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 사적인, 긴 만남 - 시인 마종기, 가수 루시드폴이 2년간 주고받은 교감의 기록
마종기.루시드폴 지음 / 웅진지식하우스 / 2009년 5월
평점 :
절판


나는 미국에서 의사로 40년을 살았습니다. 의사 중에서도 제법 돈을 많이 버는 쪽의 전공이지요. 하지만 나는 매해 연봉의 50퍼센트 이상을 연방 세금, 주 세금, 시 세금과 사회보장 세금 등 여러 가지 세금으로 냈습니다. 그리고 연봉의 반도 안 되는 실제 수령액 중 20퍼센트 정도를 각종 단체에 기부했습니다. 물론 미국에서 산 처음 10년 정도까지는 잘 몰랐지요. 그러나 커다란 의사 그룹의 회장이 되고, 동료 미국인 의사들이 나보다 두드러지게 많은 액수를 기부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실은 창피해서, 체면을 지키려고 시작했고 나중에는 그것이 옳은 일이란 것을 알았기 때문에 그랬습니다. 졸갱이 같은 의사 나부랭이들의 이런 행위는 이 동네에서 사는 의사뿐 아니라 전국의 의사들도 거의 다 할 것입니다. 그래서 부시 같은 바보가 이 나라를 8년 간이나 구덩이 속에 집어놓고 고생을 시켰지만, 이런 점 때문에 나는 미국에 아직 희망이 있다고 믿습니다. - <아주 사적인 긴 만남> 중 Letter 28 (마종기가 조윤석에게)에서.


가지고 있는 것들을 나누려 하지 않는 자들은 정치든 경제든 교육이든 그 자리에 앉아 있는 것만으로도 역사의 죄악입니다. 세대가 지나 아이들이 죗값을 치를 것이고 우리나라에는 허약하고 온통 '경쟁'의 망령과 '힘'만을 쫓아가는, 문화는 실종된 나라가 되어갈지도 모릅니다. 그렇다면 그때 음악은, 시는, 과학은 무슨 소용이 있을까요. 제가 당장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모자란 재주로 이런 사회에서 지친 사람들을 위로하는 것밖에 없지요. 12년간 공학자로 살아왔지만, 공학이니 과학이니 하는 것들은 사람들을 감동시키지도, 위로하지도 못한다는 것을 깨달았고 그래서 남은 하나, 음악으로 돌아왔습니다. 유럽의 생활에서 비판적으로 그러나 깊게 깨달은 것은 '지금'의 중요성입니다. 왜, 영어로도 현재를 'present'라고 하지 않습니까. 지금 주어진 선물. 이 순간순간의 기쁨, 행복, 즐거움을 왜 우리나라 사람들은 놓치며 살아갈 수밖에 없는가. 앞만 보고 인내하고 달려가라는 프로그래밍만 되어 있지, 왜 지금은 불행하다고 느끼는 것일까. - <아주 사적인 긴 만남> 중 Letter 48 (조윤석이 마종기에게)에서.

대중음악 웹진'가슴'을 운영하는 박준흠이 1999년에 낸 책 <이 땅에서 음악을 한다는 것은>(교보문고)는 우리나라의 대중음악사를 아티스트 중심으로 정리한 책인데, 박준흠은 자신이 선곡한 인디밴드의 노래를 담은 CD까지 부록으로 달았다. 그 CD에 그룹 '미선이'의 <치질>이라는 노래가 실려 있었다. 내가 그 노래를 듣고 깜짝 놀란 것은 모던한 사운드도 그랬지만, 언론에 대한 혐오를 '치질'이라는 소재로 은유적으로 노래한 이 젊은 친구의 기발한 착상 때문이었다. 한 남자가 회장실에 들어가 일을 보고, 휴지가 없어 안절부절하다가 결국 가지고 들어갔던 신문지를 쓰고 말았는데 그 뒤로 그만 치질에 걸렸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 남자는 외친다, "휴지보다 못한 너희들 종이 사진 않겠어! 아무리 급해도 쓰지 않겠어!"라고. 그 신문지는 당연히 조중동 중 하나였겠지. 이렇게 대담한 유머로 보수언론을 향해 일격을 날린 이 젊은 친구가 '루시드 폴'로 이름을 바꾸고 계속 노래를 하고 있는 조윤석이다. 

