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섬에 내가 있었네 (양장) - 故 김영갑 선생 2주기 추모 특별 애장판
김영갑 지음 / 휴먼앤북스(Human&Books) / 2007년 5월
평점 :
절판


   
 

중산간 광활한 초원에는 눈을 흐리게 하는 색깔이 없다. 귀를 멀게 하는 난잡한 소리도 없다. 코를 막히게 하는 역겨운 냄새도 없다. 입맛을 상하게 하는 잡다한 맛도 없다. 마음을 어지럽게 하는 그 어떤 것도 없다. 나는 그런 중산간 초원과 오름을 사랑한다.

눈으로 보아도 보이지 않고, 귀로 들어도 들리지 않고, 잡으려 해도 잡을 수 없는 것. 형상도 없는데 사람을 황홀하게 하는 그 무엇이 중산간 광활한 초원에 존재한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최고의 것은, 사람을 황홀하게 하는 그 무엇이다. 그것을 깨닫기 위해 나는 중산간을 떠나지 못한다.

눈에 보이지 않으나 분명히 존재하는 영원한 것을 이곳에서 깨달으려한다. 말할 수 없으나 느낄 수 있고, 보이지 않으나 느낄 수 있는, 사람을 황홀하게 하는 신비로움을 찾으려 한다. 자연 속에 묻혀 지내며 마음을 씻고 닦아 모두를 사랑하려 한다. 눈에 보이는 것은 영원할 수 없다. 보이지 않는 그 무엇을 느끼고 확인하고 싶다.

안개가 일순간에 섬을 뒤 덮는다. 하늘도, 바다도, 오름도, 초원도 없어진다. 대지의 호흡을 느낀다. 풀꽃 향기에 가슴이 뛴다. 안개의 촉감을 느끼다 보면 숨이 가빠온다. 살아 있다는 기쁨에 감사한다.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걱정도, 끼니 걱정도 사라진다. 곰팡이 피어가는 필름 생각도, 홀로 지내는 외로움도 잊는다. 촉촉이 내 몸 속으로 안개가 녹아내린다. 숨이 꽉꽉 막히는 흥분에 가쁜 숨을 몰아쉰다. 자연에 묻혀 지내는 사람만이 느낄 수 있는 이 기쁨, 그래서 나는 자연을 떠나지 못한다.

-김영갑, <그 섬에 내가 있었네> 중에서

 
   



 

▲잔뜩 흐린 바다 위로 내려오는 저 한줄기 햇살은 내 물음에 대한 당신의 대답이었을까.


해안도로는 햇빛이 쨍한데 산간도로를 타고 이곳으로 들어오니 참 이상하네요. 사방은 온통 한치 앞도 보이지 않는 안개로 가득합니다. 비도 조금씩 내리는 것 같네요. 당신이 책에서 말했던 중산간의 여우비라는 게 바로 이거였군요. 자욱한 안개 때문에 동서남북이 어딘지 방향감각도 없는 이곳, 파란 하늘이 드러나다가도 금세 안개가 몰려오는 곳, 그래서 토박이들도 사람 살 곳이 못 된다고들 하는 곳, 그래도 당신은 필름이 곰팡이 밥이 되어도 '내 영혼의 고향'이라고 하던 이곳, 여기는 바로 한라산 아래 해발 500미터 정도 되는 지역을 일컫는 제주 중산간 지대입니다.

당신이 좋아했던 바람과 초원과 오름이 있는 이곳. 저는 당신이 훔쳐보았다던 중산간의 황홀경을 보기위해 여기에 섰습니다. 오늘은 비가 온다는 예보가 있어 성산에서 민박을 했던 주인집 아주머니가 위험하니 올라가지 말라고 했지만, 기어코 올라와 당신 사진에 담겨있던 용눈이오름, 다랑쉬오름, 영화 <이재수의 난>의 촬영지이기도 했던 아부오름, 그리고 당신이 살았던 구좌읍 대천동 중산간 마을까지 둘러보았습니다. 도로를 타고가다 마치 꿈처럼 나타나는 산속 작은 마을에서 발견한 '대천동'이라는 이정표에서 드디어 당신의 영혼에 제가 가까이 왔다고 느꼈다면 너무 과장일까요.


▲중산간 지대는 안개로 자욱했다.
분명 이 앞에 오름이 보여야 할 텐데 보이지 않으니 참 답답했다.
  

대천동 마을 주변에서는 사시사철 억새를 볼 수 있다고 책에 썼었지요? 8월이면 키가 2미터 가까이 자란다고 했었던 것 같은데, 그것들을 볼 수가 없네요. 역시 안개 때문이죠. 사실 아까 이곳을 둘러보았다고 했는데, 사실은 보지 못했어요. 저 같은 이방인에게 중산간의 초원과 오름들은 쉽게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습니다. 당신이 20년간을 머물며 겨우 훔쳐본 이곳의 황홀경, 제주사람이 되기 위해 처음 5년간 하늘길이 아닌 바닷길로 육지를 오간 그 길을 시속 800km로 하늘을 가르는 비행기를 타고, 시속 60km로 내달리는 스쿠터를 타고 편히 달려온 제가 그 황홀경을 한 번에 보려 했다면 너무 과한 욕심이었겠지요.

