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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아라 새들아 - 자기파괴적 녹색성장의 시대를 우려하는 진정한 녹색 신음소리
최성각 지음 / 산책자 / 2009년 6월
평점 :
품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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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은 참으로 이상한 날이었다. 깊은 밤, 마당에서 난데없이 새소리가 들렸다. 아기 울음소리 같기도 했다. ‘갸르릉, 갸르릉’ 하는 가느다란 소리였는데 너무나 애절하고, 안타깝고, 앙증맞고, 자지러질 것만 같은 소리였다.
손전등을 들고 마당에 나가 나는 소리가 나는 곳에 귀를 모았다. 나는 처음에 깊은 밤, 아주 작은 새 한 마리가 다쳐서 내는 신음소리인 줄 알았다.
손전등 불빛으로 소리의 진원지를 찾았더니, 그것은 다친 새도 아니었고, 도마뱀도 아니었고, 다람쥐는 더구나 아니었다. 그 소리는 두꺼비가 내는 소리였다.
얼마나 어이가 없던지, 온몸에서 힘이 쭉 빠지는 것 같았다.
불빛을 받고 놀란 수컷 두꺼비는 좀 겸연쩍고 당황스럽다는 자세로 뻘쭘하게 앉아 있는데, 그놈 아래 깔린 암컷은 사지를 길게 뻗고 아예 죽은 듯이 누워 있었다.
이놈들도 사랑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최성각,《날아라 새들아》 <봄이 오니 마당의 짐승들도 바빠지네>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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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에서 적당히 폼도 좀 잡으면서 강의도 하고, 수업시간에 학생들과 시시껄렁한 농담 따먹기도 하며, 동네 문화센터에서 시 창작 강의니, 소설 창작 강의 같은 것을 하면서 시간을 보낼 수도 있었을 텐데, 이 사람 참 미련하다. 아니 이 사람들 참 미련하다. 환경 운동한다고 시골에 풀꽃평화연구소인가 뭔가 차려놓고 앞마당에 거위를 키운다는 최성각 같은 사람 말이다. 이런 사람 또 있다. 강화도 동막리로 들어가 뱃사람들과 어울려 사는 시인 함민복이나, 지리산 자락에 터를 잡고 사는 이원규 시인 같은. 도시와는 다르게 밤이면 불빛 하나 없이 암흑이 되는 촌구석에서 그들은 지금 과연 무얼 하고 있을까. 그들 역시 위에서 인용한 글처럼 지금 밖에서 나는 이상한 소리의 근원을 찾다가 바닥에 털썩, 하고 주저앉는 그런 이상한 밤을 보내고 있진 않을까.

▲왼쪽부터 최성각, 함민복, 이원규. 이들은 소설이나 시를 쓰는 등단한 '문인'이지만, 문창과에서 적당히 학생들을 가르치면서 겸임교수니, 전임강사니 하는 명함을 갖고 살 수 있었을 텐데도 각자 꿈을 품고 촌구석으로 들어가 자신들이 꿈꾸는 세상을 위해 치열하게 살고 있다. 이들이 꿈꾸는 세상 역시 새들이 하늘을 날고 냇물이 물길을 따라 달리는 그런 소박한 세상일 것이다.
최성각이 쓴 《약사여래는 오지 않는다》라는 소설을 기억한다. 학창시절에 읽었던 소설인데, 동네 뒷산 약수터에 자물쇠를 채워놓고 물을 독점하는 사람들과 깨끗한 물을 찾아 헤매는 현대인들의 초상을 냉소적으로 비꼰 소설이다. 문학평론가 이남호는 이 소설을 환경소설로 분류했다. 우리 문학사에서 보기 드문 환경문제를 다룬 점에서 크게 주목한 모양이다. 이전에도 김원일의 《도요새에 관한 명상》이나 한정희의 《불타는 폐선》같은 환경소설이 있었지만, 최성각은 소설에서 그치지 않고 그 판을 박차고나와 진짜 환경운동가가 된 특이한 경우다. 대부분 '나 환경소설 씁네' 하면서 폼 잡고 '문인'으로 잘 살아갈 수도 있었을 텐데도 말이다.
