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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통신 - 유쾌한 지식여행자가 본 러시아의 겉과 속 ㅣ 지식여행자 13
요네하라 마리 지음, 박연정 옮김 / 마음산책 / 2011년 5월
평점 :
품절
사회주의에서 자본주의라는 변화의 물살을 겪은 러시아.
그리고 그 체제를 움직이던 유명 인사들 혹은 평범한 러시아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은 이야기
여기까지만 아주 흔한 책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저자가 요네하라 마리가 된 순간, 그 책은 읽을법한 가치를 가지게 되었다.
사실 소련 그리고 지금의 러시아만큼 접하기 쉬웠던 나라는 없었다.
오랜 시간 미국과 함께 정치와 역사, 문화, 이념으로 견주던 나라가 아닌가.
심지어 B급 액션 영화에조차 세상의 악으로 등장하고, 보드카, 볼쇼이의 나라.
가도가도 끝이 없는 대륙열차가 달리고, 레닌과 스탈린, 붉은광장, 시베리아의 나라!
하지만 요네하라 마리가 보여준 러시아는 깔깔대며 웃다 풀이 죽어 책을 덮게 된다.
실업자는 없지만 아무도 일하지 않는다. 아무도 일하지 않지만 모두 급료를 받는다. 모두 급료를 받지만 아무것도 살 물건이 없다. 아무것도 살 것이 없지만 어떻게든 먹고산다. 어떻게든 먹고살지만 모두가 불만을 갖는다. 모두가 불만을 갖지만 전원이 '찬성'이라고 투표한다. - 독재자들에게
러시아의 국가 센터, 즉 전국 규모의 노동조합 연합체인 '러시아독립노조'의 조사에 의하면 1997년 말, 노동 인구의 10퍼센트가 완전 실업 상태이며, 22.5퍼센트에 해당하는 1600만 명이 임금을 받지 못한 채, 체불 만성화라는 반실업상태에 몰려 있다. 일하는 사람들, 특히 중장년층은 언제 목이 잘릴지 전전긍긍하는 나날을 보내고 있다. (...) 이런 스트레스를 치유하는 전통적인 수단, 최근에는 더욱 싼 가격으로 손쉽게 손에 넣을 수 있는 수단이 보드카다. 불합리함을 견뎌낼 수 있는 넉살 좋은 품성을 가지지 못한 사람들 중에는 술에 빠져버리는 경우가 많다.
사회주의의 빗장을 풀자마자 최악의 혼란 속에서 부패와 부정으로 물들어 천민자본주의가 잠식해버린 땅. 추운 환경과 호쾌한 성격 덕분에 술을 좋아하는 사람들로만 알았던 러시아의 보드카 사랑에는 그렇게 슬픈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알콜 중독이 늘어만 가는 나라, 그리고 그로 인한 가정 파괴와 이혼이 늘어난 나라. 그 슬픈 통계에 한번 풀이 죽는다.
급작스러운 사회 변화는 항상 혼란이 뒤따른다. 그것이 짧은 시간에 집중적으로 일어난다면, 또 한 나라만이 그 변화를 겪어야 한다면 피해는 더욱 크다. 개항되던 조선이 딱 그 모습이었다. 서양 문물이 쏟아져들어오면서 얼마나 많은 폐해들이 따랐던가. 그걸 받아들이고 정착시키고 이용할 수 있기까지는 끝없는 시행착오들이 있었다.
하지만 평범한 사람들과 인터뷰를 하며 요네하라 마리는 오랫동안 내려온 러시아의 힘을 믿기로 한다. 보통 사람들도 발레와 음악, 문학을 사랑하는 문화의 나라, 위아래로 40도의 온도 변화쯤은 끄떡않고 버틸 수 있는 사람들, 변하는 사회 속에서 필사적으로 균형과 길을 찾는 시간. 그리고 그 모든 것이 자리를 잡을 때, 다시 새로운 형태로 자리잡게 되리라.
아아, 역시 러시아인은 아직은 괜찮다. 돈, 돈, 돈, 돈을 위해서라면 뭐든지 하는 배금주의와 '보이지 않는 신의 손'을 순수하게 믿고 받드는 시장 만능주의의 세례를 통과한 러시아인은, 더 냉정하고 강하고, 그리고 더욱 늠름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