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파, 새로운 주권자의 이상한 출현
박구용 지음 / 메디치미디어 / 201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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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파(문빠)’에 대한 철학적 분석, 시도는 좋았으나

[리뷰] 『문파 새로운 주권자의 이상한 출현 : 의회와 언론이 시민을 대변하지 않는 시대』(박구용, 메디치미디어, 2018.11.12)

 

‘우리 안의 타자’ 문제에 천착해온 전남대 철학과 박구용 교수의 신작이 나왔다. 바로 『문파 새로운 주권자의 이상한 출현』다. 부제는 ‘의화와 언론이 시민을 대변하지 않는 시대’다. 현재 한국연구재단 인문사회본부장과 시민자유대학 이사장을 맡고 있기도 한 박구용 교수는 시대의 문제에 관심을 기울이고 발언해오고 있다. 그런 박구용 교수가 스스로를 고백하고 한계를 극복하기 위한 현실 정치의 철학서를 썼다.

 

박 교수의 핵심은 책의 마지막 문장에 요약돼 있다. “내가 만난 문파는 각자 자기 생각을 말하지만, 서로 다른 말을 하는 다양한 얼굴의 시민들이었다.” 그동안 광주를 기반으로 철학의 경계에서 정치·사회 문제를 돌아본 결과, 문재인 대통령을 지지하는 사람들의 세력인 ‘문파’ 질적으로 다르다는 게 요지다. 문파를 분석하기 위해 박구용 교수는 28개 질문을 직접 만들어 설문하고 인터뷰했다.

 

책의 제목인 문파는 문빠와 다르다. 그동안 문빠는 ‘달빛기사단, 문팬, 문꿀오소리, 문각기동대, 문위병, 문슬림, 문베충’ 등으로 불려왔다. 박 교수는 ‘문빠’는 정치인 문재인에 대한 팬덤으로, ‘문파’는 문재인이라는 정치인을 매개로 시민 주권을 활성화시키는 정치 현상으로 지칭한다고 밝혔다. 문파나 문빠는 (노사모나 다른 정치 지지자들의 모임과 비교해) 구체적인 실체가 없이 작동하고, 세력이나 권력 존재 없이 작용하는 이합집산의 현상에 가깝다. 박 교수는 “문재인이라는 플랫폼을 기반으로 펼쳐지는 민주정치에 대한 당파적 지지자의 총괄 개념으로 ‘문파’라는 용어를 쓰고자 한다.”고 적었다.

 



질적으로 다른 세력으로서 ‘문파’

 

책은 민주주의의 위기를 언급하면서 시작한다. 2017년 3월 10일, 박근혜 전 대통령의 탄핵이 없었다면 지금의 우리는 어떨까? 언론에 보도된 것처럼, 국군 기무사령부가 작성한 그 이후의 실행 방안은 독재 시대로 시계를 돌렸을 것이다. 따라서 민주주의가 무엇인지 규명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민주주의는 주권과 인권의 두 권리 체계로 구성된다. 책의 후반부에 다시 언급되는 주권과 인권의 관계는 그 어느 하나가 다른 하나를 억압할 수 없다.

 

대의 민주주의와 사이비 민주주의는 프레젠테이션과 리프레젠테이션의 관계로 설명된다. 대의 민주주의는 시민들이 함께 프레젠테이션을 한 의지가 의회와 언론이 리프레젠테이션 한다. 반대로 사이비 민주주의는 의화와 언론이 프레젠테이션한 결과를 시민들이 리프레젠테이션 한다. 포스트 민주주의는 한마디로 자본 귀족주의다. 의회와 언론이 자본에 종속돼 있는 경우가 바로 포스트 민주주의다.

 

우리가 지향해야 할 바는 다원주의적 민주주의다. 기존의 정치 질서에서 새로운 질적 차이를 만들어내고 당파성과 보편성이 아우러진 인정 투쟁을 주도해야 하는 것이다. 이를 문파가 잘 수행하고 있다고 박 교수는 진단한다. 박 교수는 알베르 카뮈의 『반항하는 인간』을 인용해 “의식의 각성은 반항적 운동으로부터 태어난다”고 강조했다. 반항하는 인간은 거부는 해도 포기는 하지 않는다.

