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틸라이프
가이 대븐포트 지음, 박상미 옮김 / 을유문화사 / 202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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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물 #정물화 #예술책


※을유문화사로부터 도서 협찬받아 작성한 서평입니다.


아직도, 삶이 가능하다면(Still-Life)


지아장커의 〈스틸라이프〉(2006)는 사라져 가는 풍경을 쓸쓸한 정물처럼 담아내는 슬로우시네마다. 해당 장면은 이 느릿느릿한 영화가 느릿느릿하게 선사하는 가장 놀라운 광경이다.


죽지 않은 자연 Natura NON morte
그것은 과일 한 그릇이었다.
찰스 올슨, 「모닝 뉴스」


〈인트로덕션〉(2021)으로 베를린영화제 은곰상을 받은 홍상수가 수상소감으로 보여준 달팽이.


가만히 멈춰 있는 것, 또는 아주 느리게 약동하는 것들에 좀처럼 집중하기 힘든 정신없는 세상이다. 아스팔트를 기어 건너는 달팽이의 끈적함에 발이 묶여 한참을 들여다보던 시절은 이미 빛바랜 기억이 되었고, 한곳에 오래도록 주저앉아 있기에 지구의 자전 속도는 너무 빠르기만 한데, 시간당 1,670km의 속도, 그러니까 매 초 460m씩 흘러가는 시간을 따라잡기에 나는 너무 더디고, 가끔은 그런 의지조차 비웃으면서(어차피 한 바퀴 돌아봤자 다음 바퀴가, 또 다음 바퀴가 지루하게 이어질 텐데 그리 열심히 뛰어서 무엇하나, 하는 메스꺼운 냉소), 다시 자리를 잡고 주저앉아 사라진 달팽이의 흔적을 찾다가, 땅바닥에 처박고 있던 고개가 뻐근해지면 목덜미를 지그시 주무르고, 그러고 나서도 여전히 똑바로 앞을 쳐다보고 싶진 않은 반항심에, 차라리 고개를 거꾸로 쳐든 채로, 낮에도 밤에도 별이 보이지 않는 혼탁한 대기를 올려다보며 내 눈이 멀어버린 건 아닐까 곰곰이 의심하다가, 별안간 별이 뜨지 않는 나의 시대를 원망하고, 저주하고, 지구와 반대방향으로, 말하자면 마이너스 243일의 속도로 하루를 나는 금성에서의 여유로움을 떠올리면서 달콤한 낮잠에 잠시 빠졌다가, 한참을 자고 일어나도 이어지는 한낮의 그 끔찍한 지루함, 느림, 시간이 멈춰 버린 듯한 쨍쨍함에 완전히 질려버릴 다른 행성에서의 권태를 상상하게 되면, 급히 고개를 젓고 도로 길을 나서는.


국도변에는 코스모스가 있다. 추석을 맞아 시골에 다녀오던 길. 도로의 가장자리를 나른하게 감싸는 그즈음의 코스모스는 한가했고, 추억은 여태 그곳에 머물러 있다.


요즘엔 명절에도 시골에 내려가지 않는다.


코스모스는 아직 거기 있을까.






느린 것들을 도무지 견딜 수가 없는 우리 시대는 영화를 스킵하거나 배속으로 보고, 간간히 찾아가는 전시회에서조차 멈춰 있는 그림들 사이를 스쳐가듯 급하게 지나친다. 노래는 길어도 4분을 넘지 않는다. 더이상 아무도 앨범 단위로 음악을 듣지 않고, 긴 호흡의 장편소설을 읽지 않는다.


모든 예술이 흘러가는 것을 붙잡아 두려는 부질없는 시도라면, 그러니까 헤라클레이토스적인 시간을 거부하려는 인간 삶의 눈물나는 분투라면, 우리는 예술로부터 너무 멀리 온 것이 아닐까. 그리고 예술을 향유할 수 없는 삶은, 그건 이미 삶이 아닌 것 아닐까.


돌아갈 길은 있을까?