최성각은 작가로서 절박하다고 여기고 쓰는 모든 글을 '문학'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어깨에 힘 잔뜩 들어간 '문인'이라 불리길 좋아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소설, 희곡, 시 이외의 글쓰기는 대개 하찮게 여긴다. 가령 에세이 같은 장르는 '잡글'이라 평하며 문학으로 치지도 않는다. 최성각은 소설을 그만두고 환경 판에 나와 현실적인 환경 문제와 일상의 소소한 이야기들을 에세이로 풀었는데, 문학기자 그 누구도 그의 첫 산문집 《달려라 냇물아》(녹색평론사)를 서평에 올려주지 않았다. 아직도 우리 문학판을 지배하는 것은 소설, 시 따위의 근엄한 문학 장르다. 최성각은 주변 문인들이 '소설이 안 되니까 환경운동하며 에세이를 쓰는 거 아니냐' 하며 비아냥거리는 것도 봤다고 한다. 그러나 최성각은 한국 소설은 김영현에서 이미 끝났다고 선언하며, 심하게 말해 지금 문인들은 근대 산업사회의 나팔수로 전락했다고까지 말한다. 또한, 장르에서 벗어나 논픽션 장르의 새로운 장을 연 레이첼 카슨이나 자연주의의 대부 헨리 데이빗 소로우, 《수탈된 대지》로 유명한 에두아르도 갈레아노, 스스로 잡문가라고 부르는 데 주저하지 않은 루쉰, 멕시코 사파티스타의 부사령관 마르코스, 혁명가 체게바라, 우리나라의 권정생 선생 같은 분들이 위대한 작가라고 말한다.

▲유럽과 미국에 의해 수탈되어 온 라틴아메리카의 500년사를 기록한 《수탈된 대지》의 작가 에두아르도 갈레아노가 그 이전에 썼던 3부작 서사시《불의 기억》은 '따님'이라는 한 가난한 일인 출판사에 의해 출간 되었다. "나는 역사가가 아니지만, '작가'로써 빼앗긴 라틴아메리카의 기억과 그 땅과 이야기를 나누고 비밀을 공유하고 싶었다"라고 말하는 갈레아노는 스페인어나 영어권에서 이미 위대한 지성으로 평가받고 있지만, 유독 우리나라에서는 등단한 작가가 아니고 더군다나 소설을 쓰지 않았다는 이유로 외면받은 진짜 '작가'중 한 사람이다.
자신이 키우던 거위들과 앞마당에서 장난을 치던 도중에 돌연 수컷이 암컷 거위에게 달려들어 교접을 시도하다 실패하는 장면을 멍하니 주저앉아 지켜보던 최성각은 이상한 기분에 휩싸인다. 때는 봄이 막 몰려오는 시절. 그날 밤, 밖에서 들리는 이상한 소리에 나가 보니 두꺼비 암놈과 수놈이 교접하고 있다. 아직 봄이 채 오지 않은 서늘한 봄밤, 봄이 오는 길목에서 짐승들의 교접을 지켜보며 춘정(春情)에 젖는 이 사람, 참 매력 있다. 어떤 위대한 소설이나 시들에서 느끼지 못했던 전율이 이 장면에서 나에게 왔다. 환경운동을 하지만 차를 환장하게 좋아해 지프차를 몰고 다니고, 자판기 커피에 있는 대장균보다 위 속에 있는 위산을 더 신뢰할 정도로 '다방커피'를 좋아한다는 이 사람, 아파트 주차장에서 경비원이 비싼 외제차는 놔두고 좀 안 좋아 뵈는 차주에게 연락해서 차를 빼달라고 하자, 보통사람이 왜 보통사람을 차별하느냐며 아침부터 '지랄'을 해대는 이 사람이야말로 어깨에 잔뜩 힘주고 다니며 문학이 어떻고, 예술이 어떻고 떠드는 사람들보다 더 진실에 가깝게 있는 것 같다.
환경쟁이 최성각이 바라는 세상은 뭐 그리 거창한 세상이 아니다. 새들이 하늘을 날고 마음 놓고 냇물이 내달릴 수 있는 그런 세상, 이 책에는 최성각의 그런 소박한 희망이 오롯이 담겨있다. 퇴근길 버스에서 이 책을 읽었다. 100km로 질주하는 버스, 그것도 만원버스에서 서서가며 바라본 창밖 한강하구의 물은 자유로에서 달리는 버스와는 다르게 시원스레 달리지를 못했다. 버스는 일산대교를 지났고, 새로 건설된 일산대교로 서식지를 잃어버린 새들은 그림자도 찾아볼 수 없었다. '날아라 새들아!' 어린이 날 노래에 나오는 이 순진한 말이 가슴깊이 와 닿는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