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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플러 - 가장 진실한 허구, 퍼렇게 빛나는 문장들
존 밴빌 지음, 이수경 옮김 / 이터널북스 / 2023년 12월
평점 :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1. 우리 각자의 사연
SNS의 해악에 대해 많은 이들, 특히 SNS를 하지 않는 분들이 주로 다음과 같은 비판의 논리를 내세웁니다.
“거긴 다들 지 행복하게 잘 사는 모습만 보여주려 혈안이 된 곳이야. 비교 또 비교, 시샘 또 시샘. 하등 도움될 일이 없는데, 뭣하러 그딴 앱을 깔아서 스트레스를 받냐?”
맞는 말입니다. 하지만 반만 맞고, 반은 틀려요.
왜냐구요?
삶이란 게, 감추려 한다고 완전히 감춰지지가 않거든요. 보여주려 애쓰는 모습의 여기저기서, 보여주려 하지 않는 모습의 요모조모가 읽히거든요. 어쩔 수 없어요. 그게 인간이니까요.
같이 요리나 해볼까요. 재료는 관심 가는 사람의 인스타 계정 하나면 충분합니다.
냄비에 물을 500ml 정도 넣고 중불에 얹습니다. 김이 오르면 게시물 중 좋아요랑 댓글이 가장 많은 것들 위주로, 두 주걱 정도 퍼담아 살살 젓습니다. 부드럽게 헤쳐진다 싶으면, 거기에 그이에 대한 호기심 한 봉, 애정 한 큰술 넣고 좀 더 끓입니다. 너무 팔팔 익히시면 형체가 뭉개지니 조심하셔야 돼요. 그윽한 향기를 풍기도록 졸여주세요. 다 되셨나요? 불은 끄셔도 되겠습니다.
이제 후추통을 조심스레 들어올리고, 뚜껑을 엽니다. 감칠맛을 더해줄 만큼, 딱 그만큼의 상상력과 추리력을 톡톡! 털어넣어 주시구요. 보기 좋게 플레이팅해서 식탁 위에 올리면...
짜라잔-! 희, 노, 애, 락, 애, 오, 욕으로 가득한 인간상의 완성입니다.
사연 없는 사람 없습니다. 늘 기쁘기만 한 사람도, 아프기만 한 사람도 없어요.
백발의 교수님이 판서 중 침침하다며 손수건으로 눈가를 훔치실 때, 실은 출근길에 불쑥 걸려온 옛사랑의 전화를 생각하며 회한에 젖어 계신지도 모를 일입니다. 한여름 산책로에서 태연히 눈을 감고 잠을 청하는 노숙자 아저씨, 포대기에 싸여 엄마 등에 업혀 있던 어릴 적을 떠올리고 계신지도 모를 일이구요. 늘상 싱글거리며 모두를 기분좋게 해주는 직장 동료, 그리운 아버지의 기일인 오늘, 퇴근길에 아이처럼 서럽게 울면서 차를 몰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말입니다.
그러니 귀한 사람이 있다면, 언제나 그이의 이면을 읽어내려는 노력을 기울일 필요가 있어요.
본작의 작가 존 밴빌이, 독일의 과학자 케플러를 향해 그러했듯이 말입니다.
2. 케플러의 사연
케플러의 업적과 그 의의에 대해서는 대학 시절 두 번 마주친 적이 있습니다. 1학년 미적분 시간에 한 번, 2학년 해석역학 교재에서 한 번. 핵심은 아래와 같아요.
(1) 그가 방대한 관측 자료로부터 취합하여 발표한 세 가지의 행성운동 법칙이 훗날 뉴턴이 수학적 추론으로 구축한 만유인력의 법칙으로부터 완벽히 유도된다 - 이로써 경험적 관찰과 수학적 모델링의 조화라는 현대과학의 기본 방법론이 완성되었다는 것.
(2) 행성들은 당대의 모든 천문학자들이 믿었듯 완벽한 원형의 궤도를 따라 등속운동하기는커녕, 타원의 궤도를 따라 태양과의 거리에 따라 변하는 속도로 운동한다 – 천상과 지상을 지배하는 힘은 같다는 것.
(3) 행성의 공전주기는 궤도장축의 세제곱에 비례(T²∝a³)한다 – 우주는 인간의 예측보다 훨씬 정교한 수학적 구조를 따른다는 것.
지루하죠? 작가도 이 점을 몰랐을 리 없습니다. 그는 이런 데에 집중하지 않았어요.
그가 우리에게 보여주기 원했던 건, 과학혁명이라는 찬란한 진주알을 빚어내기까지 케플러라는 진주조개가 바람잘 날 없는 삶의 바다에서 방랑하며 평생 겪은 고생, 그리고 불굴의 정신이 아닐까 싶어요.
이 글을 읽는 당신,
일자무식의 흙수저 가문에서 태어나셨나요?
엄마가 마녀로 몰려 화형대로 끌려갈 뻔한 적 있나요?
아내를 한 번, 자녀는 세 번 정도 잃어본 적 있나요?
당신이 하는 일의 가치를 제대로 이해하지도 못하는 이들에게 놀림감이 되어본 적 있나요?
고용주한테 20년치 임금을 체불 당해본 적 있나요?
종교 전쟁에 휩쓸려 파문 당하고, 삶의 터전에서 쫓겨나본 적 있나요?
이 글을 읽는 당신,
혹시 위의 일들을 빠짐없이 겪어보셨나요?
이 글을 읽는 당신,
그럼에도 불구하고 언제나 다시 일어설 수 있었나요?
케플러처럼요.
한 사람이 겪었다기엔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많은 불행과 그에 괴로워하는 케플러의 마음을 작가는 섬세한 필치로 그려냈습니다. 딱딱한 역사책 속 매가리 없이 박제된 위인들의 삶에 입체성을 부여하여 시대적 맥락 안에서 생동감 넘치게 되살려내는 것, 문학의 대체불가능한 권능입니다.
3. 덧붙임 몇 가지
- 이 서평은 이터널북스(@eternalbooks.seoul)에서 보내주신 도서를 읽고 작성하였습니다. 귀한 책을 선물해주셔서 감사합니다.
- 원작은 1981년에 발표되었습니다. 당해 가디언 지의 픽션 부문에서 수상하였습니다.
- 총 5장 중 넷째 장 ‘우주의 조화’는 1609년~1611년 간 케플러가 가족과 지인들에게 보낸 가상의 편지 이십여 편으로만 구성되어 있습니다. 케플러의 심경 변화와 당시 유럽의 정세 및 그가 처한 상황을 드러내주는 독특한 시도로 생각됩니다. 아마도 처음부터 끝까지 등장인물들이 주고받는 가상의 편지들로만 이루어진 도스토예프스키의 처녀작 「가난한 사람들」의 구성을 오마주한 것 같기도 하구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