대븐포트의 대답: "예술은 주기적으로 그 상징적 의미가 고갈되며 가치 절하의 시기를 겪는다. 그런 시기가 오면 예술은 스스로 재생이 필요하다는 선언을 하게 된다."(71p)


『스틸라이프』는 부서진 파편들 사이를 차분히 헤집고 되짚어 가며, 지금까지의 예술이 어떻게 가능했는지 돌아보는 책이다. “부서진 파편은 바로 과거라는 조건 자체다.”(67p) (그리고 과거를 돌아본다는 건 미래를 전망하는 일이기도 하다.)




지구는 둥글어서, 길을 충분히 오래 걷고 나면 처음 출발한 지점으로 다시 돌아오고 만다. 지구는 둥그니까. 그걸 도착이라고 할 수 있을까? 어쩌면.


어째서? 매번의 여정이 모두 같지는 않고, 반복에서 차이를 발견하는 게 인간의 역사이니까. 『피네간의 경야』에서 조이스는 “같은 것이 새롭게 반복된다”고 썼다.


가이 대븐포트의 『스틸라이프』는 정물화의 역사, 라기보단 차라리 인류의 역사에서 정물이 의미하는 바를 멀고도 크게 에둘러 오는, 그리하여 처음의 지점—그러나 처음과 같지는 않은—으로 우리를 되돌려놓는, 짧지만 짧지 않은, 시간을 품은 책이다.


카라바조, 〈과일 바구니〉(1596)


풍요로운 여름 과일 광주리는 “하나님의 자애로움과 자연의 풍요로움을 나타내는 동시에 우리 삶에서 사라지는 것들을 상징하게 되었다."(32p)고 대븐포트는 아모스서를 빌려 말한다. 그는 풍성한 바구니에서 빈 바구니를 보고, 빈 바구니에서 가득 찬 풍요로움을 읽어낸다. 이 모든 모티프는 “음식의 그림이 어떤 자양분이 될 수 있다는 완전히 원시적이고 태곳적인 생각”(30p)에서 비롯하는데, 독자는 책을 덮을 즈음이 되어서야 이 말이 시사하는 바를 좀더 분명히 깨닫게 된다. “역사를 통해 살펴보면, 우리는 정물화에서 어디서 물질이 끝나고 정신이 시작되는지에 관한, 그리고 그들의 상호 의존성의 본질에 대한 지속적인 명상을 발견한다.”(199p)


한마디로 정물—불어로 죽은 자연nature morte이라고 읽는—은 죽어 있는 게 아니라고, 대븐포트는 역설한다. 물질은, 설령 그게 멎어 있는 것처럼 보이는 것일지라도, 격렬하게 살아 있다. “예술은 인공적이고, 무기적이고, 돌로 만들어지고, 물감으로 그려지고, 종이 위에 잉크 또는 흑연의 흔적으로, 표백한 나무 펄프에 젖은 탄소를 찍는 타자기의 금속 키로 만들어지지만 이 모든 과정 속에서 의미는 살아 있는 것이다.”(198p)

말하자면 예술은, 멈춰 있는 시간에 서사를 되돌려주는 것. 또는 박제되어 버린 좌표에 움직임을 돌려주는 것 아닐까.


그러니까, 삶을 삶답게 하는 거라고.




구조를 상정하지 않고 쓰인 듯한, (도무지 맥을 잡을 수 없는 목차에서부터 알 수 있듯이) 전모를 처음부터 드러내지 않는 이 ‘에니그마’(수수께끼)적인 에세이는, 슈펭글러의 순환적 시간으로 이제까지의 서구문명사를 읽어낸다. 정물은 이 여정에서 읽기의 도구를 담당한다.(“정물화는 (…) 문명과 공생하는 예술이다.”(37p)) 


(마치 피카소의 그림을 닮은 것 같은) 그의 콜라주적 글쓰기는 구조가 없는 것이 아니라 배치 그 자체가 구조를 생성하는 글쓰기라고 볼 수 있다. 대븐포트는 미리 정해진 틀에 맞춰 정돈된 앎을 제공하지 않고, 시시각각으로 떠오르는 복수의 정물들 가운데서, 또는 가장자리에서, 독자들이 구조를 발견하기를 바란다. 말하자면 행성의 공전과 같은 글쓰기라고 할 수 있을까? 빠르지 않게 느린 걸음으로 자전하는,


우리의 공전은 아주 오래 걸릴 것이다.


