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멋진 하루
다이라 아즈코 지음, 권남희 옮김 / 문학동네 / 2004년 9월
평점 :
절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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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 마신 물 중에서 가장 맛있었던 물이 뭔지 아니?"
"지금 살고 있는 숲의 물?"
루이는 맞혔을 거라 생각했지만 무로타는 고개를 저었다.
"학교 수돗물. 여름에 체육시간이나 클럽 활동 끝나고 수도꼭지에 입을 대고 마시던 물.
"아, 정말."
땀으로 젖은 운동모자를 벗어던지고 좔좔 흐르는 물 밑에 얼굴을 옆으로 비틀어넣을 때 감은 눈 위로 쏟아지던 하얀 빛. 차례를 기다리지 못하고 온몸으로 밀고 들어오는 친구의 몸에서 피어오르던 운동장의 흙냄새. 그런 것들이 한꺼번에 떠올라 루이는 소리내어 웃었다. 무로타도 웃었지만 이내 목소리를 낮추었다.
"그렇게 물이 맛있다고 느낄 일은 이제 없을 거야. 후지산 복류수니 빙하의 빙하수니, 효능을 써놓은 설명서를 읽고 맛있다고 느끼는 건 머리가 그렇게 생각하기 때문이지, 몸이 느끼는 반응은 아냐. 학교 수돗물은 녹이나 석회 맛이 났었잖아. 그래도 맛있었어."
-다이라 아스코 《멋진 하루》 중 <맛있는 물이 숨겨진 곳>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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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에게나 살아오면서 가장 평온했던 한 순간이 있었을 것이다. 세상의 시름으로부터 벗어나 혼자 훌쩍 떠난 여행에서 만난 풍경이라든지, 남자친구의 무릎을 베고 잠깐 들었던 호숫가 벤치에서의 달콤한 낮잠이라든가, 산사에서 만난 저녁의 고즈넉한 풍경 소리를 듣는 순간 같은 거 말이다. 하다못해 기억이 날진 모르겠지만, 엄마 뱃속에서 보낸 열 달이 가장 평온했던 시절이라고 떼를 써 볼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나에게 그런 순간은 남자라면 누구나 별로 안 좋은 기억을 가지고 있을 만한 군대에서 있었다. 다시 가라고 하면 절대 안 갈 거고, 누군가에게 이유도 없이 얻어터지고 일반적인 상식으로 전혀 설명되지 않는 군대라는 조직이 없어졌으면 좋겠다고도 생각하지만, 나는 내가 군 생활을 했던 영천의 따듯한 햇살만큼은 잊을 수 없다. 경북 영천은 대한민국에서 여름에 기온이 가장 높이 올라가 곳이기도 하고, 햇살이 너무 좋아 이곳에서 나는 사과는 명물이다. 가을에 나는 영천 포도 또한 그렇고.
탄약고에서 경계 근무를 서는 가을날이면 어김없이 향긋한 포도향이 담을 타고 잘익은 추억처럼 넘어왔다. 나는 그 포도 내음을 좋아했다. 일요일 오후 막사 옥상에서 햇살을 받으며 일광욕을 즐기던 시간은 내 인생에서 다시 돌아가고 싶은 유일한 순간이다.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인 분지라 유난히 겨울에는 바람이 많이 불었는데, 우리는 그 바람을 '영천 똥바람'이라고 불렀다. 내무반 창문 너머로는 멀리 보현산 정상에 있는 천문대가 보였다. 처음에는 거기 서 있는 게 뭔지 잘 몰랐는데, 영천 출신인 고참이 보현산 천문대는 영천의 자랑거리라고 알려 줬다. 겨울 새벽, 불침번을 설 때면 창가에 서서 그 천문대를 바라보곤 했다. 유난히 밝은 밤하늘을 보면, 이상하게도 세상의 모든 별들이 모두 그 천문대로 향해 가는 것 같았다. 제대하면 언젠가 그 별들을 보러 한번 가보고 싶었는데, 아직 못 갔다.
다이라 아스코의 소설집 《멋진 하루》에 실린 단편 <맛있는 물이 숨겨진 곳>에서 읽은 저 문장에서 나는 내 젊은 시절, 영천의 햇살을 떠올렸다. 졸병 시절에는 일요일 오전에 일광 소독을 하러 옥상에 올린 모포며 매트리스며 베개 따위를 지키는 초병(물품이 부족했던 부대 사정으로 다른 내부반의 비품을 훔치는 일은 다반사였다)으로 그 햇살을 받았고, 고참이 되어서는 그 졸병을 옆에 세워 놓고 웃통을 벗어 재끼고 책을 읽거나 기타를 튕기거나 오수를 즐기며 놀았다. 일요일 아침 모두들 교회니, 성당이니, 법당이니 종교 활동을 하러 떠나고 나같이 할 일이 별로 없는 사람들에게 햇살이 내리 쬐는 텅 빈 막사의 옥상은 그야말로 천국이었고 그 순간 나의 神은 햇살이었다.
<맛있는 물이 숨겨진 곳>에서 우연히 만난 루이의 고등학교 시절의 첫사랑 무로타는 뜬금없게도 루이에게 학교에서 마셨던 수돗물을 이야기한다. 분명 녹이나 석회, 소독약이 잔뜩 섞여 맛이 없는 물이였을 텐데도, 무로타에게는 그 물이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물이다. 사람의 기억은 불완전한 것이어서, 상황을 기억하는 순간의 다른 요소들이 그 기억을 지배하기도 한다. 무로타는 그 물을 마시는 순간의 공기, 루이가 기억하는 수도꼭지 아래로 반사되어 빛나는 하얀 빛, 옆에서 물을 같이 마시는 친구의 몸에서 나는 땀 냄새, 그리고 뿌옇게 피어오르는 운동장의 흙먼지를 사랑했을 것이다. 그래서 영천의 포도향, 햇살, 똥바람, 천문대로 쏟아지던 별은 무로타가 마신 물처럼 나에게는 세상에서 가장 맛있게 마신 물과 같은 것들이다. 나는 오늘 문득 그 물이 숨겨진 곳을 더 찾고 싶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