다.

 

저자는 “장애를 이해하는 일이 외국어를 공부하는 일과 유사하다.”고 말했다. 하나의 외국어를 통해 그전까지 알지 못하던 세계에 눈을 뜨는 것과 같은 이치인 것이다. 아는 만큼 보인다는 표현이 다시 진리처럼 다가오는 순간이었다. 저자는 자신이 장애인이라는 걸 깨닫는 데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누군가 나를 대놓고 차별하거나 비아냥거리는 일은 거의 없었지만 세상에서 보이지 않는 존재처럼 사람들이 대하곤 했기 때문이다. 줄을 선 경우 종종 누군가 너무나 자연스럽게 앞으로 새치기를 하는 순간에는 스스로가 마치 풍경과 같다고 느꼈다.

 


재활원에서의 소심했던 이들

 

어린 시절 저자는 스무 평 남짓한 시골집에서 두 팔로 기어 다니는 것이 전부였다. 외출이라고는 병원에 갈 때뿐이었다. 열다섯 살이 되어 초등학교 졸업 검정고시를 준비했다. 그리고 장애인 등록을 했다. 이에 대해 저자는 “특수학교에 입학하기 위해 필요한 어쩔 수 없는 우울한 조치였다.”고 회상했다. 책은 저자의 재활원 생활에 대해 적나라하게 묘사되어 있었다.

 

재활원은 인간이 모여 있는 곳이라면 어디나 그렇듯이 나름대로의 서열이 있었다. 발달장애가 없고, 상체의 기능이 원활하면 소위 상류층에 속하기 쉬웠고, 소아마비나 척수장애인 선배들은 끼리끼리 모여 다녔다. 발달장애를 가지고 있거나 신체장애가 중한 사람들은 주로 하류층에 속했다. 그곳은 사실 별 다를 바 없는, 구별 짓기를 좋아하는 바깥세상의 10대 청소년들의 모습을 그대로 닮아 있었다.

 

당시 저자는 매우 소심하고 예민했다. 외부에서 누군가를 위해 찾아오는 사람들에 대해 부정적인 시각을 가지고 있었는데, 자신들에게 한없이 친절하고 헌신적이지만 자신이 다른 세계에 살고 있다는 사실을 한순간도 잊지 않는 사람들이라 여기며 거리를 두었다. 그저 잠시 자기 세계의 문제들을 미루어두고 새로운 공간의 정취를 즐길 뿐이라고만 생각했다. 그래서 자원봉사자들과 친해지는 일이 별다른 의미가 없다고 느껴 지루한 시간을 보냈다. 물론 그들과 친해지고 싶었고 연락처를 알고 싶었지만 상처받고 싶지 않은 마음이 더 컸다.

 

자원봉사자들이 자신의 연락을 진심으로 반기지 않을 거라 여겨 부담을 주기가 싫었다. 하지만 그 와중에 저자는 자신의 신념을 깨는 이들을 만나게 된다. 한 여자는 저자를 특별한 존재로 취급하지 않았고 이 때문에 저자는 진정 특별한 사람이 될 수 있었다. 재활학교를 통해 새로이 공부를 시작했고, 우정을 배웠고, 무대 위에 섰고, 사랑을 경험했다. 그 모든 일이 단 3년 동안 일어났다. 이를 저자는 이렇게 회상했다. “집에서만 생활하던 내가 만약 재활원에서의 경험 없이 바로 세상으로 나갔다면, 그대로 절망해 주저앉았을지 모른다.” 재활원 생활은 그만큼 저자에게 중요한 준비 기간이었던 것이다.

 

장애를 대하는 사회적 개인적 노력

 

장애인과 비장애인을 분리해서 교육하는 것은 장애아를 편안하고 전문화된 체계 속에서 성장할 수 있게 하고 때로 그들에게 자존감을 심어준다. 그러나 세상은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함께 살아가는 공간이다. 앞으로 삶을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의 문제인 것이다. 저자는 이 껍질을 평생 안고 가느냐 깨고 나가느냐 선택을 해야 했다.