그가 인용하는 목록은 너무 방대하고, 때때로 지엽적이거나 우리의 여정을 너무 멀리 돌아가는 것처럼 느끼게 만들어서, 독자는 당황하고 길을 헤맬 수도 있지만, 그는 기어코 우리를 같지만 다른 곳으로 되돌려놓는다. 우리가 길을 돌아갈 수밖에 없는 것은, 곰브리치가 『예술과 환영』에서 오노레 도미에의 풍자화와 얽힌 일화를 평하듯이, 대븐포트의 이 책이 "닮지 않은 것에서 유사점을 발견하는 과정을 보여 주는"(141p) 지난한 과정이기 때문이다.


그건 슈티뭉stimmung, 즉 ‘갑자기 주변의 사물들에 부여되었던 기존의 의미가 사라지고 낯설어 보이는 듯한 어떤 무드나 분위기’를 수반하는데, 정물은 낯익으면서도 낯선 것으로 나타나고, 우리는 거기서 아폴리네르가 보고 <초현실주의>라는 말로 일컬었던 새로운 예술, “존재에 대한 형이상학적 자각이 너무나 강렬해서 마치 계시처럼 느껴지는 종류의 리얼리즘”(168p)의 가능성을, 그러나 이미 지나가 버린 미래를 본다.




현대의 예술은 비교적 느린 속도로 서서히 영락했던 선배들과 달리, 전례 없는 속도로 시들어 가고 있다. 이것은 <서구의 몰락>인가? 책의 막바지에 짤막하게 언급된 저자의 우려는, 우리가 지금 도정의 어느 즈음에 와 있는지를 가늠하게 한다. 다소간의 우울하고 염려스러운 색채를 띠고.


“시대를 거듭하며 정물화의 운명은 혁신에서 진부함으로 흘러가고 있으며, 낯익음 속으로 사라지고 있다. 필연적으로 정물화는 예술의 새로운 방향을 제시하는 스타일의 선구자로 또는 스타일의 전형으로 스스로를 재생해 왔는데 말이다.”(208p)


결국 대븐포트가 우리에게 제공하는 통찰은 우리가 어떻게 하여 지금에 이르렀는지 하는 것이다. 그건 또한 “시대에 따라 자연이라는 기반에 대한 우리의 이해가 변한다는 사실에 관한 것”(211p)이기도 하다.


미래는 우리 손에 놓여 있다.

어쩌면 과거에?


대븐포트의 이러한 결론을 사이먼 레이놀즈가 지시한 대로 레트로마니아적인 퇴행이라고 봐야 할까? 그렇진 않다. 우리는 과거를 다르게 볼 것이다. 과거는 다른 미래가 될 수 있다.


정말로?






트레드밀의 가장자리에 발을 올리고 잠깐 쉬어 가는 텀이 너무 길어질 때면 이러다 영영 뒤쳐지는 게 아닌가 가끔 겁을 내게 된다. 그럴 때면 어쩔 수 없이 레일 위에 다시 올라타려고, 어쩌다 떨어진 나의 세기가 멱살을 세게 움켜쥐었다 아무렇게나 놓쳐버릴 때의 감각을 생생하게 느끼면서, 발을 굴려야 한다.


미래는 움직임 속에 있다. 과거는 정지 속에 있다. 현재는 정중동. 조용한 가운데 격렬한. 새로운 예술, 새로운 삶의 양식은 그렇게 올 것이다. Still-Life. 그 정적 속에서 영원히 움직이듯.”(T. S. 엘리엇. 이 책의 마지막 구절.)


가이 대븐포트, 『스틸라이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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