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벼운 걸음 - 박이도 詩 선집
박이도 지음 / 시간의숲 / 2019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유혹 갈망하는 현대인들에게 '시'를 권하다

[리뷰] 『가벼운 걸음 (박이도 시 선집)』(박이도, 시간의숲, 2019.01.15)

 

여기 멋진 시가 있다.

 

「돌밭에서」= 너는 지상의 별/ 아직 이름 할 수 없는/ 원시의 형상// 물먹은 강돌이/ 제 색깔로 드러나며/ 꽃의 형상을 짓는다/ 햇빛 먹은 물돌은/ 살아나는 몸짓으로/ 새의 형상을 짓는다/ …….

 

박이도 시인의 시집 『가벼운 걸음』에 나온다. 이번 시집에서 박이도 시인의 주요 글 소재는 자연과 인간이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자연학과 루소의 ‘자연으로 돌아가라’는 표어까지 시에 녹여 철학적인 감정들을 선보였다. 자연을 중심으로 삶과 사회를 그린 것이다.

 

간혹 시를 읽고 내용을 이해할 때면 강한 화끈거림이 밀려온다. 마음의 비밀과 타인의 심리를 꿰뚫은 듯 어찌할 바를 모를 때가 있다. 며칠 전 답답함에 한강을 찾아 강변을 따라 걸은 적이 있다. 미세먼지가 뿌옜고 멀리 롯데타워가 겨우 보일 정도였으며 그 주변으로는 구름이 솟은 듯 빌딩과 산이 보이지 않던 날이었다. 사람이 거의 없었다. 다리 두 개를 지나가던 때 남자의 고함소리가 들려왔다. 다리 위에서 한 남자가 무어라 악을 지르고 있었다. 난간에 상체를 걸치고 있어 위태로워보였다.

 

몇 차례 고함을 지르던 남자는 조용해졌다. 그리고는 그저 한 없이 오래도록 강 멀리를 쳐다보았다. 이후 난 남자보다 먼저 강변을 떠나갔기에 남자가 어떻게 되었는지는 모른다. 그런데 그날 남자는 아마 나처럼 강을 제대로 보지 못했을 것이다. 먼 곳을 보며 답답함을 뻥 뚫고 싶었을 것이지만 눈앞은 더욱 뿌옇기만 했다. 그래서 악을 질렀는지도 모른다.

 


답답한 현대인에게 들려줄 시

 

이상하게도 그날의 답답했던 나보다도 그 남자에게 이 시집을 먼저 읽으라고 선물하고 싶은 심정이다.

 

「시간1」= 허물어지는 것들이 보인다/ 겨울 하늘/ 허옇게 부서져/ 태고처럼 손닿지 않는 정다움/ 벋어가는 인정의 끄트머리에/ 티끌로 날리는 석양이 보인다//

성채가 무너지고/ 산이 떠밀리는/ 생생한 그림이 펼쳐진다/ 철새가 날고/ 뒤로 달리는 시간이/ 불빛처럼 번쩍인다/ 밝은 날빛을 밀어내고/ 완강한 어둠의 병사가 다가와//

드디어 기침하는 내 영혼/ 잊혀졌던 시간이 보인다/ 무너진 허공으로/ 철새처럼 돌아오는 영혼….

 

「시간4」= 미지의 시간/ 신화의 세계/ 신의 나라/ 그 시간의 영원함//

내 안의 환상이여.

 

「해는 지는데」= 해는 지는데/ 아직 갈 길은 멀고/ 누구 하나 말벗이 없구나//

서산에 불타는 해님은/ 뉘엿뉘엿 사라지며/ 네 가는 길의 끝은 어디냐고/ 조용히 묻고 있지 않는가//

멧새들이 소곤대며/ 잠자리를 찾아가는 모습은/ 나를 외롭게 한다//

……. 내가 걸어온 길은 어디로 사라졌을까.

 

「오열」= 울고 싶은 밤이다/ 먼 강가에 서린 정적,/ 밤 낚시꿈의 헛기침이/ 조용히 파문 지는 수면에/ 피를 토해 달을 그리듯/ 나의 진실은 울고 싶은 밤이다/ …….

 

시는 남자에게 자기를 올바로 표현하는 거울이 돼줄 것이다. 시를 읽고 눈물을 흘리며 스스로가 스스로를 위로할 용기를 얻어 다시 일어설 용기를 얻을 것임을. 그림자조차 없던 그날 저녁, 오히려 우주의 그림자가 지상에 휑했다.

 

감정이 응축된 판도라의 상자, 시

 

기원전 388년 플라톤은 아테네의 지도자들에게 모든 시인과 이야기꾼들을 추방하라고 요구한 적이 있었다. 권위적인 인간형이었던 플라톤은 그들이 사회를 위협한다고 주장했다. 감정에서 나오는 위협이 두려웠던 차였다. 왜냐하면 플라톤 같은 철학자들은 공개적이고 이성적인 방식으로 시민들을 다루지만 작가들은 아이디어를 시민들에게 내밀기 때문이었다.

 

예술이 가진 유혹적인 정서 안에 그 아이디어들을 밀봉해 넣어 거짓말을 폭로하고 변화를 향한 열망에 영감을 불어넣음으로써 작가들이 권위를 위협한다고 플라톤은 믿었다. 이번 박이도 시인의 글들을 보자면 너무도 암담한 현재가 느껴진다. 하지만 그것은 ‘진실’이었다. 유혹을 갈망하는 현대인들이 다시금 마음을 다잡아보게 하는 진실인 것이다.

 

『가벼운 걸음』에는 플라톤이 두려워하는 정서가 담겼다. 작가는 자신의 판도라 상자에서 시를 꺼내 읽은 사람들이 눈물을 흘릴 것임을 알고 있을 것이었다. 그래서 당당하게도 ‘가벼운 걸음’이라고 제목을 붙였다. 시를 읽은 이들의 몸에서 눈물의 무게가 빠지며 집으로 되돌아가는 걸음이 가벼워지길 바라면서 말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