 

장애에 뒤따르는 어려움을 넘어서기 위해서는 혼자의 노력뿐 아닌 공동의 노력이 필요하다. 공동의 노력이란 남의 도움 없이도 충분히 다닐 수 있도록 시설을 갖추었어야 할 책임을 지는 것이다. 만약 장애인이 누군가의 도움을 받아서 남들에게 피해를 준다면, 그건 사회가 미안해야 할 일이지 장애인이 미안해야 할 일이 아니라는 점이다. 또한 여기서 혼자의 노력이란 반짝이는 기지를 발휘하는 것이다. 책에는 다음과 같은 재미있는 이야기가 나온다.

 

<아무한테도 피해 안 주고 햄버거 사 먹는 법> = 패스트푸드점 앞에 차를 세운다. 그 옆에 귤을 파는 아저씨가 있다면 불러서 귤 2천 원어치를 사고는 가게 안의 점원을 불러 주라고 요구한다. 아저씨는 기분 좋게 가게로 들어간다. 그 사이 귤 한 봉지를 반으로 나누어 하나는 차에 두고 하나는 봉지 안에 그대로 넣어둔 채 다가오는 점원에게 건넨다. 그리고 햄버거 세트 두 개를 가져다 달라고 한다. 점원은 얼떨떨해 하면서도 햄버거 두 세트를 차까지 가져다주며 오히려 고맙다고 말한다. 누구에게도 부담 주지 않고 차 안에서 햄버거를 먹을 수 있는 방법이다.

 

장애를 만드는 사회

 

장애인 스스로가 모욕을 견딜 수 있도록 강력한 정신력을 갖추어야 하는 사회가 되어있는 현실이 안타까웠다. 한국 사회에서는 오래 전부터 장애인의 인권을 보장하기 위한 운동이 다양한 방식으로 이어져왔다. 그 움직임이 가장 폭발적으로 나타난 것은 바로 지하철과 버스 점거로 상징되는 2001년의 장애인 이동권 운동이었다.

 

장애인 인권 운동은 사실 특정한 사회 집단의 인권에 대한 운동이라기보다는 취약한 몸, 불균형한 몸, 병약한 몸, 노화한 몸을 포함한 우리 모두의 일반적인 몸에 대한 새로운 권리를 확보하는 과정이다. 사람들은 이들을 이해하면서도 장인들이 그 권리를 위해 버스나 지하철을 멈췄을 때 사람들은 그것을 용납하지 않았다. 하지만 장애인들은 물러설 수 없었다. 그럴 경우 ‘수십 년씩’ 집구석에 처박혀야 하는 삶이 다시 이어지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시민불복종은 사회를 상대로 협상할 어떤 권력도 없는 집단이 선택하는 최후의 방식인 것이다. 지하철 선로에 누운 그들은 이렇게 외쳤다. “우리의 몸을 바꾸는 것은 불가능하다. 하지만 사회를 바꾸는 것은 가능하다.”

 

여전히 장애인을 무성적 존재로 인식하는 사람들이 많다. 이들이 성관계를 통해 아이를 낳고 기르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하며, 아이를 낳는다 해도 아이에게 장애가 유전되어 사회에 또 다른 부담을 지울 것이라는 인식이 팽배하다. 보호와 시혜라는 틀 안에서만 존재를 드러내왔기에 인간이라면 누구든 품을 수 있는 욕망, 욕심과는 거리가 먼 사람들로 인식된 것이다.

 

저자는 자신의 삶을 통해 욕망을 품고 자라나는 한 인간을 보였다. 저자의 삶은 평범한 인간의 삶이었다. 그에게 가장 장애가 됐던 건 사회의 눈초리와 인프라였음을 책을 통해 다시금 생각하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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