쾌락의 옹호
이왕주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1년 1월
평점 :
품절


   
 

나는 내가 다녀온 많은 공간들을 사진으로 담아내기 못한 것을 후회하지 않는다. 사진은 나의 유혹자가 아니다. 나 자신이 사진으로 이 세상에 오래 남고 싶은 생각이 없고, 내가 스쳤던 공간을 사진으로 붙잡아두고 싶은 욕심도 없다. 나는 사진에 찍히는 대신 내가 몸담았던 그 공간을 내 기억 속에서 더 긴밀하게 느끼고 싶고, 정리하거나 증명할 자료를 챙기는 대신 내가 체험했던 그 시간들을 추억 속에서 더 은밀하게 맛보고 싶다.

내가 여행하는 목적은 생생한 실물들을 나의 살과 뼈로 만나는 것이지 사진으로 찍어서 추억으로 남는 것이 아니다. 물론 내 눈은 온전치 않고 내 기억은 더 불완전하다. 하지만 이것들이 저 현란한 컬러로 찍혀 은박 사진첩에 가지런히 정돈되어 있는 저 사진들보다 훨씬 더 많은 진실들을 지니고 있다는 것만은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 이왕주 산문집 <쾌락의 옹호>, '유혹자' 중에서

 
   


DSLR이 보급되면서 부쩍 카메라를 들고 다니는 사람들이 늘었다. 앙증맞은 표정으로 카메라 앞에 서 하늘을 향해 점프를 하는 순간을 찍거나, 맛있는 음식을 앞에 두고 카메라 플래시를 연신 터트리는 풍경은 쉽게 볼 수 있고, 멋진 풍경을 담아오겠다는 굳은 일념으로 프로급 카메라를 목에 걸고 여기저기 쏘다니는 사람들로 '좀 좋다' 하는 유명 출사지들은 인산인해를 이룬다. 텔레비전 광고 속에서는 유명 가수가 '결정적 순간'을 잡기 위해 며칠 동안 아프리카 정글에서 밤을 새우기도 하고, 인터넷 포털 사이트에서는 사진작가, 연예인, 블로거들 너나 할 것 없이 자신만의 예술을 뽐내려 올려놓은 사진들로 넘쳐난다. 한 영화배우는 해외로 나가 이국의 거리를 돌아다니며 찍은 사진들을 어디어디 '놀이'라 칭하며 책을 내기도 한다. 한 카메라 회사는 카메라 스트랩을 사람의 손목에 마치 수갑처럼 채워 놓은 뒤 "나는 이 카메라에 포로가 되었다"라는 식의 광고카피를 넣었고, 서점에 가면 '사진가의 여행법', '잘 찍은 사진 한 장', '나는 사진이다', '좋은 사진을 만드는 노출' 등 자극적인 제목을 단 책들이 우리를 유혹한다. 가히 사진의 시대, 이미지의 천국이라 할만하다.

일전에 한 친구에게 수원 화성으로 놀러나 가자고 했더니, 카메라가 고장이 나서 수리를 맡겼다며 다음에 가자고 했다. 카메라가 고장 난 것과 우리가 놀러가는 일이 무슨 연관이 있냐고 물었더니, 어디를 갈 때 카메라가 없으면 '그곳'에 가는 일은 무의미하다고 해서 섬뜩함을 느꼈던 적이 있다. 그 친구에게 여행은 세상을 보고 느끼기 위한 것이 아니라, 사진을 찍기 위한 일종의 수단에 불과한 것 같았다. 나도 한때는 사진에 미쳐 여행을 갈 때마다 카메라를 챙겨갔다. 여행과 사진은 정말이지 바늘과 실처럼 찰떡궁합 그 자체다. 그 시절 나에게도 카메라 없는 여행은 정말이지 '무의미'한 일이었다. 멋진 풍경을 보면 '나도 안셀아담스처럼 멋지게 찍을수 있다구!' 하며 한 장소에서 셔터를 백 번쯤 눌렀고, 멀리 걸인이 쪼그려 앉아 구걸하고 있으면 몰래 숨어서 망원렌즈로 그 풍경을 마구 땡겨 찍어댔다. 속으로 '나도 유진 스미스 같은 다큐멘터리 작가 못지않지?'라는 망상에 빠진 채. 라이카 M3를 갖게 되면 브레송과 같은 사진을 찍을 수 있을 것이라 착각 하기도 했고, 저 멀리 동구 유럽으로 누가 날 데리고 가만 준다면 요제프 쿠델카처럼 슬픈 집시들의 표정을 카메라에 담을 수 있다고 여겼다.

그런데 사진을 찍으면 찍을수록 참 공허했다. 좋은 곳, 멋진 곳에 가면 그 풍경 속의 나를 느껴 보려하기는커녕 '저 풍경을 빨리 찍어야 해! 카메라‥‥‥ 카메라 어딨지?" 하며 셔터를 눌러대기에 바빴고, 정작 여행을 다녀 온 후 나에게 남는 것은 컴퓨터 모니터에 갇힌 그 '멋진' 풍경에 관한 단편적인 이미지들뿐이었다. 사진을 올려놓은 인터넷 카페에서 내 사진을 칭찬하는 댓글을 보면서 '나도 이제 예술가라구!' 하는 쾌감을 얻으면 얻게되면 될수록 다음에는 더 '쨍'한 사진을 찍어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커져갔고, 하드디스크에 사진 파일이 늘면 늘수록 그만큼 여행지의 바람, 햇빛, 꽃향기는 나에게서 점점 멀어져 갔다. 더 좋은 카메라를 찾아 남대문 카메라숍을 헤매고, 진심으로 세상을 바라보지 않고 표면적인 기호에 사로잡혀 찍은 사진들이 얼마나 허망한 것인가를 알았을 때, 나는 내 마음 속에 남은 예술을 향한 열정으로 위장된 추악한 욕망의 찌꺼기들을 목도해야만 했다.

이왕주의 신문 칼럼을 모아 놓은 산문집 <쾌락의 옹호>에서 만난 저 문장은 이렇게 사진 강박증에 빠져 있는 우리들에게 음미해 볼만한 작은 울림을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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