올라서면 광활한 중산간의 동부 오름들과 멀리 성산일출봉까지 한눈에 들어온다 하여 '오름의 제왕'이라 불린다는 다랑쉬오름에 올랐습니다. 비자림에 들렀다가 주변에 있다는 이야기만 듣고 한참동안 헤매다가 챙겨왔던 정밀지도를 보고 겨우 찾아낸 다랑쉬오름은 안개 때문에 위치를 찾아내고도 이게 오름인지 알 수 없을 정도였습니다. 길을 따라 오르면서 점점 높아지는 오름의 등을 느낄 수 있을 뿐이었지요. 오름도 작지만 화산이기 때문에 중간에 분화구가 있을 텐데, 정상에 올랐어도 전혀 아래가 보이지 않았습니다. 계속 걸으면 원점으로 다시 돌아오기 때문에 내가 지금 오름 정상에 올라 분화구 주위를 한 바퀴 돌았구나, 하고 느낄 수 있을 뿐이었죠. 당신도 이렇게 안개로 가득한 분화구 주위를 한 바퀴씩 돌곤 했었나요?

 

▲다랑쉬오름 오르는 길. 오름은 쉽게 자신의 등을 보여주지 않았다.
 

▲다랑쉬오름 정상. 올라도 보이는 것은 안개뿐이다.



▲다랑쉬오름 정상에 핀 야생화.

민박집에서 잠들기 전에 조금씩 다시 읽곤 했던 당신의 책을 김포로 돌아가는 비행기에서 다시 펼쳐봅니다. 그 안에는 내가 그 땅에 서고도 보지 못했던 제주의 아름다움, 당신이 훔쳐본 그 원초의 신비함이 담겨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지나가다 슬쩍 보는 여행자의 시선이 아닌, 무수히 많은 시간을 기다리면서 치열하게 그 속으로 들어가고자 노력했던 한 가난한 사진쟁이의 시선으로 본 세계였습니다. 당신이 어렵게 찾은 그 세계를 나는 너무도 쉽게 보려 했습니다. 병든 당신이 그 영원의 세계로 돌아가기 몇 해 전에 세운 성산읍 삼달리에 있는 두모악 갤러리에서 당신의 사진들을 보며 당신에게 물었습니다. 밥 굶어가며 산 필름으로, 형제자매와도 단절하고, 철저하게 혼자서 자신을 고독으로 몰아넣으며, 수도승처럼 그것도 20년간 안개 자욱한 중산간에서 당신이 찾아 헤맨 것은 무엇입니까. 그걸 찾았나요? 제주도는 당신에게 무엇이었나요?

 

▲성산읍 삼달리에 있는 김영갑 갤러리. 그가 죽기 몇 해 전에 손수 세운 전시장이다.
이곳은 원래 삼달초등학교로 폐교되면서 주변 사람들의 도움을 받아 갤러리로 꾸며졌다.

 

▲갤러리 내에 있는 김영갑의 자화상.
바로 저 뒤의 오름이 부드러운 곡선을 자랑하는 용눈이오름이다.



▲갤러리 내부. 여기에는 제주의 바람과 오름 중산간 초원이 펼쳐져 있다. 

 

   
 

당신이 쓴 책 <그 섬에 내가 있었네>를 옆구리에 끼고 훌쩍 여행길에 올랐습니다. 당신의 사진 속에 담긴 제주 중산간 지대의 황홀경을 보기 위해서요. 방금 당신이 살았던 구좌읍 대천동 중산간 마을과 또, 당신의 사진 속에 담긴 용눈이오름, 다랑쉬오름, 아부오름을 둘러보고 오는 길입니다. 그런데 안개 때문에 제대로 봤다고는 못하겠네요. 하지만, 사방의 그 안개 속에서 내가 '여기' 있다는 사실 하나만은 알 수 있었습니다. 당신도 그렇게 '여기' 있었겠지요? 이 섬에 당신이 있었고, 지금 그 섬에 내가 있습니다. -2009년 8월 7일 두모악에서.

 
   

 ▲두모악 갤러리 방명록에 남겨놓은 남긴 글. 그냥 떠나오기가 아쉬워 몇 자 적어 놓았다

 



▲두모악 갤러리에서 받은 김영갑이 찍은 사진이 들어간 엽서.
겨울 오름 위로 한줄기 햇살이 내려오고 있다. 

 

갤러리에서 표를 끊으니까 당신이 찍은 오름 사진이 박힌 그림엽서를 하나 선물로 주었습니다. 엽서 속의 오름은 눈 내린 겨울 오름이었는데, 그 오름 위로 잔뜩 흐린 하늘에서 햇살이 한줄기 내려오고 있었습니다. 두모악을 뒤로하고 표선 해안도로로 내려오면서 잔뜩 흐린 바다로 내려오는 한 줄기 햇살을 보았습니다. 마치 그것은 꼭 내가 두모악에서 당신에게 물었던 물음에 대한 어떤 답을 당신이 주는 것 같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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