 

다원적 민주주의 위한 반항적 운동과 각성

 

문파를 설명하면서 등장한 여러 예시 가운데 안철수 분석은 흥미롭다. 한때 대단했던 안철수 현상은 안철수가 현상 그대로 놔둠으로서 그 효과가 극에 달했다. 즉, 안철수가 안철수 현상을 소유하지 않았을 때 극점에 오른 것이다. 하지만 새로운 민주주의를 염원하며 만들어진 안철수 현상은 정치의 세력화를 위해 안철수의 손에 들어가는 순간 사라지고 말았다. 역설적이다. 새로운 정치에 대한 열망을 가지려고 하는 하면 오히려 멀어지는 것이다. 열망과 현상은 소유할 수 없다.

 

반면, 박구용 교수에 따르면 문파의 경우는 다르다. 문재인 대통령이 문파의 정치적 열망을 소유하지 않으려 한다. 거꾸로 문파가 정치적 권력을 가지려고 하지 않는다. 박 교수는 “한마디로 문파의 힘은 그것이 현상으로 머물러 있을 때까지 유지될 것이다.”라고 분석했다.

 

박구용 교수는 김규항의 노빠에 대한 비판이나 문빠에 대해 극단적 언급을 한 서민 교수에 대해서도 철학적 분석을 진행한다. 서민 교수의 언급은 논할 가치도 없는 수준이고, 김규항 작가는 ‘사랑’에 대한 근원적 물음을 제기한다. 김규항은 <경향신문> 칼럼에서 인간 노무현과 정치인이자 대통령인 노무현을 달리 봐야 하며 사랑하려면 그 사람의 처지에서 생각하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특히 노빠들은 자기애를 노무현에게 투사한 것이라 비판에도 귀를 닫을 정도였다. 이에 대해 박구용 교수는 사람은 역할이나 사회적 관계에서 결코 분리할 수 없는 존재이며, 사랑의 속성에 대해 다른 의견을 제시했다. 박 교수에 따르면, 사랑은 나르시시즘적 자기애가 아니다. 사랑은 관계에서 피어나는 특별한 소통이고 연대의 감정이다. 하지만 사랑은 상처를 먹고 자란다. 사랑은 일방적이지 않고 선언적이지 않으며 단념하지 않는 것이라는 뜻이다.

 

일견 이해가 가는 측면이 있기도 하나, 박구용 교수는 김규항 작가나 서민 교수의 글에 대해 어떤 고정된 지점(혹은 실체)가 있는 것으로 상정하고, 본인의 생각은 끊임없이 변동하고 달라진다는 점을 가정한다. 문파 역시 마찬가지다. 예를 들어 문파를 “비당파적 당파”라고 규정하거나 “하나의 이념을 가진 조직이나 기관이 아닐 뿐만 아니라, 실체적 권력을 향한 욕망을 가지고 있지도 않다.”고 설명한다. 더욱이, 문파는 기존 정치권력을 획득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 권력으로부터 이탈하고자 정치적 행위를 한다고 설명된다. 어디서 많이 듯 던 말들이다. 늘 정치인들이 귀가 닳도록 하는 말이다.

 

다음 문장을 보자. “주권자로서 문파가 공적 담론에 참여하는 방식은 새로운 만큼 낯설고 이질적이다.” 그렇다면 낯설고 이질적인 문파라는 현상은 과연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라는 물음이 남는다. 결국, 어쩌면 문파에 대해서 아무것도 설명한 게 아닐지도 모른다는 뜻이다. 또 다른 문장은 이런 나의 생각을 다시 확인시켜 준다. “문파는 각기 다른 동기, 각기 다른 취향, 각기 다른 지역, 각기 다른 이념을 가진 사람들이 광장을 매개로 소통하고 연대하며 해체되는 과정에서 현상으로 있을 뿐이다.”

 

비판적 지지가 아니라 지지에 기반 한 비판을 강조한 지점 등은 충분히 수용할 수 있다. 당파성과 보편성, 역사성, 다원적 민주주의를 강조한 것도 동의한다. 하지만 문파에 대한 박구용 교수의 철학적 분석에 대한 그 과정에 전적으로 동의하긴 힘들다. 정당정치와 의회 및 언론이 그가 말하듯 팟캐스트와 SNS, 시민의 광장으로만 견제되고 당파성을 갖는다고 보기 어렵기 때문이다. 단계와 절차적 정의는 여전히 유효하며, 때론 걸출한 정치인이, 또 때로는 정치의 필연과 우연이 서로 만나 새 장을 펼쳐내기도 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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