매일 아침처럼 문 밖에 놓인 신문을 들고
무슨일이 있었나 살펴보려 변기에 앉았네
볼일이 끝날 무렵다 떨어진 휴지걸이 위로
황당하게 비친 내 모습 불쌍하게 웃네

한장 찢어진 곱게 구겨 부드럽게 만들고
찝찝하긴 하지만 그런대로 대충 처리를 했네
며칠이 지나고 조금 아프긴 했지만 설마라도
낸가 이렇게 될 줄은 몰랐어
  
휴지보다 못한 너희들 종이 사지 않겠어
아무리 급해도 닦지 않겠어 쓰지 않겠어

너희들의 거짓말 듣지 않겠어 믿지 않겠어
단돈 300원도 주지 않겠어 보지 않겠어


미선이 - <치질>

대학시절, 자주 다른 학과 수업에 기웃거렸는데 아마 국문과 수업을 가장 많이 들었을 것이다. 특히 詩 관련 수업은 거의 다 들었는데, 언젠가 국문과 시 수업 중 교수가 나누어 준 한국 현대시 자료집에서 슬픈 어조로 동생의 죽음을 노래하는 한 시인의 나직한 목소리를 들었다. 그 시는 죽음을 말한 그 어떤 시에서도 듣지 못한 소리가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바람 소리였다. 물론 다른 시에서도 바람 소리는 있었다. 고은의 <문의 마을에 가서>에서 불었던 바람이 망자가 이승을 떠나지 못한 채 붙들고 있는 미련의 바람이라면, 기형도의 <나리 나리 개나리>에서 누이를 떠나 보내는 바람은 유령 같은 바람이었다. 하지만, 이 시에서 동생을 떠나 보내는 바람은 이렇게 설명할 수 있는 바람이 아니었다. 황동규의 시집 <미시령 큰 바람>처럼 아주 거대한 그리움의 바람이지만, 옷자락에 아주 작게 묻혀올 수밖에 없는 그런 바람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머나먼 이국에서 변을 당한 동생에게 바친 <동생을 위한 조시>에서 우리를 눈물 섞인 미시령 큰 바람으로 이끈 시인, 이렇게 우리를 슬픔의 심연으로 끌고 간 시인이 바로 마종기다. 

8. 혹시 미시령에

동규형 시집 미시령인가 하는 것 좀 빌려줘,
너랑 마지막 나눈 말이 이 전화였구나.
나도 모르는 곳, 너와 내 말이 끝난 곳, 
강원도 어디 바람 많은 곳인 모양이던데.

요즈음 네 무덤가에서 슴슴한 바람을 만나면
내가 몇 번을 잊어버리고 빌려주지 못한 미시령,
혹시 그곳에 네가 혼자 찾아간 것은 아닐까.
내년쯤 일시 귀국을 하면 꼭 찾아가봐야지,
네가 혹시 그 바람 속에 섞여살고 있을는지,

너를 알아보지 못하고 바람만 만나게 되면
흔들리는 그거라도 옷자락에 묻혀와야지,
그 바람 털어낼 때마다 네 말이 들리겠지,
내 시를 그렇게 좋아해준, 너는 그러겠지,
형, 나도 잘 알아듣게, 쉽고 좋은 시 많이 써,
이제 너는 죽고 나는 네 죽음을 시쓰고 있구나.
세상 사는 일이 도무지 어처구니없구나.
시를 쓴다는 일이 이렇게도 하염없구나.

9. 조화

아직 비석도 세우지 못한 네 무덤
꽂아놓은 조화는 아름답구나.
큰비 온 다음날도, 불볕의 며칠도
조화는 쓰러지지 않고 웃고 있구나.
무심한 모습이 죽지 않아서 좋구나.
향기를 남기지 않아서 좋구나.
 
나는 이제 살아 있는 꽃을 보면
가슴 아파진다.
며칠이면 시들어 떨어질 꽃의 눈매
그 눈매 깨끗하고 싱싱할수록
가슴 아파진다.
살아 있는 모든 것이 아프다.


-마종기, <동생을 위한 조시> 중에서

이 둘이 만났다. <아주 사적인 긴 만남>(2009, 웅진지식하우스)은 이 둘이 대서양을 건너 주고받은 편지의 기록이다. 미국에서 40년을 산 의사이자 시인, 스위스 로잔의 공학자이자 가수인 이 둘의 기록에는 예술가로서의 음악, 예술, 문학, 여행이라는 공통의 담화가 주를 이루지만, 외국에서 떠도는 디아스포라로서 타자의 시선으로 한국 사회를 비판하기도 한다. 서울과 미국의 오하이오, 스위스 로잔을 넘나드는 이들의 만남은 그런 의미에서 '안'과 '밖'의 만남이자, 동 시대를 살아가는 '나'와 '타자'의 만남이기도 하다. 우리는 이 책을, 아니 이 만남을 '올해의 책' 목록에 넣어 둘 준비를 해야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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