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둠 속에서 헤엄치기
토마시 예드로프스키 지음, 백지민 옮김 / 푸른숲 / 202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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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둠은 자체로 포근하다. 무엇이든 덮어주고 감싸 안는다. 어둠 속에서 헤엄치는 일은 은밀하고 관능적이다. 시간이 지나고 어둠이 걷히면 따가운 볕이 내리 쬐일 것을 알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나온 사랑과 연인 야누시를 돌아보는 판의 시선은 애틋하다 못해 관대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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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란드계 작가라 폴란드의 시대 상황, 그들의 비틀어진 역사와 맞물려 서술되는 이야기는 단순히 퀴어 문학이라고만 말할 수 없다.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이 관통하지만 당시 공산사회의 참담한 현실, 체제에 대한 인식의 차이와 저항의 정도, 출세에 대한 욕망 등이 잘 어우러져 읽는 동안 절절함이 여기저기 배어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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퀴어 문학이 우리 문학의 한 흐름으로 온전히 자리 잡고 있는 만큼 독자들의 심적 스펙트럼 또한 넓어졌다고 생각하기에 이 책의 출간이 특히 반갑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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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162
우리는 더는 바깥세상에는 관심도 없었다. 우리는 안으로만 굽었다. 할머니는 매일 성당에 다니기 시작하면서 새벽 다섯 시에 일어나 첫 미사에 갔다. 할머니는 당신을 온전히 하느님에게 내맡김으로써, 때 이른 봉헌이라도 하듯 스스로를 하늘에 넘겨버렸다. 한편 나는, 책 속으로만 기어들어갔다. 어머니의 방에 있는 라디오는 언제까지고 덮개로 덮인 채였다. 두 번 다시 거기서 음악이라도 나오는 일은 없었다. 그로부터 몇 년이 지나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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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216
나는 전화를 끊고 공중전화 부스 안에 그대로 서서, 천장에 붙어 쇠 격자로 보호된 전구의 작은 원광 속에서 바깥에 내린 밤을 바라보았다. 내 인생은 벗어날 문 하나 없는 작고 비좁은 복도이자, 너무 비좁아서 팔꿈치에마저 멍이 드는 일방통행의 터널이었다. 그걸 하든지 공허로 가든지다, 나는 스스로에게 말했다. 그걸 하든지 떠나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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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241
“우리는 무슨 가망이라도 보이면 마냥 줄을 서대고, 여하간 뭐라도 받으려고 줄을 서대는데 어쩌면 아무것도 없는데도 줄을 서고 있는지도 모르지.“ 이렇게 말하던 부인이 슬프고도 다정한 특유의 웃음을 웃었다. “그래도 이것도 다 지나갈 거란다, 얘야. 제일 긴 줄이라 해도 종국에는 끝이 나기 마련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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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255
“도망치고 싶어 하는 쪽은 바로 너야. 본인이 도망치는 데에 날 억지로 끌어들이려고 하는 것도 너고. 자기가 바라는 방식으로 사랑해달라고 남에게 강요할 수는 없는 거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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